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군계일학 (1)
“우리 모두 원하는 것을 이뤄야만 행복할 수 있어. 후회를 남기면 불행을 초래할 거야.”
김미정 작가의 대본 수정으로 오디션 때와는 대사가 살짝 바뀌었다.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대신 아이가 태어나면 한국으로 돌아와서 너와 함께할게. 그때까지 잠시 떨어져 있는 것뿐이야.”
딱딱한 목소리였다.
‘정수연’ 역의 김수려가 떨리는 음색으로 궁합을 맞췄다.
“불안해. 앞으로의 삶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둘이 같이 있잖아? 난 우리를 선택할래.”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짤막하게 대답했다.
“불안해하지 마. 전화할게.”
그 말을 들은 김수려가 울먹였다.
프로는 확실히 달랐다.
‘<우리의 심장>에서 차지은 보다 훨씬 섬세해.’
이도원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해당 씬이 마무리되자 민영기가 말했다.
“7쪽, 씬 넘버 19.”
배우들이 대본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감이 팽배했다.
유석연과 정인아가 19 씬에서 호흡을 맞췄다.
김진구, 정상준 같은 조연들도 참여했다.
그때그때 김미정 작가가 피드백을 하며 이런저런 주문을 했다.
대본을 절반 정도 넘겼을 때 민영기가 전반전 종료를 알렸다.
“십분 간 잠시 휴식하겠습니다. 이다음부터는 감정 씬도 많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리딩 시간이 길어질 테니 중간에 끊어지지 않도록 이 점 유의해서 준비해주세요.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배우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도원은 배우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대본을 좀 더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때 말을 붙일 타이밍을 재던 김수려가 다가왔다.
“연기 잘 하던데요?”
“감사합니다.”
이도원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스물여섯 살의 여배우 김수려는 예쁜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백칠십 센티미터의 큰 키와 늘씬한 몸매, 작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백옥 같은 피부와 갈색 눈동자가 남심을 훔치기 충분했다.
그녀는 시익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함께 출연하는 분량이 꽤 되던데.”
“좋습니다.”
이도원이 대답했다.
타임 슬립 전의 기억이긴 했지만 어렸을 적 청소년 드라마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확실히 아역 출신 배우들의 외모가 뛰어나긴 했다.
‘오랜만에 활동하는 건데도 어색하지 않아.’
좋은 작품이 나올 듯했다.
이도원의 표정을 읽던 김수려가 제안했다.
“바쁜 일 없으면 대본 한 번 맞춰볼래요? 막간을 이용해서.”
“네. 좋죠.”
이도원은 도로 앉아 대본을 펼쳤다.
김수려가 바로 옆에 앉으며 그의 대본을 함께 보고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
옥상에 모인 흡연자들 간에는 이도원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연기 잘하던데요.”
복도 자판기에서 뽑아온 음료수를 선배들에게 나눠주며 정상준이 말했다.
김진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부정 못하겠더라고요.”
유석연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캐스팅 디렉터한테 개판 칠만 한 실력은 되더군.”
“선배님도 최정우 역할 오디션 참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상준의 말에 유석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근데?”
“선배님을 누르고 역할을 따낼 정도는 아니던데요.”
정상준의 말에 김진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애들 답지 않게 기본기가 탄탄하긴 하지만 그냥 그 정도 같던데. 드라마다 보니까 실력보단 비주얼로 배역을 따낸 것 아닐까요? 멋있게 생기긴 했던데요.”
“그만 얘기하자.”
대화를 중단한 유석연은 담배꽁초를 털어버리며 말했다.
“배우는 연기로 말하면 돼.”
그들은 화장실을 들렸다가 리딩장으로 돌아갔다.
유석연이 리딩장 문을 열자마자 본 장면은 이도원이 김수려와 딱 붙어 앉아 연습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새끼가…….’
유석연은 김수려에게 관심이 있었다.
김수려가 아역으로 첫 출연했던 청소년 드라마가 방영했던 시절부터 쭉 팬이었다. 당장 이성으로서 호감이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새파란 애송이가 한참 선배인 김수려와 격 없는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그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심지어 이도원은 김수려를 가르치고 있었다.
“여기서 좀 더 코믹하게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가 진지한데 선배까지 진지하게 받아주면 재미없을 것 같습니다.”
한편 김수려는 좋다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다.
유석연은 일부러 소리 나게 의자를 끌어 앉았다.
이도원은 힐긋 그를 보더니 이내 관심을 끄고 고개를 돌렸다.
‘하.’
유석연이 괘씸한 마음에 한 마디 하려던 찰나, 민영기가 들어오며 말했다.
“모두 준비되셨으면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김미정 작가와 정용주 프로듀서가 줄줄이 들어왔다.
한 소리 할 타이밍을 놓친 유석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미묘한 기류를 감지한 민영기가 속으로 웃었다.
‘기싸움이 시작됐군.’
일찍이 예상했던 바였다. 이도원은 새파란 신인이고 유석연은 연극판에서 이름 깨나 날린 배우다. 방송에선 조연이었지만 배우들 사이에선 인지도가 있었다. 활동 경력도 이제 칠 년 차인 배우였다. 그런 유석연이 신인배우 이도원에게 주연을 뺏겼다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이도원이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정용주 프로듀서도 대강 눈치챈 듯 눈빛을 교환했다.
민영기는 배우들 간의 분위기를 모른 체하고 말했다.
“대본 17쪽, 씬 넘버 40부터 하겠습니다.”
이도원이 ‘최정우’의 대사를 할 차례였다.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유석연을 신경도 쓰지 않고 연기를 시작했다.
“날 모른다고? 이 회사의 부사장인 날? 이봐, 장난하지 마요.”
건물 보안요원 역할의 단역은 아직 섭외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민영기가 대신 보조를 맞췄다.
“글쎄. 그러니까, 당신이 우리 회사의 부사장이란 말이오? 하하하!”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어대자 이도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복직하는 대로 가장 먼저 당신을 자르겠어.”
“그러시든가. 알겠으니 어서 나가시오.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김미정 작가가 별말 없자 민영기가 씬을 넘겼다.
“다음 18쪽 42 씬.”
이도원이 건물에서 쫓겨나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는 장면을 생략하고, 한강에 차를 세우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부터 다시 시작됐다.
“으아아아아!”
이도원의 외침이 실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금세 두 눈이 붉어지며 습막이 차올랐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야? 이게 무슨 개 같은 일이냐고! 내 인생이 전부 다 개꿈처럼 날아갔다고? 하하하! 하하하하…….”
이도원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보고 있던 사람들의 팔에 닭살이 우수수 돋았다.
순간 이도원의 표정이 상실감으로 가득 채워졌다. 창백하게 질린 혈색과 텅 비어버린 동공이 소름 끼치도록 사실적이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호흡이 격해졌다. 따라서 멍하니 있던 이도원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그는 딱딱한 표정으로 맹수가 그르렁거리듯 중얼댔다.
“내가 이대로 포기할 것 같아? 이대로 포기할 것 같으냐고.”
차분하게 독백하는 음성에 독기가 스며들었다.
“모두 다시 되찾는다. 내 손으로 한 번 이뤘던 것들이야.”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가슴은 분노로 타올랐다.
이도원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채 책상에 올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피부 위 핏줄이 선명하게 튀어나왔다.
이도원은 이를 갈며 대사를 씹어뱉었다.
“당신의 뜻대로 안될 겁니다. 십오 년 전 내 선택에 대한 형벌이든 단순한 변덕이든 절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두지 않을 겁니다.”
책상 위에 깍지를 끼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미정 작가의 입가에 미소가 매달렸다.
‘대본 이상으로 표현해 줄 수 있는 배우야.’
그녀가 프로듀서 정용주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정PD. 어디서 키운 괴물이에요?”
김미정의 의도를 잠깐 파악한 정용주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백 프로덕션 소속입니다.”
“백 프로덕션이요?”
“한창 뜨는 영화 투자사 겸 제작사입니다. 엔터테인먼트도 같이 한다더군요.”
“아하.”
김미정 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도원에게 말했다.
“감정이 좋군요.”
“감사합니다.”
이도원이 대답했다.
짧은 대화가 오가기 무섭게 민영기가 리딩을 속개했다.
“다음은 19쪽 45씬 입니다.”
이번에는 이도원과 김수려가 막간 동안 연습했던 장면이었다. 원래 살던 삶이 모두 사라졌다는 걸 확인한 ‘최정우’가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 ‘정수연’과 대화를 나누는 씬이다.
이도원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뭔가가 잘못됐어. 미안하지만 난 당신과 아이들이 알고 있는 내가 아니야.”
김수려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무슨 헛소리에요? 이상한 소리 말고 이것 좀 해봐요. 누구는 크리스마스 준비에 한창인데. 함께 준비하기로 약속했으면서 아침부터 어딜 다녀온 거예요?”
그녀는 (전구를 갈아 끼우며 말한다)라는 대본에 따라 말했다.
이도원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난 당신이 알고 있는 남편이 아니라고! 우린… 십오 년 전 공항에서 헤어졌잖아. 그 뒤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건 당신이었어. 그러니까 내가 당신과 아이들을 버린 게 아니야.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이도원은 감정이 폭발했다.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난 내 삶을 사랑했어. 기부활동도 많이 했지. 하하… 탄탄대로였다고! 빌어먹을!”
“당신, 무슨 소릴…….”
이도원이 김수려의 대사를 자르며 들어갔다.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을 갖고 살아왔어.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내 인생을 방해하는 거야? 왜 십오 년 만에 나타나서… 이게 무슨 일이야……. 젠장.”
감정이 고조된 상태로 시작했던 그는 막바지에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어지는 컷은 무릎 꿇은 이도원을 김수려가 안아주며 타이르는 장면이었다. 그녀가 잠시 사이를 두고 대사를 쳤다.
“이리 와요. 당신, 요새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나 봐. 갑자기 십오 년 전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그때 유학을 못 간 게 그렇게 후회됐어요? 당신에게는 나랑 아이들이 있잖아요. 비록 당신이 꿈꾸던 만큼 화려한 삶은 아니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지내고 있잖아요?”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고…….”
이도원은 말을 잇지 못하고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한참 동안 호흡만으로 장면을 끌어갔다.
자리의 모두가 그의 연기에 매료됐다. 김미정 작가조차 작가가 아닌 시청자가 되어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수그러들 때쯤 김수려가 대사를 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여보, 그만 울고 전구나 좀 갈아 봐요.”
주변에서 풋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도원은 시종일관 심각했고, 반면 김수려는 현실적인 모습으로 웃음을 줬다. 긴장감을 쥐락펴락하는 완급조절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도원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이제 곧 크리스마스잖아요? 색깔 전구를 달면 아이들이 좋아할 거예요. 가족들이랑 함께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면 신경과민도 나아질 거고요.”
김수려는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반응이었다.
이도원은 어렵지 않게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평소에도 이런 말을 자주 했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항상 하는 말이잖아요. 귀에 딱지가 앉겠어요. 이런 좋은 날까지 꼭 현실을 비관해야겠어요?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 심한 것 같아요.”
두 사람의 연기 호흡은 찰떡궁합이었다.
모두가 흐뭇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유석연은 절망했다.
‘이제 스물한 살이 어떻게 저런 연기를…….’
민영기가 씬을 넘겼다.
“자, 다음은 20쪽 47씬.”
유석연이 맡은 이웃집 총각 ‘김기태’가 성탄절 기념으로 놀러 오는 장면이다.
‘김기태’는 최정우가 아내에게 소홀한 틈을 타서 그녀의 마음을 빼앗으려 하는 역할이었다. 남녀 주인공의 갈등을 조성하면서 십오 년이 지난 현재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이기도 했다.
이윽고, 이도원이 유석연에게 대사를 건넸다.
“당신은 누구요?”
이도원의 눈빛을 받은 유석연은 말문이 턱 막혔다. 무대에서 숱한 부담감을 이겨냈던 그였지만 압도적인 연기력을 뽐내는 신인배우를 보고 느낀 절망감과 패배감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유석연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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