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계일학 (5) 여기부터 유료 분입니다. >
<시간아! 돌아와>는 성탄절에 맞춰 첫 방송이 나간다.
극중 주인공 ‘최정우’가 다른 삶으로 가는 날도 성탄절이었으니 인위적인 연출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근래들어 거리에는 트리가 심심찮게 보였고 밤만 되면 가로수에 달린 전구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오케이!”
정용주는 컷 사인을 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도원은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았다. 엔지가 반드시 나올 법한 콘티를 연기할 때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괴물이야, 괴물.”
그 말을 들은 민영기가 피식 웃으며 나무랐다.
“정 PD님. 너무 치켜세워주면 애 버릇 나빠져요.”
“아무리 나빠져도 너보단 예의 바르겠다. 요 위아래 없는 놈아.”
정용주와 민영기는 둘만 있을 때 남몰래 티격태격했다.
조연출이 하늘같은 선배 프로듀서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건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하지만 정용주가 워낙 편한 성격이기도 하고, 민영기 역시 곧 프로듀서가 될 실력과 경력을 겸비한 조연출이었기에 가능한 그림이었다.
“선배님들, 그만 좀 싸우세요.”
이십 대 여자 스크랩터가 그들을 말렸다.
그때 이도원이 새하얀 입김을 뱉으며 다가왔다.
“잘 나왔나요?”
난로가로 달려가 불을 쬐던 김진구는 고개를 저었다.
“지독해, 지독해.”
김진구나 이도원이나 손발이 꽁꽁 얼 지경이었다.
한겨울 영하의 날씨에 코트를 입고 야외촬영을 하려면 지독하게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이도원은 몸을 녹일 틈도 없이 모니터링을 했다.
오준식이 어깨 위로 두툼한 패딩을 걸쳐주었다.
방금 촬영한 씬은 이도원이 ‘천사’ 역할의 김진구를 만나는 장면이었다.
‘천사’ 역의 김진구가 특수 분장을 하고 길거리 노숙자로 나왔다. 그는 어린 딸과 함께 길바닥에서 동냥을 하고 있다. 이를 본 ‘최정우’ 역의 이도원이 십오 년 전 자신이 등지고 떠난 뱃속의 아이를 떠올리고 오만 원 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기부했다.
“따뜻한 국밥이라도 한 그릇 드십시오.”
이도원의 대사가 흘러나왔다. 코트를 입고 삼십 대 남성으로 특수 분장을 한 이도원의 말투는 정중했다. 그가 몸을 돌려 자리를 피하려 할 때 김진구가 불러 세웠다.
“저기요, 잠시 만요. 나도 답례를 하고 싶은데…….”
김진구는 품속에서 꾸깃꾸깃하고 더러운 떼가 묻은 티켓 한 장을 건넸다. 그러나 이도원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니오. 받으시오.”
김진구는 티켓을 억지로 쥐여주며 신신당부했다.
“절대 티켓을 버리지 마시오. 만약 이 티켓을 버린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 테니까. 반대로 오늘 이- 성탄절 밤이 지날 때까지 부적처럼 잘 보관하고 있으면, 가장 원하는 것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거요.”
이도원은 그의 행색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몇 걸음 걷던 이도원은 고개를 돌려 방금 노숙자가 있던 곳을 보았다. 김진구와 그의 딸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후였다. 이도원은 고개를 젓고는 쓰레기 더미에 티켓을 버렸다.
모니터를 통해 풀 샷을 확인한 이도원은 바스트 샷들까지 차례로 검토했다.
‘좀 아쉬운데.’
김진구의 연기에서 아쉬운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후배인 이도원이 함부로 충고하거나 재촬영을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그래?”
정용주가 물었다. 이도원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지 못하자 대충 상황을 파악한 그는 김진구를 소환했다.
“진구. 이리 와 봐.”
어느 정도 몸을 녹인 김진구가 손을 후후 불며 다가왔다. 그는 정용주가 말없이 가리키는 모니터를 확인하고 이도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태클 걸었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이도원은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은 정용주가 말했다.
“몸 녹였지? 한 번만 더 가자.”
*
광고모델을 섭외할 때 보는 조건은 크게 세 가지였다. 일차적으로 성별을 보고, 이차적으로 연령과 이미지, 마지막으로 경력이나 실력을 보게 된다.
이상백 프로덕션은 이도원의 프로필을 교복 브랜드 <우등생>으로 보냈다. 우등생 측 광고 기획팀장은 프로필 추천을 통한 선별과정에서 이도원을 보자마자 손뼉을 쳤다.
“남학생은 이 녀석으로 진행하자.”
십 년 동안 광고계에 몸담고 있던 그였다. 척하면 척, 뽑는 모델마다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 실력과 경력을 기반으로 삼십 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기획팀장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실물 미팅은요?”
부하직원의 말에 기획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 바닥에서만 십 년이다. 사진만 봐도 실물은 어떤 느낌일지 감이 오는 거지. <우리의 심장> 모니터링하고 큰 문제없으면 바로 섭외해.”
이도원은 신인이었기에 모델료도 저렴했다. 대신 여학생 모델을 요즘 한창 뜨는 2인조 걸 그룹 <레드오션>의 윤세라, 박아현으로 섭외할 수 있었다.
해당 지면 광고는 열 곳의 잡지에 소개될 예정이며 전국의 교복점, 지하철, 학원, 사립학교 등에 배부될 계획이었다.
*
2019년 12월 25일 성탄절 당일.
이도원은 지난 오 일 동안 무려 열 개 씬을 촬영했다.
이도원과 오준식은 집에도 잠깐씩 들리며 하루 중 대부분을 현장과 차 안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드라마 초반부 대부분이 이도원이 나오는 씬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별 수 없었다.
그나마 정용주 프로듀서가 성탄절 하루 동안 휴식할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이도원은 광고촬영 때문에 마음 놓고 쉴 수 없었다.
이도원은 택시를 타고 백 프로덕션으로 출발했다. 그가 탄 택시가 내부순환도로와 동부간선도로, 강변북로를 거쳐 성수대교를 타고 청담동으로 넘어갔다. 거리는 제법 멀었지만 이십 분이 채 안 걸려 도착했다.
‘면허도 따야겠네.’
얼굴이 알려지면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기 곤란할 터였다. 그렇다고 매번 택시를 이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면허가 필요했지만 당분간은 면허시험을 볼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타임 슬립 전 한 번 따봤으니 시간만 주어진다면 합격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이도원은 회사로 들어가는 대신 밖에 주차돼 있는 밴에 탔다.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준식이 이도원에게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이도원은 뒷좌석으로 들어가며 답례했다.
“좋은 아침.”
고개를 저은 오준식이 시동을 걸며 한탄했다
“이번 성탄절도 남자랑 보내는 걸로 확정됐는데 좋은 아침이라니? 심지어 <나 홀로 집에> 케빈도 못 보게 됐다고! 이건 진지한 마음으로 하는 말인데, 내 팔자에는 정말 여자가 없나봐.”
밴에 타자마자 내일 촬영할 대본을 훑던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성탄절이라.”
“세상의 반이 여잔데 왜 내 짝은 없는 거지?”
“그 답은 너 자신한테 찾아야지.”
이도원이 놀리자 오준식이 발끈했다.
“그래서 넌 찾았냐?”
“나? 글쎄…….”
그는 이어 장난을 쳤다.
“너무 잘생겨서 여자들이 부담스러워 하나?”
“고양이 똥구멍 핥는 소리하고 앉았네.”
“그건 무슨 소리야?”
“몰라. 나 고양이 안 키워.”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들, <덤 앤 더머>가 따로 없었다.
사실 이도원도 오준식과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타임 슬립한 뒤 학창시절에는 매년 가족과 함께했고 작년에는 군대에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밴은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들어섰다. 거리에서는 성탄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곳저곳에서 케롤이 울려 퍼졌다. 차를 타고 이동해서 그런지 의외로 데이트하는 연인들 보다 행사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였다.
“연휴 때도 다들 바쁘게 일하는구나.”
이도원이 중얼거렸다.
백미러로 그를 훔쳐보던 오준식이 말했다.
“오늘 <시간아! 돌아와> 첫방이네.”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실감은 안 나지만.”
“대박 날 거다.”
오준식은 앞을 보며 말했다. 드라마 촬영을 위해 고생을 함께했던 그였기에 더욱 진심이 느껴졌다.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대답했다.
“믿어야지. 스태프도, 배우도.”
모두가 고생을 했다. 배우도 배우지만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일과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일하는 제작스태프들은 물론이고 백 프로덕션만 해도 정시에 퇴근하는 직원을 보기 힘들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는 야근과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스케줄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면 하기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오준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힘들지 않아?”
이도원이 묻자 오준식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 사회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하고 싶은 일의 언저리에서 머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행복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하긴.”
동의한 이도원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준식이 그를 향해 능청스럽게 물었다.
“그나저나 나중에 기회 되면 직접 연기 좀 가르쳐 줘. 신용운 선생님 수업을 참관하는 것만도 큰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러자. 대학교는 아예 복학할 생각이 없는 거야?”
“응. 내 사정이 한가하게 대학이나 다닐 수가 없다. 집에서 돈 버는 사람도 나뿐이고.”
이도원은 새삼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더 묻지 않고 딴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대학도 문제로군,’
이도원은 중영대학교 연출과를 선택해서 들어간 상태였다. 학점을 채우려면 학교생활을 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연예인들은 바쁜 스케줄로 인해 통학이 힘들었다. 따라서 근래에는 대학 포기를 하는 연예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다.
괜히 입학해서 학교를 상습적인 결석이나 지각이라도 하는 날에는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것과 동시에 구설수에 오르기 쉬운 것이다.
‘중퇴해야 하나.’
이도원은 일단 영화와 드라마 촬영이 끝날 때까지 휴학 신청을 한 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고민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가능하면 학교생활도 병행하는 게 좋아. 친근한 이미지는 앞으로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오죽하면 국회의원들도 선거철만 되면 밖으로 돌아다니며 시민들과 얼굴을 맞대고 친근한 이미지를 형성하려 할까? 다른 세상 사람 이야기라는 인식은 신비로운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적대감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이도원은 고민을 중단하며 대본을 집어넣었다. 촬영 장소는 성수동 스튜디오. 백 프로덕션이 있는 청담동에서 불과 십 분 조금 넘는 거리였다. 이도원이 탄 밴은 어느새 도산대로, 영동대로, 동일로, 뚝섬로를 지나 스튜디오 앞에 도착했다. 차가 멈추자 이도원이 물었다.
“여기야?”
“응. 지하 스튜디오야. 내가 이곳에 얽힌 일화를 하나 알지. 여배우 A양이 여기 왔다가, 스튜디오 위치가 강남이 아니고 지하라서 촬영거부를 했다더군.”
“뭐야 그 정신 나간 년은?”
“지난번 리딩 때 김수려 매니저한테 들은 얘긴데 우스갯소리가 아니래. 그때 그 여배우 파트너가 김수려였다네.”
연예계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오준식의 말도 납득이 가진 않았지만 사실일 터였다.
이도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계단을 따라 지하 스튜디오로 내려갔다.
초입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이 보였다.
이도원은 조용히 움직였다.
“우리가 왔는지 아무도 모르네.”
오준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빙그레 웃은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 사람이 그들을 보며 지시했다.
“어이, 거기! 그것 좀 가져와봐!”
발아래 있는 상자를 가리키며 한 말이다.
이도원과 오준식은 눈을 맞추더니 장난스럽게 웃고 상자 양쪽을 들었다. 두 사람은 지시를 내렸던 스태프에게로 가서 상자를 내려놨다.
“여기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를 발로 툭툭 찬 스태프가 말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신입인가? 이도원 언제 오는지 확인 좀 해봐.”
그때 한쪽에 있던 박아현이 이도원을 보며 외쳤다.
“이도원!”
이도원이 식 웃으며 스태프에게 물었다.
“제가 이도원입니다. 이제 뭘 하면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