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60화 (60/178)

060/  군계일학 (2)

“산타클로스죠! 어? 안 놀래시네.”

유석연은 대사 내용이 주는 느낌과 달리 딱딱하게 말했다. 그가 연기하는 ‘김기태’ 역할은 마성의 매력을 가진 삼십 대 노총각이었다. 장난스러움과 진지함을 넘나드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유연한 연기가 필요한데 경직된 표정과 말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김미정 작가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연기를 끊었다.

“잠깐.”

그녀가 유석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죠? 캐릭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 같은 연기는.”

“죄송합니다.”

유석연이 축 처져서 대답했다.

‘왜 이러지?’

그는 혼란스러웠다. 이도원의 연기를 보고 단숨에 말린 것이다.

이 사실을 간파한 정용주 프로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김미정 작가에게 말했다.

“잠깐 시간을 주십시오.”

그는 배우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도원 씨와 석연 씨는 저 좀 보시죠. 나머지 분들은 잠시 자리를 피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미정 작가와 민영기 조연출은 리딩장과 연결된 소회의실로 들어갔고 배우들은 복도로 나갔다.

실내가 휑해지자 정용주가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문제가 뭡니까?”

“죄송합니다.”

유석연의 대답에도 정용주는 다시 물었다.

“문제가 뭡니까?”

이도원은 위축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선배님을 의도적으로 압박했습니다.”

의외의 답변에 유석연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스스로 책임을 떠안은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PD 님. 잠시 유석연 선배님과 단둘이 호흡을 맞출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알겠습니다.”

정용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회의실로 움직였다.

등 돌린 그의 얼굴에는 흡족한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역시 똑똑한 친구야.’

정용주가 퇴장하자 이도원은 불현듯 유석연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유석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이도원을 눈에 가시처럼 여긴 것은 그였다. 이도원을 의식했기 때문에 페이스를 잃고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도원은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고 먼저 화해를 청했다.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잖아?’

유석연은 내심 생각하며 대답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선배 답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아닙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제 행동으로 불쾌하셨더라도 용서해주십시오, 선배님.”

이도원의 태도는 전에 없이 진지하고 깍듯했다.

아무리 기분이 언짢았더라도 이렇게까지 나오면 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치졸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유석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행동이야말로 많이 불쾌했겠지. 옹졸한 생각으로 널 대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도원이 대답했다. 그는 유연석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당장 자존심을 세우는 일은 중요치 않았다. 서로 협력해야만 좋은 작품이 나올 테고 앞날에 도움이 될 터였다.

‘사소한 감정싸움으로 자멸할 수는 없지.’

이도원은 그런 생각으로 유석연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간단히 대본을 맞춰보고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죄송합니다.”

“폐를 끼쳤습니다.”

두 사람은 일어나 사과를 한 뒤 앉았다.

정용주가 손뼉을 치고 말했다.

“자, 다시 가봅시다. 조연출?”

민영기가 말을 받았다.

“그전 다음은 20쪽 47씬 부터 다시 가겠습니다.”

*

우여곡절 끝에 첫 대본리딩을 마친 이도원은 리딩장을 나섰다.

배우들이 저마다 매니저와 조우하면서 이도원 역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오준식과 만났다.

오준식이 물었다.

“잘 했어?”

“그럼.”

이도원은 시익 웃었다.

그는 배우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지하주차장으로 가서 벤에 탔다.

긴장이 풀린 이도원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피곤하군.’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오준식이 백미러로 힐끔거리며 물었다.

“피곤하지?”

“조금.”

대답한 이도원이 말했다.

“신용운 선생님께 말해볼 테니까 연기트레이닝 같이 받자.”

“뭐? 그게 가능해?”

오준식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조금도 식지 않은 모습을 확인한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얘기해봐야 알겠지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정 힘들면 참관이라도 부탁하려고.”

“우와. 그럼 나야 완전 좋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나중에 나보다 잘 돼서 끌어주면 답례가 되지 않을까?”

“농담은. 넌 옛날부터 남다른 면이 있었어. 난 네가 앞으로도 훨씬 클 거라고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신용운 선생님께 부탁해 본다고 하자마자 갑자기 입에 기름칠을 하네. 립 서비스는 그만하고, 촬영 일정은 나왔어?”

“응. 그렇잖아도 FD한테 일정표 받았어.”

오준식은 헤드레스트 너머로 파일을 건넸다.

이도원은 촘촘하게 짜여있는 일정표를 훑었다.

“당장 내일모레부터 촬영이네.”

“방송 날짜까지 최대한 비축 분을 만들어둬야 하니까.”

“하긴. 어차피 본격적으로 방송 나가면 생방 수준으로 돌아갈 텐데 조금이라도 여유를 만들어 두는 편이 낫지.”

그 말에 오준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같이 촬영할 동료 배우들은 어때?”

“글쎄…….”

이도원은 오늘 일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가 귀찮았다. 그는 화기애애하게 대본을 맞추었던 김수려만 떠올리며 대답했다.

“나쁘지 않아. 성격 좋아.”

“그래? 의외네. 연예인 병이 그렇게 무섭다던데.”

“케이블 드라마 아니냐. 톱스타급 만나면 다르겠지.”

이도원은 상상만 해도 피곤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 스케줄은 연기 트레이닝인가?”

“응. 연기랑 헬스 트레이닝 하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면 돼. 광고촬영 날짜는 일주일 뒤로 나왔고.”

“그래. 그리고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뭔데?”

오준식이 묻자 곰곰이 생각한 이도원이 대답했다.

“오다가다 김진우에 대한 정보 있으면 나한테 알려줘. 바로바로.”

“너랑 영화 들어가는 김진우?”

“맞아. 그 김진우.”

“왜? 네가 신경 쓸 만큼 연기를 잘하나?”

오준식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잖아도 이도원과 김진우가 유태일 감독 차기작에 들어가기로 결정되면서, 이상백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도원이 김진우한테 라이벌 의식을 가졌었다는 소리였다.

반면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연기를 잘하냐고?”

그는 고등학교 때 보았던 김진우의 연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타임 슬립 전 김진우가 나오는 영화들을 봤던 기억을 대조시켰다.

이도원은 대답하지 않고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금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김진우가 연기를 그만두게 만드는 것이다.’

이도원이 원하는 건 비교조차 안 될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김진우를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대립되는 배역 간의 존재감은 상대적이다. 즉, 이도원이 자신의 아우라로 스크린을 꽉 채우고 관객들을 모조리 사로잡는다면 김진우의 존재감은 그만큼 줄어들 터였다.

이도원은 오준식의 질문에 간접적으로 대답했다.

“제법이긴 하지만 지장 받을 만큼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오준식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원이 탄 벤이 신용운 아카데미로 향했다. 그는 연기수업을 받고 이설우 트레이닝 센터에서 운동을 마쳤다.

하루 일정을 모두 소화한 이도원은 모처럼 일찍 집으로 갔다. 아파트 단지로 막 진입했을 때 누나 이다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 역시 강의가 일찍 끝나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이도원이 문득 생각난 듯이 오준식에게 물었다.

“오늘은 일찍 집에 가야 하지?”

“모처럼 일찍 끝났으니까. 왜?”

“아니. 집에서 엄마랑 누나랑 맥주 한 잔 할까 하는데, 너 시간 괜찮으면 집으로 초대할까 했지.”

“오늘은 패스! 어린 동생들이 목 빠지게 기다린다고.”

오준식이 싱글벙글 웃었다.

이도원은 아쉬운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음에 꼭 같이 보자.”

그를 내려준 오준식은 차를 돌려 회사로 갔다. 회사에 벤을 대놓고 퇴근하려는 것이다.

그새 집에 먼저 올라갔는지 이다원이 보이지 않았다.

‘매일 집에 오는데 매번 오랜만인 것 같네.’

하루하루 다양한 일정으로 지내다 보니 하루가 길었다.

이도원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을 닫으려는데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게 보였다.

“잠깐만요!”

발랄하게 외친 여고생이 헉헉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만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잘 지냈어?”

이도원이 먼저 말을 걸자 여고생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삿대질했다.

“어어?”

그녀는 순간적으로 이도원의 이름을 잊어먹었는지 다른 말로 대체했다.

“완전 팬이에요!”

“저번에 말했어.”

이도원이 슬쩍 웃으며 문을 닫았다.

여고생은 지난번 싸인을 해주었던 일 호 팬이었다.

“오빠 기사 읽었어요. 드라마랑 영화 나온다고.”

“응. 꼭 봐.”

“영화 나오면 시사회 초대해주시면 안 돼요?”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당돌하고 활발한 성격의 여자아이였다.

이도원은 짐짓 고민하는 척하더니 물었다.

“넌 뭘 해줄 건데?”

“음. 홍보?”

이도원이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오케이. 그리고 하나 더. 드라마도 본방 사수하는 걸로.”

여자아이는 이도원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시익 웃었다.

“맡겨만 주세요! 저희 반 애들이랑 다 같이 볼게요.”

“그럼 더 좋고. 몇 호 살아? 우편으로 보내줄게.”

“저, 16층 1602호요.”

“그래.”

“우와, 진짜요?”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16층에 멈췄다.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여자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앙!”

이도원은 손을 흔들고 피식 웃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18층에 도착했다.

이도원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엄마! 이 배우 왔어요-! 귀한 아들 오셨어!”

현관문 소리를 들은 이다원이 화장실에서 소리를 질렀다.

“계집애. 귀도 밝네.”

부엌에서 요리를 하던 어머니가 중얼거리며 이도원을 맞이하러 나왔다.

“아이고. 우리 아들, 얼굴이 반쪽이 됐네.”

“요즘 헬스해서 그래요. 잘 먹고, 운동 많이 하고.”

“그래. 아무리 바빠도 밥 꼭 챙겨 먹고 다녀.”

이도원이 집에 도착할 시간에는 대부분 어머니와 누나 이다원이 잠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모처럼 보는 아들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고 이다원도 다 씻은 뒤 타월만 걸치고 나와서 이도원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툭 치며 물었다.

“이 누나가 동생 기사를 모조리 스크랩해뒀는데 한 번 볼래? 드라마 찍으랴, 영화 찍으랴 아주 바쁜 동생, 고생이 많아-.”

과잉친절에 이도원은 불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뭐야? 뭘 원해?”

“다-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잘 되길 바라서 하는 소리지 원하긴 무슨. 그나저나 자네, 돈은 좀 벌었나?”

이도원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지난번 출연료 말고 영화랑 드라마 계약금 들어왔어요. 말하자면 첫 월급인 셈이지.”

이도원은 시익 웃더니 어머니와 이다원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제가 요새 바빠서 미처 선물을 사 오진 못했지만 두 분 계좌번호를 문자로 보내주시면 현금으로 쏘겠습니다. 필요한 선물로 알아서 구입하시죠.”

그는 검지를 쭉 펴며 덧붙였다.

“맥주와 저녁도 쏠게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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