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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신-64화 (64/178)

< 군계일학 (5) 여기부터 유료 분입니다. > 끝< 군계일학 (6) >

스태프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외주제작업체 소속이라 범한 실수였지만, 아무리 지하가 어둡다 한들 당일 촬영할 모델을 몰라본 것은 큰 실수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다소 짓궂은 장난을 친 이도원이 답했다.

머쓱하게 웃은 스태프는 박아현과 윤세라가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의상 갈아입으시고 다른 모델분들과 함께 메이크업부터 받으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도원은 광고 들어가는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미리 백 프로덕션 측에서 이도원의 옷 치수를 제공했기에 몸에 착 감기는 맞춤 의상으로 세팅할 수 있었다.

탈의실에서 나온 그는 박아현과 윤세라 곁으로 갔다.

박아현이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이야, 완전 오랜만이네? 군대 있을 때 편지 답장도 안 하더니.”

“내가 그때그때 현재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라. 몸이 멀어지면 연락을 잘 안 해.”

대답한 이도원이 화제를 돌려 그녀를 만난 소감을 말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더니. 예뻐졌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방송물이 좋긴 좋은지 얼굴에선 윤이 나고 전체적으로 멀끔해져 있었다. 전에는 그저 예쁘장한 고등학생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제법 연예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박아현은 코끝을 치켜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예뻤거든? <우리의 심장> 찍었다기에 개봉하자마자 가서 봤는데 역시 날 이긴 독백대회 우승자다운 연기력이더라.”

그녀는 엄지를 척 세웠다.

옆에서 두 사람을 보던 윤세라가 물었다.

“언니가 얘기한 그분이에요?”

“내 정신 좀 봐. 이쪽은 나랑 활동하고 있는 윤세라. 그리고 여기는 내 고등학교 시절 라이벌 이도원.”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라이벌이라는 건 너 혼자만의 생각 같은데?”

그는 윤세라에게 시선을 돌리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군대에서 많이 뵀습니다.”

“호호,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를 받아준 윤세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근데 벌써 군대 갔다 왔어요? 말도 안 돼.”

그녀는 고등학교 이 학년이었다. 불과 세 살 차이인 이도원이 벌써 군대를 제대했다니 놀라울 법도 했다.

이도원은 화제를 돌렸다.

“전 오늘 광고 촬영이 처음이니까 많이 알려줘요.”

“당연하죠. 저도 아직 미숙하지만 알려드릴게요.”

윤세라가 고개를 끄덕였고 박아현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많이 유해진 느낌인데?”

“그래?”

이도원이 되물었을 때, 세트 설치가 끝났다.

환한 조명이 들어오고 반사판도 위치한 상태였다.

삼십 대 여성으로 보이는 광고사진작가가 다가와서 미용 팀에게 물었다.

“모델들 준비 다 됐나요?”

“예. 다 됐습니다.”

미용 팀 직원이 대답하자 감독은 모델 세 사람에게 눈길을 돌렸다.

“전 이번 교복광고 사진을 맡은 이강윤 사진작가에요.”

“반갑습니다. 전 이도원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아현이에요.”

“안녕하세요! 윤세라입니다!”

그들은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이강윤 사진작가가 간단히 콘셉트를 설명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이도원이 중앙에 서고, 박아현과 윤세라가 어깨에 팔을 한 짝 씩 걸친 장면이 첫 콘셉트였다.

양쪽에 여자를 끼고 선 이도원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자연히 자세가 부자연스러워졌다.

‘이성과 보내는 성탄절이라 좋긴 한데.’

카메라를 겨누고 있던 이강윤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뻣뻣해요. 대각선으로 몸 돌리고, 턱 들고, 표정 도도하게.”

그녀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당시 <우리의 심장>을 보고 이도원의 마스크를 탐냈었는데, 영화연기와 달리 광고 촬영에 대한 재능은 꽝인가 싶었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이도원은 표정을 풀고 주문한 대로 움직였다.

바로 적응하는 모습에 이강윤이 조금 놀랐다.

‘제법인데?’

찰칵, 찰칵- 셔터 누르는 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그때마다 박아현과 윤세라는 자세와 표정을 바꿨다.

반면 이도원은 처음 주문한 그대로 서있었다.

다시 한 번 웃어버린 이강윤이 다른 콘셉트를 주문했다.

“아현 씨는 그대로 있고 세라 씨가 아현 씨한테 장난치면서 매달리는 느낌으로요.”

또 한 번 셔터 소리가 들리고 다른 장면.

“셋 모두 팔짱 끼고 나란히 서서 한 컷.”

여러 가지 콘셉트로 촬영이 계속됐다.

교복 광고였기에 화보 촬영보단 조심스러웠지만 은근히 섹시하게, 귀엽고 풋풋하게, 멋지고 예쁜 포즈로 바뀌며 다채로운 주문이 들어왔다.

삼십 분 정도 사진촬영을 했을 때 이강윤이 말했다.

“십 분 쉬고 나머지 콘셉트 촬영할게요-.”

이도원과 박아현, 윤세라는 이강윤에게로 가서 방금 촬영한 콘셉트를 확인했다.

이강윤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워낙 이미지들이 좋으니까 그냥 찍어도 화보네요. 편집이 많이 안 들어가도 되겠어.”

모두 한 묶음으로 말했지만 이강윤이 진짜 감탄하고 있는 대상은 따로 있었다.

대부분 얼굴에 손을 많이 안 댄 연예인들은 화면 보다 실물이 훨씬 낫다. 실물 이상 화면을 받기 위해선 성형이 가장 빨랐다. 많은 연예인들이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손을 대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아직 크게 얼굴에 손을 대지 않은 박아현과 윤세라 역시 같은 이유로 실물에 비해 그림이 안 나왔다. 한국 여성들 중 자연적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보정에 손이 많이 갈 듯했다. 그런데 이도원은 많이 손을 댄 얼굴이 아니었음에도 따로 보정이 필요 없을 만큼 화면을 받고 있었다.

‘실물도 잘생겼는데, 사진으로 찍어놓으니까 분위기가 살아나네.’

이런 모델들이 있다. 주로 외국 모델이 그랬다. 동양인에 비해 이목구비의 굴곡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작은 얼굴과 아름다운 신체비율까지 갖춰지면 이도원과 같은 그림이 나오게 된다.

모델들과 차를 한 잔 마신 이강윤이 운을 뗐다.

“그럼 다시 시작할까요? 이제부터는 한 사람씩 찍을게요.”

모델들이 원위치 하고 재차 촬영이 시작됐다.

조명이 들어오자 이강윤은 카메라를 통해 모델을 바라보며 풀 피겨 샷(FFS; 피사체의 형태에 알맞게 프레임에 꽉 채운 방식)으로 이도원을 잡았다.

‘이건.’

이강윤은 놀랐다. 이도원을 단독 샷으로 잡자마자 프레임을 채운 분위기가 바뀌었다. 광고촬영은 아이드마(AIDMA; 합성어)가 중요했다. 주의를 끌고(atention) 흥미를 유발하고(interest) 욕구를 불러일으키며(desire) 기억을 하게 만들어(memory) 구매를 유도하는(action) 기법을 말하는데, 이도원이란 모델만으로 아이드마가 완성된 것이다.

이강윤은 망설이지 않고 셔터를 눌러 모든 순간을 담아냈다. 이도원은 박아현과 윤세라를 통해 본대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야말로 놀라운 적응력이었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칼과 깊은 동공.

대조되는 백옥 같은 피부와 붉은 입술.

칠 등신이 살짝 넘는 비율과 역삼각형의 체형.

이도원만 부분 컬러를 넣은 듯 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스타일리시하군. 교복 광고인데 이렇게 섹시할 수 있다니.’

이강윤은 다시 한 번 감탄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녀가 느끼는 이도원은 변신의 귀재였다.

<우리의 심장>에서 여동생과 살아가는 가난한 청년 ‘상태’를 연기했을 땐 평범한 모습으로 감성을 자극했다. 그의 연기가 뛰어난 외모를 평범하게 바꾸어주었다. 그런데 모델로서 광고촬영을 하고 있는 지금은 정반대의 훤칠한 귀공자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캐릭터 콘셉트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신이 가능하다는 건 배우로서나 모델로서나 굉장한 이점이었다.

‘교복 말고 다른 옷도 입혀보고 싶어지네.’

이강윤은 셔터를 누르며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편 이도원은 슬슬 촬영에 재미를 붙이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민망했는데 색다른 즐거움이 있군.’

일단 영화나 드라마에 비하면 몸이 훨씬 편했다. 현장 분위기 역시 비교도 안 될 만큼 편안하고 화기애애하다. 배우로서 마음껏 연기를 펼칠 수 있는 영화, 드라마 현장에서 느낄 법한 짜릿함과 흥분은 없었지만 때때로 휴식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도원의 촬영이 끝나고 다음 박아현이 들어갔다.

윤세라가 그에게 물었다.

“오빠. 아까보다 훨씬 늘었던데요? 대단해요!”

그녀는 아낌없이 감탄했다.

불쑥 궁금해진 이도원이 물었다.

“고마워. 노래 부르랴 연기하랴, 가요캠프 MC에 광고촬영까지. 바쁘겠다.”

“전 어렸을 때부터 활동해서 그렇지, 별로 안 바빠요. 지금도 가수 활동이랑 가요캠프 MC만 하고 있는걸요.”

정말 만능 엔터테이너다. 만약 윤세라가 성인이었거나 한두 살 차이였다면 이도원은 꼼짝없이 선배 대접을 해야 했을 터였다.

이도원이 물었다.

“활동 분야 중 뭐가 가장 좋아?”

“연기가 가장 좋죠! 영화가 최고예요.”

윤세라는 성탄절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흥분해서 말했다.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영화 현장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타고났군.’

이도원은 윤세라를 보며 천성적으로 연예계가 어울리는 여자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심을 한 몸에 받고 느끼는 두려움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연기에도 타고난 재능을 보여준다. 박아현 역시 비슷한 경우였는데, 윤세라 쪽이 훨씬 더 끼가 넘쳤다.

정작 이도원은 이 둘과 달랐다. 침착하고 영리한 스타일로 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건 이도원이 이미 한 번 전생을 살아보면서 만들어진 노련한 연기력이었다.

그때 박아현이 들어왔고, 윤세라가 흥얼거리며 카메라 앞으로 나갔다.

박아현이 문 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사진작가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나가서 무언의 재스쳐였다.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은 복도로 나갔다.

박아현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피워?”

“아니.”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박아현은 입맛을 다시더니 담배를 집어넣고 말했다.

“그럼 나도 피우기 미안하네. 끊어야 하는데.”

“성인이니까 혼내진 않을게.”

이도원이 짓궂게 웃으며 장난을 쳤다.

박아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맞장구를 쳤다.

“씁, 어딜! 누님한테. 너 나보다 한참 후배야. 알지?”

“남들 앞에선 선배 대접해드리죠.”

“그러시든가.”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물었다.

“유태일 감독님 작품 들어갔다며?”

“응.”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아현의 표정을 읽었다. 복잡한 눈빛에서 그녀가 무언가를 말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뭔데. 말해봐.”

이도원이 먼저 묻자 박아현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나도 유태일 감독님 영화에 오디션 봤거든. 여주인공 역할로. 유태일 감독님은 날 선택했는데, 투자사에서 밀고 있는 여배우 때문에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야.”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건?”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한 박아현은 절로 위축됐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가 결국 말하기로 결정을 내렸는지, 슬며시 부탁을 했다.

“네가 유태일 감독님과 친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감독님 인터뷰에서도 네가 여러 번 언급됐었고. 결국 결정권은 감독님이 갖고 계시니까 설득해줘. 내가 실력으로 공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줘.”

유태일 감독은 투자사의 완력에 쉽게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인감독이다 보니 아예 무시하고 진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약 투자사의 참견을 무시한다면 앞으로 잡음이 생길 수 있었다. 말이 여주인공이지 분량도 적은 배역 섭외를 위해 그가 패널티를 감수할까?

아니, 유태일 감독은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섭외 결정권은 온전히 감독의 역량이고 그 기준이 연기력이 아니더라도 공정성에 어긋난다고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도원이 물었다.

“여주인공이라고 해도 분량은 웬만한 조연 보다 적어. 왜 꼭 이번 영화에 참여하려고 하는 거야?”

“유태일 감독님과 작업할 수 있는 기회니까.”

박아현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난 배우가 꿈이야. 지금 당장은 가수활동을 하고 있지만. 나는 가수활동을 하는 동안 앞으로 연기활동을 할 기반을 만들어 놓고 싶어. 그리고 네가 충분히 날 도와줄 수 있다고 판단했고.”

박아현은 영리했다. 하지만 영리한 걸로 치면 이도원 역시 어디 가서 빠지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노련함까지 갖춘 배우였다.

이도원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일단 도와줄게. 대신 내 부탁 하나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치사하게 이러기야?”

박아현이 장난스레 웃으며 묻자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공짜로 받으면 너도 불편할 거 아니야? 공평하게 하나씩 주고받자는 거지.”

“그 부탁이 뭔데?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인지는 알아야 하니까.”

“너 지금 계약기간 얼마나 남았어?”

이도원이 뜬금없이 물었다.

그의 의중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박아현이 답했다.

“내년 삼월까지야. 왜?”

이도원이 입시를 하고 군대를 갔다 온 사이, 일찍부터 기획사에 들어간 박아현은 이미 활동 삼 년 차였다.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대답했다.

“계약 끝나는 대로 백 프로덕션으로 들어오면 돼. 그럼 네 부탁을 내 일처럼 여기고 성사시켜주지.”

< 군계일학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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