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군계일학 (4) 기존 무료연재 분은 여기까지입니다
오준식은 매니저로서 첫 촬영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분장 차에서 내린 이도원과 김수려는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에는 카메라가 담는 범위보다 더 널찍한 줄이 쳐져 있었다. 또한 스태프들과 보조출연자들 모두 준비된 상태였다.
FD 김춘식이 구경하는 사람들을 교통정리하며 외쳤다.
“사진 찍지 말아주세요! 촬영 중입니다!”
다행히 한낮이었기에 승객들이 많지 않았고 제작진은 사전에 공항 측 촬영 허가를 받았다.
프로듀서 정용주와 조연출 민영기는 모니터 근처에서 전반적인 계획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행기 들어오기 전에 마무리 짓고 철수해야 됩니다. 한 시간 남았어요.”
“바로 시작하자. 승객들 동선 방해되지 않도록 신경 쓰고.”
고개를 끄덕인 민영기가 이도원과 김수려에게 말했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최정우’ 역의 이도원과 ‘정수연’ 역의 김수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섰다.
한쪽에선 엑스트라 반장이 보조출연자들에게 동선을 설명하고 있었다.
“다섯 명이 먼저 나가고, 오 초 센 뒤 다섯 명 또 출발. 나머지 열 명은 십 초 세고 마지막으로 출발. 내가 서있는 곳까지 자연스럽게 대화 나누는 시늉하면서 이동해.”
반장이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스크립터가 슬레이트에 보드마카로 씬 넘버와 테이크 횟수를 입력했다. 편집을 할 때 효율적이기 위해 하는 작업일 뿐 영화처럼 슬레이트를 치진 않았다.
한편 카메라 감독은 이도원과 김수려, 두 배우를 풀 샷으로 잡았다.
이윽고 모니터 앞에 앉아있던 정용주가 입을 열었다.
“레디-.”
주위가 고요해졌다.
정용주는 음향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외쳤다.
“액션!”
신호가 떨어지자 김수려가 달뜬 감정을 살려 연기를 시작했다.
“불투명한 미래보다, 같이 있는 게 멋진 거잖아.”
마주 선 이도원은 촬영 시작 전부터 두근거리던 심장이 점차 안정됐다.
이도원이 완전히 몰입하며 답했다.
“잠시 헤어지는 것뿐이야.”
이도원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김수려를 보았다. 시선을 맞춘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시 돌아올게. 매년 내가 있는 곳으로 널 초대할 거야. 아무 문제없어.”
이미 리딩 때 해봤던 대사였기에 줄줄 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리딩과 다른 점이 있다면 현장에선 움직임이 가미된다는 점이다.
이도원은 코트를 입은 김수려의 양 어깨를 잡으며 타일렀다.
“우리 모두 원하는 것을 이뤄야만 행복할 수 있어. 후회를 남기면 불행을 초래할 거야. 대신 아이가 태어나면 한국으로 돌아와서 너와 함께할게. 그때까지 잠시 떨어져 있는 것뿐이야.”
이도원의 어조는 느릿하지만 또렷했다. 천천히 흘러나오는 음성이 모두의 고막에 정확히 꽂혔다.
인상적인 화술에 긴장감이 고조됐다.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 받은 김수려가 홀린 듯 대답했다.
“불안해. 앞으로의 삶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우리 둘이 같이 있잖아? 난 우리를 선택할래.”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이내 그의 손이 김수려에게서 천천히 떨어졌다.
“불안해하지 마. 전화할게.”
표정은 복잡했지만 음성은 확고했다.
결심이 선 이도원의 표정을 보며 김수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도원이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의 표정은 부쩍 경직돼 있었다.
드르르륵…….
캐리어가 끌리는 소리가 침묵 속을 거닐었다.
이도원이 걸음을 옮겨 화면 밖으로 나가자 컷 사인이 떨어졌다.
“오케이, 컷.”
신호한 정용주가 민영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역시… 대수로울 것 없는 장면인데 잘 살리네. 밀도 높은 연기야.”
“다르죠, 뭔가가. 그게 주연의 아우라가 아닐까요?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조연 배우는 조연 배우고, 연기를 못해도 주연은 주연이니까요.”
민영기의 말에 정용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 테이크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스태프들의 표정이 밝았다. 현장 분위기가 활기를 띠었다.
스태프들이 장비를 이동했다. 카메라는 이도원의 바스트(가슴 위)를 잡았다.
정용주가 사인을 보내고 이도원이 같은 연기를 반복했다. 김수려는 매너 좋게 앞에서 대사를 쳐주었다. 이도원의 연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김수려의 바스트를 땄다.
다음은 방금 촬영한 장면의 앞 씬이었다. 김수려가 공항을 뛰어 들어오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이도원 촬영 분량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스태프들이 장비를 옮기는 동안 이도원과 김수려는 방금 장면을 모니터링했다.
“어때?”
정용주가 물었다.
김수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도원의 표정이 묘했다.
‘말해야 하나?’
이도원은 잠시 망설였다. 연출이 오케이 사인을 보낸 상태에서 신인배우가 태클을 걸면 그림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이미 스태프들은 장비를 옮기고 있는 상황이다. 짧은 고민이 있었지만 이도원은 결국 말을 꺼냈다.
“한 번 더 갈 수 있을까요?”
방송이 되고 후회하는 것보단 낫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다행히 정용주는 신인배우의 의견을 묵살하는 프로듀서가 아니었다.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민영기에게 지시했다.
“철수 중단시켜. 다시 간다.”
민영기가 시계를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엔지 없이 촬영이 마무리됐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다시 한 번 갈게요!”
장비 이동을 막 시작하려던 찰나 스태프들은 다시 자리를 잡았다.
이도원과 김수려, 보조출연자들이 자리에 위치했다.
마주 서서 시익 웃은 김수려가 작게 속삭였다.
“역시 거침없네.”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모두를 위한 작업인데 요구할 건 해야죠.”
*
촬영이 먼저 끝난 이도원은 의상을 반납하고 분장을 지운 뒤에도 김수려 촬영 분까지 모두 모니터링했다. 달리는 장면인데다 보조출연자와 부딪히는 등의 격한 움직임이 많았기에 여러 번 엔지가 났다. 그래도 비교적 수월하게 첫 촬영이 종료되고, 촬영 팀은 다음 촬영장소로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당일 촬영할 이도원과 김수려 분량은 끝이 난 상태였다.
먼저 가지 않고 기다린 이도원을 본 김수려가 물었다.
“점심?”
“아니요. 오늘은 사무실 들어가 봐야 해요.”
이도원이 대답하고 덧붙여 말했다.
“쫑파티 때 먹죠.”
“철벽남이네.”
시익 웃은 김수려는 고개를 끄덕이고 매니저와 자리를 떠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도원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고 오준식과 밴에 올랐다. 운전을 하던 오준식이 백미러로 이도원을 보며 물었다.
“첫 드라마 촬영한 소감이 어때?”
“그냥 뭐.”
촬영이 너무 일찍 끝나버렸다. 어떤 배우들은 이런 상황을 반길 수도 있겠지만 이도원은 아쉬운 마음이 컸다.
그는 덧붙였다.
“시원섭섭하네.”
오준식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앞으로도 질리도록 촬영할 텐데, 그때 되면 지금이 그리울걸? 본격적으로 드라마 나가고 영화까지 촬영 들어가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야. 어쩌면 밴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지.”
“그렇겠지.”
이도원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짙은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그 지옥행군이 끝나면 달콤한 열매를 먹을 수 있을 거야.”
오준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널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완전 연기에 미친 게 틀림없다. 지금도 녹음기랑 대본을 손에서 놓질 않잖아? 널 알면서 난 네가 연기하고 연기 연습하는 것 밖에 본 적이 없어.”
그 말마따나 이도원은 지금도 리딩 당시 받은 <시간아! 돌아와> 1,2회 최종대본을 중얼거리며 녹음기를 딸깍이고 있었다.
이어폰 한쪽을 뺀 이도원이 말했다.
“미안, 미안. 대사 외우느라 대화에 집중을 못 했네.”
“거짓말하지 마. 대사는 옛날 옛적에 달달 외워놓고.”
“그건 쪽 대본이고 이건 최종대본!”
이도원은 대본을 흔들었다.
“느낌이 달라요, 느낌이. 괜히 실수했다가 망신 당할까 봐 그런다.”
“너도 긴장이 되긴 해?”
오준식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이도원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망신을 당할까 봐 걱정되는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한 연기를 하게 될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몸과 마음으로 대본을 완벽히 숙지한 뒤, 현장에서는 반복적인 연습으로 생긴 강박감을 지우고 순간에 몰입한다. 그게 이도원이 연기하는 방식이었다.
“완벽한 준비만이 흥분과 두려움을 에너지로 바꿀만한 원동력을 만들어주는 법.”
이도원은 턱 끝을 치켜들고 능청스레 말했다.
오준식이 피식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순간 스타니슬랍스키(러시아의 연출가·배우·연극이론가)가 재림한 줄.”
밴은 공항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올림픽대로를 지나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를 달려서 청담동 백 프로덕션에 도착했다.
그간 반짝 바빴던 일정 때문에 주로 바깥활동을 했던 이도원은 오랜만에 이상백을 만나러 회사로 들어갔다.
“도원 씨, 왔어요?”
데스크 여직원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도원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계시죠?”
“그럼요. 기다리고 계시죠. 바로 올라가시면 돼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이도원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상백이 있는 삼 층의 대표실로 갔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쪼그려 앉아 책장에서 서류철을 빼고 있던 이상백이 안경 너머로 그를 반겼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간 사무실에 와도 시간이 안 맞아서 못 봤었지? 카메라 마사지를 받아서 그런가, 트레이닝을 받아서 그런 건가 얼굴이 부쩍 좋아졌군.”
“대표님은 핼쑥해지셨는데요.”
이도원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그 말대로 이상백은 살이 더 빠진 상태였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여러모로 마음고생이 심한 듯했다.
이상백은 내색하지 않고 이도원의 맞은편에 앉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네가 좋은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데 핼쑥해질 게 뭐 있냐? 요새 운동을 좀 해보려니 그런 게지.”
그는 화제를 돌려 일 얘기를 시작했다.
“광고 개런티가 책정됐다. 한 지면 당 백삼십만 원 씩 열 곳에 실린다.”
총 천삼백만 원이다.
기획사 몫을 50%로 뗀다고 해도 육백오십만 원.
이도원은 새삼 광고가 돈이 된다는 걸 느꼈다.
‘영화랑 드라마보다 더 버는군.’
배우는 연기를 해야 한다. 스튜디오에서 짧게 이루어지는 광고촬영으로 더 큰 보상을 받는다면 고생해서 촬영하는 영화, 드라마 쪽에 소홀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에서 연기하는 짜릿함을 버릴 수야 없겠지만 사람은 편한 것을 찾기 마련이다.
이도원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이상백이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큰 금액이지? 촬영 날짜는 현재 12월 25일 크리스마스로 잡혀있는데, 드라마랑 조율을 해봐야 확실히 나올 게다. 그리고 유태일 감독의 차기작 <악마의 재능>은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 촬영 전 준비) 단계다. 크랭크 인은 2월 23일부터 들어갈 예정이야.”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가 12월 19일이니 <악마의 재능> 영화촬영까진 두 달 정도가 남아있었다.
그때쯤이면 드라마 <시간아! 돌아와>가 방영되면서 촬영현장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해일이 밀려오는 걸 바라보는 기분이네요.”
이도원이 소감을 말했다.
이상백은 못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리가 될 것 같으면 말해라. 본격적인 스케줄이 나오면 그땐 늦어. 욕은 좀 먹겠지만 아직 영화 쪽은 빠질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하던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기회가 왔을 때 잡겠습니다. 파도는 한 번 놓치면 언제 또 올지 알 수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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