소설리스트

연기의 신-66화 (66/178)

< 군계일학 (8) >

이도원은 맨발로 딛고 있는 눈밭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원래 하얀 얼굴이 더 희게 바뀌었다. 특수 분장으로 만들어진 눈가의 주름이 꿈틀거렸다.

두리번 거리던 이도원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마침 차 키가 있는 걸 확인하고는 여기저기 겨냥해 버튼을 눌렀다.

삐빅-.

고물이 아닐까 의심되는 소형 중고차의 헤드라이트에 불이 들어왔다. 이도원은 문을 열고 올라탔다.

카메라가 떨어지며 차 안의 이도원을 잡았다. 줌으로 당겨진 표정은 돌처럼 굳어있었다.

철컥.

부르릉! 시동이 걸렸다.

“컷!”

정용주가 차 안까지 들리도록 힘껏 외쳤다.

이도원은 얼음장 같은 차 시트에 앉아 후- 숨을 뱉었다.

안과 밖의 온도 차가 없어 창문에 김도 맺히지 않는다.

“덥다, 더워.”

정신은 육체를 지배하는 법. 이도원은 중얼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발바닥에서 전해지는 차디찬 고통이 끔찍한 느낌을 선사했다.

때마침 달려온 오준식이 근처 마트에서 사온 털신을 신겨주었다.

이도원은 오준식의 등을 집고 신발을 신었다.

정용주 곁에서 웃으며 지켜보던 민영기가 말했다.

“동상 안 걸리게 조심하고. 빨리 찍고 들어가자.”

스태프들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온도계는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영하 17도를 찍었다. 그동안 일교차가 컸기 때문에 체감온도는 더 낮았다. 그럼에도 제작 팀은 풀 샷, 바스트 샷을 여러 구도에서 땄다. 그 덕분에 이도원과 스태프들은 거의 한 시간이 다 돼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콧물이 빗물처럼 흘렀다.

“후- 하. 후- 하.”

따로 난방을 떼고 촬영하진 않았기에 실내도 추웠다.

이도원은 연신 헛바람을 뱉으며 난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안쓰럽게 보던 김수려가 물었다.

“많이 춥지?”

“아뇨, 더운데요.”

억지로 웃다 보니 얼굴이 반쯤 일그러졌다.

그 광경을 본 정용주가 물었다.

“새벽까지 촬영해야 하는데 난방 뗄 수 없나?”

“그게, 빈 집이라서요.”

민영기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오죽하면 촬영 장비들을 싣느라 난로도 간신히 하나만 실을 수 있었다.

열악한 조건에서 하는 촬영이었다. 그러나 민영기는 위안했다.

“그래도 사극보단 낫잖아요?”

“그건 그렇지.”

정용주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사극이야말로 고생의 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 다시 시작합시다.”

그가 손뼉을 치며 말하자 스태프들이 움직였다.

이도원을 비롯한 배우들은 담요를 덮고 난롯가에 옹기종기 모여 대본을 맞춰봤다. 촬영할 장면에 대해 동선을 상의하고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물론 최종적인 결정은 연출인 정용주의 몫이었지만, 함께 연기할 배우들끼리 합을 맞추는 것이 먼저였다.

장비를 모두 들이고 스태프들이 위치하자 민영기가 말했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이도원은 현관문을 살짝 열어둔 채로 밖에 섰다.

거실 안의 김수려는 사다리 위에 올라가 전구를 만지는 자세를 취했다.

이도원이 자신의 삶을 잃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와 울고 아내 김수려가 영문도 모른 채 위로하는 씬이었다. 이 장면에서 분량이 없는 아역들은 방에 들어가 촬영을 구경했다.

정용주가 입을 열었다.

“레디.”

울어야 하는 이도원이 감정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용주는 카메라 감독과 음향 감독과도 눈빛을 교환했다.

확인 작업을 마친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신호를 보냈다.

“액션.”

이도원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입가를 여러 차례 씰룩이던 그가 힘겹게 말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뭔가가 잘못됐어. 미안하지만 난 당신과 아이들이 알고 있는 내가 아니야.”

김수려가 사다리 위에서 이도원을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전구를 끼우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무슨 헛소리에요? 이상한 소리 말고 이것 좀 해봐요. 누구는 크리스마스 준비에 한창인데. 함께 준비하기로 약속했으면서 아침부터 어딜 다녀온 거예요?”

이도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난 당신이 알고 있는 남편이 아니라고! 우린…….”

나직이 한숨을 뱉은 그는 마음을 달래며 말했다.

“우린, 십오 년 전 공항에서 헤어졌잖아. 그 뒤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건 당신이었어. 그러니까 내가 당신과 아이들을 버린 게 아니야.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김수려가 사다리를 내려왔다.

이도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을 갖고 살아왔어.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내 인생을 방해하는 거야? 십오 년 만에 나타나서… 이게 무슨 일이야……. 빌어먹을.”

이도원이 허탈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김수려가 그를 안고 토닥였다.

“당신, 요새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나 봐. 갑자기 십오 년 전 얘기는 왜 꺼내요? 그때 유학을 못 간 게 그렇게 후회됐어요? 화려한 삶을 살 기회는 잃었지만, 당신에게는 나와 아이들이 있잖아요. 비록 당신이 꿈꾸던 삶은 아니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지내고 있잖아요?”

차라리 사오정과 백분토론을 하고 말지.

이도원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고…….”

말문이 턱 막혔다. 눈물이 터졌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날아갔다. 죽을 둥 살 둥 쌓아왔던 모든 부와 명예가.

김수려는 여전히 심각성을 공유하지 못하고 사오정 방귀 뀌는 소리만 해대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여보, 그만 울고 전구나 좀 갈아 봐요.”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이 김수려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물었다.

“…뭐?”

“이제 곧 크리스마스잖아요? 색깔 전구를 달면 아이들이 좋아할 거예요. 가족들이랑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면 당신이 겪는 신경과민도 나아질 거고요.”

김수려는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이도원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말을 믿지도 않았다.

이도원이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김수려에게 물었다.

“내가… 평소에도 이런 말을 자주 했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항상 하는 말이잖아요. 귀에 딱지가 앉겠어요. 이런 좋은 날까지 꼭 현실을 비관해야겠어요?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 심한 것 같아요.”

여기까지.

정용주가 만족한 표정으로 신호했다.

“오케이, 컷.”

그는 창밖을 보았다. 불빛이 많이 없는 외진 곳이라 다섯 시가 넘어갈 때부터 밖이 어둑어둑해지더니 이제는 아예 깜깜했다. 현 시각은 오후 여덟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나이트 씬을 촬영해도 되겠군.”

중얼거린 정용주가 스태프와 배우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바로 세팅하고 다음 씬 들어가겠습니다.”

계획보다 촬영이 빨리 끝나면서 스케줄이 바뀌었다. 크리스마스 파티 씬을 오늘 밤으로 앞당겨서 찍고, 이웃집 남자 ‘기태’ 역의 유석연의 스케줄을 확인해 내일 아침까지 이어서 촬영을 하면 단축시킬 수 있었다.

촬영을 계속하자는 한마디에는 이 모든 뜻이 내포돼 있었다.

눈칫밥으로 단번에 알아들은 민영기가 말했다.

“강행군이겠군요. 스태프나 배우나.”

마침 아역들도 남아있었다. 기획사가 없고 스케줄이 널널한 아역들은 문제가 안 됐다.

스케줄이 빡빡한 성인배우들이 문제였다. 민영기는 성인배우들의 스케줄을 확인하고 스케줄 표를 수정했다. 그다음 매니저들을 모아놓고 이 같은 사실을 전달했다. 잇따라 불필요한 스케줄을 조정해야 하는 매니저들이 바빠졌다. 스케줄 조정 작업이 이뤄지는 동안 스태프들이 장비를 세팅했다. 배우들 역시 갑작스러운 철야 촬영을 대비하느라 대본을 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촬영 준비, 스케줄 조정, 배우들의 대본 숙지.

삼박자가 모두 들어맞게 된 건 한 시간 후였다.

결정이 나자 정용주가 말했다.

“힘내서 빨리 끝내고 조금이라도 자 둡시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배우들은 차에서, 스태프들은 난로도 들어오지 않는 마룻바닥에서 패딩을 덮고 잠을 청하게 될 터였다.

“허구한 날 놀자 판인 것 같아도 역시 할 땐 한다니까.”

민영기가 구시렁댔다.

정용주의 자유로운 면모 이면에는 촬영만 들어가면 일 중독자처럼 작업하는 모습이 숨어있었다. 그 덕분에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집에 가는 대신 다음 촬영을 위해 움직였다.

이번에는 이도원, 김수려, 아이들이 함께 나오는 씬이었다.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데 이도원은 즐기지 못하고 시종일관 어두운 얼굴로 앉아있는 장면이다.

소품 팀이 식탁 위로 성탄 선물들을 배치했다. 배우들이 식탁에 둘러앉자, 마침내 정용주가 입을 열었다.

“촬영 들어갑니다. 레디-.”

*

12월 25일 성탄절, 케이블 드라마 <시간아! 돌아와>가 첫 방송됐다.

1회가 방송되고 있을 시간에도 제작진은 촬영 중이었고, 밤을 새우며 2회를 철야로 촬영 했다. 뿐만 아니라 유석연이 도착하자 다음 주 방송을 위해 남은 씬을 마무리 지었다.

이도원은 서울로 가는 밴 안에서 휴대폰으로 <시간아! 돌아와 1회 다시 보기>를 시청했다.

휴대폰 화면에선 이도원이 아역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잔잔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며 어린 시절의 생활이 그러졌다. 공항에서 김수려와 헤어지는 씬이 1회 마지막 장면이었다.

드라마를 귀로 들으며 운전하던 오준식이 감탄했다.

“캬! 시청자들 반응 좀 뜨거웠겠는데? 역시 연기 하난 끝내주게 잘하네. 대사만 들어도 장면이 딱 떠올라.”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오준식은 백미러로 이도원을 힐끔 봤다. 이도원은 드라마를 보다 말고 어느새 골아 떨어져 있었다.

“피곤했나 보네.”

오준식은 중얼거리며 조용한 음악을 틀어주었다. 남양주에서 서울까지 삼십 분 밖에 잠을 잘 수 없는 거리였지만 그 시간만이라도 푹 쉬게 두고 싶었다.

한참이라면 한참 뒤, 이도원이 눈을 떴다.

“어디야?”

그가 묻자 오준식이 대답했다.

“십 분 후 도착입니다. 이 배우님.”

“후- 푹 잤다.”

이도원은 상체를 일으키며 눈을 비볐다. 몸살 기운이 느껴지는 게 아무래도 눈밭에 나와 촬영한 씬에서 감기가 걸린 듯했다. 아프면 이미지에도, 연기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배우에게 있어 몸 관리는 생명이었기에 이도원은 스스로를 탓했다.

‘멍청한 짓을 했어. 좀 더 신경을 쓰는 건데.’

핫팩이라도 여러 개 붙이고 촬영할 걸 잘못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이도원은 다음부터 신경을 써야겠다고 다짐하며 말했다.

“약국 좀 들리자. 몸이 안 좋아.”

“배우는 몸이 생명인데 큰일이네.”

오준식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일반인들에게 감기가 한 번 앓고 지나 보내면 되는 병이라면 배우는 화면 밖으로 티가 나면 안 됐다.

이미 진즉 낙담했던 이도원은 신경 쓰지 않고 휴대폰을 봤다. 마침 박아현에게서 기다리던 문자가 와있었다.

-우리 회사 대표님이랑 얘기했어. 네 제안은 승낙할게.

이도원은 시익 웃으며 유태일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태일입니다.

유태일 감독 특유의 낮은 저음이 들려왔다.

그 반가운 목소리에 이도원이 대답했다.

“여보세요? 저 이도원입니다.”

-아, 도원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한 달 후 <악마의 재능> 대본리딩이 잡혀서 일정이랑 시나리오, 대본 모두 백 프로덕션으로 보내던 참이다.

“전 드라마 촬영 마치고 서울 올라가는 중인데 거의 다 왔어요. 시간 괜찮으시면 오늘 한 번 뵙고 싶은데요.”

-오늘? 그럼 예전에 만났던 충무로 한정식집 알지? 거기서 다섯 시에 보자.

이도원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오후 세 시.

“알겠습니다. 이따 뵐게요.”

-그래. 이따 보자.

이도원이 전화를 끊기 무섭게 오준식이 물었다.

“또 어딜 가려고? 오늘은 집에서 좀 쉬지.”

“비즈니스가 좀 있어서. 충무로에 <죽림정>이라는 한식집으로 가줘.”

이도원은 웃는 낯으로 대답한 뒤 <시간아! 돌아와> 시청률을 검색했다. 요즘은 인터넷이 더 빨랐다.

“평균 시청률 2.2%로 출발했다.”

이도원의 말에 오준식이 뛸 듯이 기뻐했다.

“첫 방송 치고 괜찮네?”

“그러게.”

블로그들을 훑어본 이도원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미니시리즈 공모전 당선작품이 대박 났던 김미정 작가, MAC방송국 시절 흥행 드라마 제조기였던 정용주 PD를 보고 채널을 고정한 시청자들이 많다.”

“역시 이쪽 바닥은 인지도를 무시 못 하지.”

오준식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영화계나 방송계나 대중을 상대한다. 대중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야말로 직업적인 성취감이요 즐거움이고, 연봉 인상의 길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은 박아현에게 문자를 날렸다.

-오늘 7시 충무로, 유태일 감독님과 미팅.

이도원이 유태일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다섯 시. 두 시간 동안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박아현과의 자리를 주선할 생각이었다. 실제로 프리 프로덕션 단계의 섭외 전쟁에선 이처럼 감독과의 친분이나 배우들 간의 추천이 큰 비중을 차지했고, 그렇게 발탁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판은 모두 짰다.’

이도원은 어제 사무실에서 가져온 서류봉투를 챙겼다. 그 안에는 박아현의 서명을 받을 백 프로덕션 계약서가 들어있었다.

< 군계일학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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