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계일학 (7) >
이도원의 말을 들은 박아현은 고민에 빠졌다. 대부분 기획사들의 조건은 비슷했다. 그래서 인맥으로 소속사를 옮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다만 분명한 건 당장 결정 내릴 수 있는 제안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생각해 볼게.”
이도원이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 번호 그대로니까 결정 내리고 연락 줘. 여배우가 결정되기 전까지 유효한 제안이니까 서둘러야 할 거야.”
*
그때쯤 백 프로덕션으로 비보가 날아들었다. 백 프로덕션의 최고투자자이자 이상백에게 막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차광열 회장이 병환으로 몸져누웠다는 소식이었다. 광고촬영을 끝낸 이도원이 박아현에게 줄 계약서를 미리 챙겨두려고 회사로 들어왔을 때, 이상백은 병문안을 가고 없었다.
‘문자로 보내놔야겠군.’
이도원은 이상백에게 [계약서 조항이 궁금해서 계약서 한 부 가져갑니다.]라는 문자를 남기고 대표실에서 빈 계약서 한 부를 챙겨 나왔다. 그때 마침 이도원을 찾던 전략기획팀장이 말했다.
“도원 씨, 마침 잘 왔습니다. <시간아! 돌아와> 촬영이 오늘로 당겨졌다는 연락이 왔어요. 지금 즉시 준식 씨랑 남양주 촬영장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준식 씨, 주소는 문자로 넣어줄 테니까 네비 찍고 가면 돼요.”
그는 급하게 조정된 스케줄을 말해주었다. 드라마 스케줄이 꼬이면서 촬영이 없던 성탄절 저녁으로 시간이 옮겨진 것이다. 따라서 이도원과 오준식은 곧장 밴을 타고 남양주 화도읍 마석리로 움직였다. 촬영장소는 백 프로덕션에서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다.
오준식을 운전하는 동시에 드라마 제작팀과 통화를 나눴다. 예상 도착시간과 촬영시간을 조정하고 이도원의 저녁 트레이닝 일정을 취소하며 바쁘게 전화를 돌렸다. 한편 이도원 역시 당일 촬영하게 될 장면을 벼락치기 했다.
강변북로를 달리던 밴이 고속도로로 빠졌다.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이도원의 대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했을 땐 상대 여배우 김수려와 두 사람의 아들, 딸 역할을 할 아역배우들이 먼저 와있는 상태였다.
촬영장소는 주변이 휑한 공터에 위치한 전원주택.
“안녕하세요.”
이도원은 고개를 꾸벅 숙여 스태프들에게 인사하며 저택 밖에서 대기했다.
김수려가 다섯 살 아역 여자아이와 열다섯 살 남학생을 대동하고 다가와서 소개했다.
“이쪽은 수연이. 이수현. 여주인공 이름과 발음이 똑같아. 그리고 여기 이 늠름한 학생은 이재국.”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딸 역할의 이수현은 밝게, 아들 역할의 이재국은 무뚝뚝하게 인사했다. 이수현은 어찌나 귀여운지 눈이 얼굴의 반이었다. 한편 이재국은 키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춘기 소년이었다.
두 사람을 본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반가워.”
그들은 저택 안으로 먼저 들어가서 헤어 메이크업을 받았다. 그중 이도원은 특히 손이 많이 갔다. 삼십 대 남자를 연기해야 하므로 특수 분장을 받는 것이다. 첫 성인 분량 촬영이었기에 <우리의 심장>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자연스레 이도원의 분장 시간이 가장 길어졌고 나머지 배우들은 신기한 눈으로 그를 지켜봤다.
이도원이 김수려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대본 연습 안 해도 돼요?”
“맞다! 대본 봐야지.”
김수려는 호들갑스럽게 대본을 꺼내 읽는 시늉을 했다.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렸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FD 김춘식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촬영 시작합니다. 배우들 준비해주세요!”
배우들이 방 안에서 나갔을 땐 촬영장비가 저택 안으로 옮겨진 상황이었다.
FD 김춘식은 저택 밖에서 구경 온 주민들 통제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외진 곳이다 보니 드라마 촬영은 주민들을 자극할 만 했다. 그 결과 구경꾼들이 몇몇 몰려들었다.
첫 씬이 들어갈 안방의 침대 옆, 모니터 앞에 앉은 정용주가 말했다.
“오늘 촬영은 밤늦도록 계속될 겁니다. 다들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정우와 수연, 촬영 시작합시다.”
그 말에 따라 이도원과 김수려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그들이 연기할 부분은 이도원이 다른 삶으로 오자마자 놀라는 장면이었다. 차수희는 잠든 상태라서 특별한 연기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이도원은 그녀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를 주문했다.
“잠 버릇 연기를 좀 해주세요.”
“잠 버릇?”
대본상에는 명시돼 있지 않은 부분.
이도원은 그녀의 상상력에 맡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알아서 맞출게요. 빤한 장면이지만 한 번 잘 살려보죠. 스태프들을 놀래켜주자고요.”
그가 속삭이자 김수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정용주가 말했다.
“레디- 액션!”
원 테이크.
김수려가 몸을 뒤척였다. 이불 위로 한쪽 다리를 빼고 배를 긁적이며 가볍게 코를 골았다. 즉흥적으로 부탁했는데도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도원은 이불을 턱밑까지 덮은 채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끔뻑이던 그는 몇 초 정도 굳어 있다가 양옆을 보았다. 가볍게 코를 고는 김수려를 발견하고 입을 막았다.
“흡.”
두려움이 역력한 표정. 지금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심리가 훤히 드러나는 표정연기다.
이도원은 이불에서 살며시 손을 빼더니 배 위에 올려진 김수려의 다리를 집게손으로 집어 밀어냈다. 그는 이불을 걷고 조용히 일어나 살금살금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컷!”
정용주가 사인을 보내고 말했다.
“아주 좋았어요. 애드리브 쩌는데? 굳 아이디어! 그래도 한 번 더 갑시다. 정우가 갑자기 다리 만지니까 수연이가 움찔했어.”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도원이 다리를 치울 때 김수려가 움찔거린 것이다.
“미안.”
그녀는 혀를 빼꼼 내밀며 사과했다.
이도원은 피식 웃은 뒤 도로 누웠다.
“자- 레디, 액션!”
정용주가 외쳤다.
*
의외로 촬영이 길어졌다. 열두 번을 엔지내고 13테이크 만에 오케이를 받을 수 있었다. 계획에 없던 애드리브가 들어가서 초래된 결과였지만 모두가 만족할 만 한 장면을 건질 수 있었다. 아름다운 김수려의 우스꽝스러운 잠버릇과 익살맞게 당황한 이도원의 케미는 보기만 해도 웃음이 터지는 장면을 연출했다.
다음 씬은 잠옷 바람으로 거실로 뛰쳐나간 이도원과 아이들이 맞닥트리고, 잠에서 깬 김수려가 이도원을 부르는 데까지였다.
스태프들이 촬영 장비를 거실로 옮겼다.
정용주가 아역들을 불러 원하는 연기를 주문했다. 원래 리딩 때 참여했어야 했는데, 남학생과 여자아이 모두 학교와 학원 때문에 빠졌던 것이다.
이번에는 김수려가 이도원에게 조언했다
“우리 감독님은 애드리브에 프리하신 것 같아. 네 말 듣고 나도 한 번 생각해봤는데, 저기 안방 문턱이나 문 앞에 있는 서랍장에 걸려 비틀대는 장면도 괜찮지 않을까?”
아예 넘어지면 그건 오버다. 경극에서 나올 법 한 장면인 것이다. 하지만 김수려의 말처럼 가볍게 비틀대는 정도라면 웃음을 자아낼 수 있다. 더구나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십오 년 전 헤어진 연인이 있고, 생판 모르는 아이들이 아빠 취급을 한다면 졸도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재밌겠네요. 감사합니다.”
이도원은 순순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준비가 되는대로 조연출 민영기가 말했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이도원이 안방 문 앞에 서고 거실에는 딸 역할의 이수현이, 반대쪽 방문에는 아들 역할의 이재국이 위치했다.
모니터로 카메라 구도를 확인한 정용주가 말했다.
“배우들 레디.”
카메라 감독, 음향 감독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사인을 주고받은 정용주가 촬영개시를 알렸다.
“액션!”
이도원은 창백한 얼굴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상상력으로 호흡을 조절하자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거실에 앉아 인형을 만지고 있던 이수현이 이도원을 발견하고 크게 외쳤다.
“빠빠!”
혀 짧은 소리로 ‘아빠’를 부른 이수현이 다다다 뛰어왔다. 대본에는 없는 움직임을 정용주 감독이 주문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도원은 당황하지 않고 그전에 김수려가 말했던 대로, 서랍장에 걸려 비틀거렸다. 물론 카메라가 잘 잡을 수 있도록 전면은 고정시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쓴 채 입을 벌린 얼굴로 연기했다.
“뭐, 뭐야. 야, 야, 야.”
이수현이 다가올수록 이도원이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결국 한쪽 다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매달린 이수현이 밝게 웃었고, 그때 반대편 방문을 열고 이재국이 나타났다.
“아빠?”
“아빠아?”
말을 그대로 따라 한 이도원은 이수현을 반강제로 떼어놓고 두 남매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때 뒤에서 김수려의 막 일어난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 어디 갔어요?”
“으아아아악!”
이도원은 지금 상황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컷!”
훌륭한 연기 조합에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계속 롱테이크로 촬영하는데도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물론 중간중간 아이들의 표정이나 움직이는 속도에서 엔지가 난 상태였다. 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은 좋았다.
엔지였지만 유쾌한 엔지랄까?
정용주는 웃으며 말했다.
“엔지. 다시 갑시다.”
촬영은 계속됐다. 열 번이나 더 엔지가 났지만 크게 빗나간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아역배우들은 순조롭게 역할을 소화해서 이도원을 곧잘 당황시켰다. 조금 더 완벽을 기하며 엔지로 처리했을 뿐 열 번의 촬영 동안 반쯤은 킵 했다.
이도원은 촬영을 할수록 정용주의 연출 스타일이 굉장히 자유롭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마음껏 놀도록 배우들을 풀어주는 주의였다.
‘그래서 연기 잘하는 신인이나 조연 배우들로 고른 거군. 연기 잘하고 비싼 배우들은 인지도만큼 콧대도 높을 테고, 연기 못하는 신인을 가르쳐서 쓰자니 연출 스타일에 맞지 않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편 이도원이 새로운 삶에서 깨어난 장면을 카메라에 담은 정용주는 김수려와 아역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었다. 이제 이도원이 집 앞에서 차를 타고 떠나는 장면을 촬영할 차례였기 때문이다. 야외 촬영은 시간대가 중요했기 때문에, 해가 떠있을 때 먼저 끝내 놓으려는 심산이었다.
촬영 장비가 다시 야외로 나가고 이도원은 잠옷 위에 코트를 걸쳤다.
김수려는 그에게 한 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화이팅!”
미소로 화답한 이도원은 밖으로 나왔다.
살 떨리게 추운 날씨였다. 잠옷 바람에 코트 하나 걸친 이도원은 이가 갈렸다.
조금 더 기다리자 정용주가 말했다.
“배우 위치. 도원 씨, 조금만 참아요. 촬영 시작합시다. 레디.”
그는 빠르게 진행했다.
“액션!”
이도원은 새하얀 입김을 뱉으며 추위에 떨던 것을 멈췄다. 그가 연기할 ‘최정우’는 지금 혼이 나간 상태다. 추위 따위는 느낄 수조차 없을 만큼 넋이 빠져있다. 이도원은 그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현관문을 나서 마당을 가로질렀다.
카메라가 그를 따라갔다.
대로변까지 나온 그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때 구경꾼 하나가 소리를 냈다.
“영화배우 누구야?”
제법 큰 목소리였다.
잠시 고요해지고 이도원은 몸을 돌렸다.
정용주가 사인을 보냈다.
“컷. 엔지! FD! 모두 조용히 시켜.”
“죄송합니다!”
FD 김춘식이 구경꾼들에게 가서 양해를 구했다.
이도원이 제자리에 서자 정용주가 바로 사인을 보냈다.
“액션!”
하나 찍는다고 끝이 아니었다. 여러 구도에서 찍어야 했다. 그 만큼 촬영시간은 늘어난다.
이도원은 갈 수록 더해 가는 추위 속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연기를 펼쳤다.
눈이 수북이 쌓인 마당에서, 그는 맨발이었다.
< 군계일학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