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58화 (58/178)

058/  텔레스코프 (telescope; 동시대사) (10)

배우 이도원, 매니저 오준식, 조연출 민영기, 프로듀서 정용주.

네 사람은 치킨 집에서 맥주를 한 잔 했다.

그중 이도원과 오준식 두 사람은 술자리 내내 듣고, 대답하는 쪽이었다.

새벽시간인데다 다들 피곤했기 때문에 자리는 금방 파했다.

집으로 가는 길 이도원이 오준식에게 말했다.

“집도 먼데 따로 들어가자. 난 택시 타고 가면 돼.”

사명감이 투철한 오준식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내 일인데 뭘. 마음만 받을게. 너 내레이션 녹음하는 동안 한 잠 때렸어. 지금 쌩쌩하다.”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이도원의 내레이션 녹음은 예정보다 훨씬 일찍 끝났다. 그런데도 오준식은 전화도 하기 전에 녹음실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즉 오준식의 말은 거짓이었다.

이도원은 모른 체하며 대답했다.

“알겠다.”

오준식은 이도원을 집까지 데려다준 뒤 귀가했다. 그때 시각이 새벽 세 시. 오준식이 집에 도착하면 다섯 시다. 다음날 일찍부터 아침 일정이 있기에 밤을 새고 이도원을 데리러 와야 했다. 어쩌면 사무실로 가는지도 모른다.

집에 도착한 이도원은 창가에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가 문제였다. 드라마 촬영 중간 쯤 영화 촬영까지 겹치면 더 바빠질 터였다. 오준식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매니저였지만 그 역시 지칠 것이다.

‘다른 배우들이 해줄 수 없는 것을 해줘야겠는데.’

오준식에게 동기부여를 해주려면 필요한 일이었다.

이도원은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한 가지 묘안을 떠올릴 수 있었다.

‘준식이가 연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되겠군.’

매니저들은 배우를 기다리며 대기하는 시간이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굉장히 지치는 일이었다. 차라리 이도원이 연기트레이닝을 받을 때 함께 받는다거나 하다못해 참관이라도 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오준식이 아직 연기를 완전히 놓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도원은 간간이 보이는 오준식의 표정을 읽었다. 그건 부러움과 씁쓸함 사이의 감정이었다.

*

다음 날은 대본 리딩이 있었다. TBT미니시리즈 <시간아! 돌아와>가 이제 막 발 돋음을 하려는 순간임에도 드라마국 회의실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프로듀서 정용주가 제작발표회를 요청했지만 기각된 것이다. 이유인즉슨 출연진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나 조연들로 구성됐다는 점이었다. 종방까지 기대시청률은 3%대에 그쳤다. 기대시청률이 그렇다면 통상 2%대를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기자들한테 전단지 좀 뿌리고 들어가려했더니 초장부터 초를 치는구먼? 제작발표회 대신 PD간담회로 대체한단다.”

정용주가 고무줄로 묶어놓은 파일들을 책상 위로 던지며 말했다. 그는 카라티의 단추를 풀며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마주 앉은 민영기가 그를 위로했다.

“어쩔 수 없죠. 동시간대 공중파가 워낙 강적들이니까. 케이블 드라마 치고 3%면 낮은 수치도 아니잖아요? 대부분 1~2%대로 시작하는데.”

“시작부터 적게 투자해서 중박만 치자는 건데 승부사 기질이 없어요. 승부사 기질이.”

“무명배우들 데리고 가는 판국에 기자들 불러서 글발 날리려면 돈 쥐어줘야죠, 밥 사먹여야죠. 이래저래 신경써줘야 하잖아요. 주연으로 아이돌 끼워 넣자는 국장의 제안을 대차게 거절하셨으니 그 정도면 양호한 거 아닙니까?”

“출연진 케미를 좀 봐라. 죽음이잖아? 인지도가 중요하냐?”

정용주가 책상 위에 올려둔 파일을 눈짓했다.

민영기는 파일들을 나열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죽음이란 말씀 반어법 맞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케미가 PD님이나 저한테만 해당이 되는 게 문젭니다.”

“시청자들도 알게 될 거야. 드라마가 끝날 때쯤에는 신드롬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없다. 우리 출연진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다크호스들이니까. 내 안목, 죽지 않았어.”

정용주는 강한 자신감을 보이며 자신의 눈이 정확하다는 걸 재차 강조했다.

반면 민영기는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작품성과 연기력만으로 만사형통이면 좋겠지만…….”

프로필의 이름들이 보였다.

이도원, 김수려, 유석연, 정인아, 김진구, 정상준.

민영기가 말을 이었다.

“도원이가 잘 적응해 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연기력이 있다고 해도, 가장 신인이 주연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배우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거예요.”

“잘 할 거다. 보통은 넘는 녀석이니까.”

정용주는 이도원을 떠올리며 확신했다. 그가 생각하는 이도원은 보통 여우가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 월등한 연기를 펼치는 모습이 그랬고 조용하지만 강한 존재감을 나타내는 점이 그랬다.

민영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어디서 봤다 싶은 배우는 있지만 대부분 시청자들이 처음 보는 배우들이에요. 끽해야 김수려 정도가 알만 하군요. 그마저도 아역 마치고 거의 오 년 동안 활동을 쉰 배우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남자 배우 하나는 유명인사로 끼워 넣는 건데 말입니다. 드라마 특성상 여성들이 주 타깃인데 예쁜 여배우라니…….”

‘예쁜 여배우’ 김수려 섭외는 정용주의 생각이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해명했다.

“김수려는 여자들도 좋아해.”

“알죠. 그래도 유명한 남자배우만 하려고요? 정 PD님. 여자들은 질투의 동물입니다. 자기보다 예쁜 애들 별로 안 좋아해요. 여배우 루머가 괜히 생깁니까?”

“난 반대다. 여자는 남자 보다 동성에게 관대한 동물이기도 하지. 타인을 인정하는 자세도 훨씬 개방적이고. 그러니까 네가 연애를 못하는 거야. 미묘한 심리를 이해하질 못하니까.”

“정 PD님은요? 자기도 노총각이면서…….”

그 말에 정용주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탄했다.

“하-. KAS에선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MAC였으면 이미 귓방망이가 서른 대도 더 날라 갔을 텐데. 방송계 기강이 싹 다 무너졌구나, 무너졌어.”

그는 이어서 덧붙였다.

“인마, 난 바빠서 안 하는 거다. 못 하는 게 아니고.”

그때 회의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영기가 말했다.

“예입!”

<시간아! 돌아와> FD 김춘식이 들어와서 보고했다.

“배우들 도착했습니다. 작가님은 차가 막혀서 십오 분 후 도착하신답니다.”

민영기가 고개를 끄덕이고 정용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발탁하신 배우들 연기력이나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죠. 기분도 풀 겸,”

*

TBT 드라마국 대본리딩장.

<시간아! 돌아와> 배우들이 속속들이 도착해 자리를 채웠다. 주연과 조연 배우들은 서로 목 인사를 주고받았고 안면이 있는 배우들끼리 안부를 물었다.

물론 이도원은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민망하군.’

그때, 주조연급 배역인 ‘이기태’ 역할의 유석연이 말을 걸어왔다.

“네가 소문으로만 듣던 신인배우인가 보군. ‘최정우’ 역할을 성인, 아역 둘 다 맡은 연기천재가 누군가 궁금했는데… 기대하지.”

유연석은 초면부터 말을 놨다. 활동경력뿐만 아니라 나이차이도 꽤 됐기 때문에 이도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배님.”

유석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서 조연인 김진구가 귓속말을 건넸다.

“제가 정윤복 캐디(캐스팅디렉터)한테 들었는데 쟤 고등학교 때 엄청나게 건방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유석연은 이도원을 날카롭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기 좀 죽일 필요가 있겠어.”

“그렇죠. 제깟 게 연기를 해봐야 얼마나 잘하려고요?”

김진구가 거들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도원에게도 들렸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드라마 오디션을 통해 봤던 캐스팅디렉터 ‘정윤복’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내 뒷말을 하고 다니나 보군.’

정윤복의 말만 듣고 자신을 쥐 잡듯이 잡으려는 두 사람도 우스꽝스러웠다. 유치해보이지 않으려고 기다렸다는 듯 갈굴 건수를 무는 것이다.

선후배가 뚜렷한 연기판은 어딜 가나 텃새가 심하다.

따라서 이도원은 일찍이 이런 부류들을 만나본 적 있었다.

‘헛바람이 잔뜩 들어가 있어.’

촬영이 기대만큼 순탄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딜 가도 마음이 안 맞는 사람은 늘 있는 법. 이도원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대본을 보았다.

그때 정용주 프로듀서와 민영기 조연출, 김미정 작가가 들어왔다. 김미정 작가가 상석에 앉고 정용주와 민영기가 양쪽에 앉았다. 영화는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지만 드라마는 작가가 대본을 쓴다. 따라서 대본리딩을 주관하는 것도 작가였다. 대본리딩은 작품을 창조한 작가가 대본을 해석한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조언하고 바로잡는 시간인 것이다.

모두 착석하자 민영기가 입을 열었다.

“모두 반갑습니다. 이곳에 서로 낯선 얼굴도 있을 텐데 리딩에 앞서 간단히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배우들이 박수를 쳤다.

민영기는 정용주와 김미정을 맨 처음 소개했다.

“저는 대본리딩 진행을 맡은 민영기 조연출입니다. 먼저 <시간아! 돌아와>의 제작을 맡으신 정용주 프로듀서, 김미정 작가님을 소개합니다.”

정용주와 김미정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따라 말했다.

“정용주 PD입니다.”

“반갑습니다. <시간아! 돌아와>의 김미정 작가입니다.”

민영기는 배우들을 앉은차례대로 소개했다.

첫 순서는 주연으로 발탁된 이도원이었다.

“이쪽은 <시간아! 돌아와>의 주인공 ‘최정우’ 역할을 맡은 이도원 배우입니다. 도원 씨는 고등학교 때 촬영한 영화 <우리의 심장>에서 호연을 펼쳤죠. 군 제대 후, 이번 작품으로 브라운관을 통해 복귀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도원이 꾸벅 인사하자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신인이거나 조연 출신이었지만 출연진 중 이도원 만큼 초짜는 없었다. 한 사람 씩 소개를 마친 면영기가 본격적인 대본리딩을 진행했다.

“그럼 <시간아! 돌아와>의 1화 대본리딩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대본 펴주십시오. 최정우의 내레이션 다음 공항 씬 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1회 초반은 최정우의 어린 시절 단독 씬들과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그 다음이 바로 이번 리딩의 시작점, 이도원의 대사였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배우들은 김미정 작가가 대본 수정을 감수하고 이도원에게 성인과 아역 모두를 맡겼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자리에 있는 배우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연기를 보여줬기에 새파란 신인이 주연배우로 발탁되었을까?

의구심 가득한 시선과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들이 이도원의 얼굴을 따갑게 찔렀다. 그럼에도 이도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 돌아올게. 매년 내가 있는 곳으로 널 초대할 거야. 아무 문제없어.”

대본 너머로 이도원의 시선이 꽂혔다.

‘정수연’ 역의 김수려는 소름이 돋았다.

‘뭐야?’

이도원이 감정을 잡는 데까지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뜨거운 시선은 사랑하는 연인을 보는 듯 했다. 애잔해 보이는 동공과는 반대로 무덤덤한 표정이 냉철하고 이성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첫 마디를 듣고 무언가 묘한 느낌을 받은 건 프로듀서와 작가, 조연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민영기는 뇌리를 스치는 직감이 있었다.

‘오디션 때, 일부러 실력을 감췄어?’

왜?

민영기는 그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딱 아쉬운 만큼만 보여줬다? ’최정우‘ 성인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

이내 그가 피식 웃었다.

‘지나친 비약이지.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나.’

민영기는 고개를 저었지만, 이도원의 아역 연기가 짧은 기간 이상하리만치 늘은 것도 사실이었다. 오디션 당시만 해도 아역과 성인 연기력의 차이가 심했던 것이다.

그땐 단순히 기복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단단히 잘못 생각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이도원이 다음 대사를 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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