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텔레스코프 (telescope; 동시대사) (9)
회의를 마친 이도원은 예정대로 신용운과 내레이션 연습을 했고, 오후 두 시 청담동의 유명 숍에서 피부 관리와 헤어 스타일링을 받았다. 연예인들이 이용하는 곳은 한정돼 있었기에 눈에 익은 얼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중 이미 친한 사람들끼리 인사를 주고받거나 옆에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반면 이도원은 아는 얼굴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지루하게 일정을 소화했다. 그다음 김설우에게 헬스 트레이닝을 받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와 벤에 탔다.
이도원이 운동하는 동안 회사에서 연락을 받은 오준식이 말했다.
“축하한다.”
“오디션 결과 나왔어?”
결과가 조금 늦어진 듯했다.
이도원이 묻자 오준식이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대충 예상했겠지만 합격이야. 성인, 아역 모두 너한테 넘어왔어. 대본을 수정하기로 했다네.”
“잘 됐군.”
이도원이 시익 웃었다.
오준식은 시동을 걸며 말했다.
“일단 밥부터 먹자. 오늘 밤 있을 내레이션 촬영만 아니면 축배라도 드는 건데…….”
오준식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오랜만에 조우한 뒤 변변한 술자리 한 번 가지지 못했다.
이도원 역시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일이 먼저였다.
“그래. TBT 방송국 주위에서 먹지?”
“그래야지. 괜히 늦어서 눈총을 받으면 곤란하니까.”
앞으로 작업을 함께할 사람들과 첫 만남이다. 미리미리 도착해서 준비하는 첫인상을 심어줘서 나쁠 건 없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시작이군.”
“이제 시작이지.”
오준식이 따라 말하며 헤드레스트 너머로 드라마 시놉시스와 내레이션 대본을 건넸다.
“너 운동하는 동안 PC방 가서 뽑아왔어.”
“땡큐. 고생했다.”
벤이 출발했다.
이도원은 뒷좌석에서 내레이션 대본을 읽었다.
“김미정 작가, 대단하네.”
그는 대사에 감탄했다.
오준식이 대답했다.
“떠오르는 신인이잖아. KAS 공모전에 당선했던 작품도 대박 났고.”
뽐내는 듯 말하는 어조에서 ‘조사 좀 했다’는 느낌이 풍겼다.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아는 것도 많아요. 아주 능력 있는 매니저야.”
“운명 공동체끼리 이 정도는 기본이지.”
오준식은 볼수록 넉살이 좋았다.
이도원이 계속해 대사를 읽었고, 삼십 분이 조금 넘어 TBT 방송국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근처 중국집으로 갔다.
밥을 먹고 있는데, 중국집 사장이 이도원의 얼굴을 훔쳐보며 말을 걸었다.
“연예인이신가?”
“배우입니다.”
이도원이 대답했다.
사장은 반색을 하며 종이와 펜을 가져와 내려놨다.
“저어기 걸려있는 액자 보면 알겠지만, 방송국이 근처라 연예인들이 많이 와요. 그쪽도 싸인 하나 부탁합니다. 내 잘 되길 주일 예배 때마다 기도해주겠소.”
이도원과 오준식의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웃음 지었다.
연예인을 익숙하게 대하는 특이한 사장님과의 만남.
이도원은 군대에서 연습한 대로 생애 두 번째 싸인을 했다. 첫 싸인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여고생의 몫이었다.
“감사합니다. 여기요.”
“그래요. 번창하시길 바래줘서 고맙소.”
가게 사장은 ‘번창 하세요’라고 적혀있는 걸 보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도원과 오준식은 다시 한 번 웃었다.
자장면 그릇을 깨끗이 비운 이도원이 말했다.
“화장실이 어디죠?”
“요 뒤로 돌아가면 있소.”
이도원과 오준식은 함께 양치를 하고, 음식값을 계산한 뒤 벤에 탔다.
방송국과는 삼 분 거리.
아직 열 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눈 좀 붙여둬. 난 대본 연습 좀 할게.”
차에서 내리려는 이도원을 보고 오준식이 말했다.
“여기서 연습해도 돼. 나 잠 귀 어두워.”
“소화 좀 시키려고. 멀리 안가니까 걱정 말고.”
이도원은 그렇게 말하며 따뜻한 물이 든 보온병과 대본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핑계를 댔지만 오준식이 자는 걸 방해하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새벽까지 운전을 해야 하는 오준식은 그 마음을 잘 아는지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시트를 젖히고 눈을 붙였다.
간단히 목을 풀은 이도원은 벤 주위를 서성이며 대본을 외웠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개활지, 이도원의 음성이 어스름해지는 밤하늘의 별빛에게 들릴 듯 뻗어나갔다.
*
두 사람은 내레이션 녹음이 있는 열두 시의 삼십 분 전 TBT 방송국에 입성했다.
현재 시각 열한 시 삼십 분.
팔 층 드라마국 녹음실에서 FD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도원 씨죠?”
“예. 내레이션 녹음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FD 김춘식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도원과 김춘식이 악수를 나눴다.
곁에 있던 오준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녹음은 얼마나 걸리나요?”
“배우 하기 나름이지만, 통상 두 시간 정도 걸립니다.”
김춘식이 대답하며 덧붙였다.
“실장님은 여기서 기다려주시고, 도원 씨는 안으로 들어가시죠.”
이도원은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종일 촬영이 없었기에 모자를 쓰고 흰 후드를 뒤집어쓴 편한 복장이었다.
방음시창 너머 편집실에는 프로듀서와 조연출 민영기도 와있었다. 그리고 녹음 지시는 민영기가 했다.
그는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대본 연습은 충분히 했죠? 마이크 테스트해보세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헤드 셋을 끼고 마이크를 근처로 입을 가져갔다.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셋. 됐나요?”
편집실에서 오케이 싸인이 떨어졌다.
이도원은 대본을 땅에 내려놓았다. 내레이션 녹음은 보통 대본을 보면서 하기 마련인데, 의외의 행동이었다.
대사를 외웠음을 뽐내기 위한 건 아니었다. 모두 외운 상태라면, 이편이 대사를 읽지 않고 말하기가 편해서였다.
이도원은 무려 십 분 분량의 내레이션을 대본도 없이 시작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 어린 시절은 특별했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부모님한테만 특별한 게 아니었다. 주변 모두가 날 보고 천재라고 인정해주었으니까.”
호흡을 단정히 조절한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내가 처음 특별함을 벗은 건 중학교 때, 그녀를 만나고 부터다. 난 벌거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옷을 죄다 벗고 알몸이 된 것처럼 창피했다. 내가 그녀를 짝사랑하는 이상 나는 평범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 여잘 짝사랑하는 평범한 남자, 공부 좀 잘하는 평범한 학생, 평범한 이웃집 소년.”
긴 대사였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이도원이 담담하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감성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편안하고 듣기 좋은 음색, 적당한 목소리 톤, 그리고 또 다른 무엇.
편집실에서 헤드 셋을 낀 채 듣고 있던 민영기가 한 차례 몸을 들썩였다.
‘저 녀석 연기는 볼 때마다 소름이야.’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도원은 계속 대사를 쳤다.
“내가 다시 특별해진 건 그녀의 마음을 빼앗았을 때부터다. 난 영화 주인공처럼 특별한 사랑을 주고받았다. 다른 동갑내기들 보다 일찍 대학 입학을 했다. 그것도 스카우트돼서. 근데 또 다시 문제가 생겼다.”
이도원의 대사는 한 결같이 잔잔하게 이어지는데, 왜 지루하지 않은 걸까? 내레이션은 촬영 때 연기랑은 달라서, 감정이 많이 표출되면 그 순간 망가진다.
‘공백을 메우는 절제된 연기력과 호소력 짙은 목소리.’
민영기는 아까부터 고민하던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았다. 그 와중에도 헤드 셋에선 이도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고 일 년… 이 년… 햇수가 지날수록 우리는 그저 그런, 평범한 연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녀와의 연애에 염증을 느끼고 있을 때, 임신 소식을 접했다. 내가 가장 먼저 든 감정은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하루하루 머리를 감싸 쥔 채 잠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던 그때, 이 상황을 회피하는 동시에 더 특별한 삶으로 갈 수 있는 문이 열렸다. 내가 선망하던 뉴욕주립대학교의 맷 라이언 교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이도원은 단 한 번의 흐트러짐이나 엔지도 없이 내레이션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 모든 것은 다 변명이다. 하지만 난 그날의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최고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내 인생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 유독 추운 겨울 그날,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편을 앞둔 공항에서 말이다.”
헤드 셋 뒤편에서 들려오던 이도원의 음성이 멈췄다.
민영기가 중간에 엔지 싸인을 보내지 않자, 프로듀서는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참이었다.
“뭐야?”
그 물음에 민영기가 헤드 셋을 벗으며 대답했다.
“끝났습니다. 오케이에요.”
“뭐?”
장난하나? 라고 얼굴에 쓰여 있다.
프로듀서는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말하자면 십 분 분량의 독백을 대본도 없이 대사를 친 것인데 새파란 신인배우가 엔지를 내지 않는다? 그것도 프로듀서와 조연출을 앞에 두고 하는 첫 녹음에서?
“그게 말이 돼?”
“일단 한 번 들어보시죠.”
민영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헤드 셋을 건넸다.
그가 비켜 서자 프로듀서가 그 자리에 앉아 녹음한 내용을 들었다.
‘원 테이크 오케이라고?’
마지막까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단 한 호흡도.
헤드 셋을 벗은 프로듀서가 민영기에게 물었다.
“저 연기 괴물은 뭐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네가 오디션 때 집중해서 보라며? 둘이 아는 사이 아니야?”
“제가 집중해서 보시라고 추천은 했지만, 저도 오랜만에 봤거든요. 예전에 번데기 수준이었으면, 지금은 독수리라니까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도원은 멍청하게 서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그는 헤드 셋을 벗고 제자리에 편히 앉았다.
대본을 주워서 읽으며 대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단 한 번으로 오케이가 났으리라곤 이도원도 생각지 못했다.
그 사이 감탄을 끝낸 프로듀서가 녹음실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쟤 뭐 하니?”
“연습하나 본데요.”
“당장 넘어오라고 해. 이번 작품, 느낌 좋다.”
프로듀서의 얼굴이 발갛게 익어있었다.
민영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KAS 방송국에서 넘어왔다. TBT 방송국은 분위기 자체가 자유분방했다. 대부분이 공중파 경력 출신이었지만 쓸데없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이 모였다. 너도나도 하나가 돼서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노력했다.
민영기는 흡족한 마음으로 녹음실 안에 신호를 주었다.
-오케이. 이쪽으로 넘어와서 직접 들어보세요.
이도원이 일어나서 넘어오는 동안, 민영기가 물었다.
프로듀서가 퇴근할 것처럼 주섬주섬 패딩을 걸치고 있었다.
“어디 가시려고 바로 짐 챙기세요? 이제 곧 제작발표회인데, 오늘부터 종방까지 야근 아닙니까?”
“야. 연기괴물이 왔는데 한 잔 해야지.”
프로듀서가 술잔을 꺾는 시늉을 하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다음 작품도 같이 해야 되는데.”
민영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 좋은데, 저 대책 없는 성격은 좀.’
술이야 드라마 끝나고 종방연 때 먹어도 되는 것 아닌가?
민영기는 그를 보필하는 자신의 운명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직감을 받았다.
“그럼 오늘은 시간도 늦었으니까 가볍게 맥주 한 잔만 하고 들어와서 일하죠. 그럼 저도 가고, 소주 드시면 전 남아서 일하겠습니다.”
“네가 소개팅 주선자 아니냐. 알았다, 맥주!”
프로듀서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도원의 등을 도로 떠밀며 말했다.
“도로 나가요, 나가요. 녹음 끝! 굳이 모니터링해야 돼? 해야 된다면 시켜주고. 안 해도 되면 녹음 본만 메일로 쏴주고.”
이도원은 엉겁결에 오준식이 기다리고 있는 복도로 밀려났다.
민영기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요 앞에 조그마한 치킨집 하나 있는데, 그쪽으로 오세요.”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모니터링을 하고 싶었지만 조금 미루기로 했다. 아직 신인이기에 고집스럽게 우기기 보다, 프로듀서의 안목을 믿고 한 발 물러서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이미 멀찍이 앞서나간 프로듀서가 엘리베이터를 잡고 서있었다.
“으, 추워! 빨리 타세요.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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