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텔레스코프 (telescope; 동시대사) (8)
신용운이 말을 이었다.
“네가 그전에 보였던 연기가 대본을 잘 ‘흉내’ 냈다면, 이번 연기는 네가 대본 속으로 흡수된 느낌이다. 연기를 할 때 장면, 장면마다 매 순간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라. 그게 바로 집중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이도원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빙긋 웃은 신용운이 엄지와 검지를 부닥쳐 딱-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럼 네가 했던 연기를 한 번 볼까?”
그가 손짓하자 권명섭이 거실에 있는 스크린에 방금 촬영한 이도원의 연기 장면을 틀었다.
신용운이 이도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스톱.”
권명섭이 영상을 멈추자 신용운이 말했다.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깊게 내쉰다. 모든 걸 체념한 표정이지. 대사 없이 꽤 긴 사이를 둬서 관객들의 감정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채희주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면 어땠을까?”
시작부터 지적이 나왔다.
신용운은 대답을 듣지 않고 손짓했다.
동영상이 다시 돌아갔다.
“스톱.”
이번에 멈춘 곳은 마지막 오열하는 부분이었다.
“이제 영영 헤어질 연인과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유일무이한 순간이다. 그런데 독백 내내 연인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지. 손이라도 잡고 호소하는 건 어떨까? 말투와 얼굴 표정, 온몸이 하나가 되어 감정을 뿜어내려면 손을 놓지 못하는 작은 움직임도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신용운은 일침을 놓았다. 술술 나오는 지적들이 하나같이 날카로웠다.
이도원이 자신의 연기를 카메라로 보고, 신용운의 지적을 들으며 찾아낸 해답은 ‘섬세한 연기로 창의적인 연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감정 전달력의 확장을 꾀하는 것이다.
‘관객의 내면 깊은 곳까지 들어가 감정을 끄집어낼 수 있는 연기.’
할 수만 있다면 꼭 해보고 싶은 연기였다.
이도원은 연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집중하지만, 그 외적인 시간들은 연기에 대해 끝없이 탐구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신용운이 이 경지를 일축했다.
“편집이 필요 없는 연기. 연출자가 군더더기를 찾을 수 없는, 절제돼 있지만 호소력 짙은 연기를 해라.”
*
첫날이니 일찍 들어가 쉬라는 이상백의 배려로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도원은 열한 시쯤 집으로 돌아와 씻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다음 날 눈을 떴다. 그는 기계적으로 아침 훈련을 시작했다.
화술과 체력단련. 군대에서 밑밥이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몇 년 간 단 하루도 빼먹은 적 없었다.
“으음.”
이도원은 신음을 흘렸다.
전날 무려 세 시간 동안 운동을 했기 때문에 몸이 말이 아니었다. 구석구석이 피로했지만 충분한 스트레칭을 했기 때문에 심각한 근육통은 아니었다. 그러든 말든 두 시간 체력단련을 끝내고 화술훈련까지 마친 이도원은 야채주스를 갈아 마시고 일찍 집을 나섰다.
가족들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곱 시였다.
미리 약속이 되어있던 오준식이 아파트 단지에 벤을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역시 이도원 보다 한 발 앞서 움직여야 하는 매니저인 만큼 아침 일찍 눈을 떴을 것이다.
“좋은 아침!”
오준식이 빙긋 웃으며 활기차게 말했다.
몇 시간 잠도 못 잤을 텐데, 아침 일찍부터 예민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배우의 기분을 최상으로 유지해주는 것 역시 매니저가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
그런 부분까지 헤아린 이도원은 마주 웃으며 친절하게 답했다.
“어제 잘 들어갔어? 피곤하겠다.”
“바빠서 피곤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
오준식이 긍정적으로 말했다.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 이도원이 물었다.
“오늘 스케줄 좀 말해줄래?”
“지금 곧 사무실에 들어가서 대표님과 면담하고, 오전 열 시, <시간아! 돌아와> 내레이션 연습이 있어. 신용운 선생님이 봐주실 거야. 그리고 오후 두 시 피부과랑 헤어스타일링 예약. 오후 다섯 시부터 헬스 트레이닝. 오늘 중으로 <시간아! 돌아와> 오디션 합격 통보가 오면, 자정까지 TBT 방송국으로 가서 내레이션 녹음하면 돼.”
오준식은 운전을 하며 말했다.
역시 초장부터 빡빡한 스케줄. 본격적인 영화나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기도 전인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바빠질 예정이다.
이도원은 시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짧고도 긴 하루가 되겠군.”
중얼거린 그는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어머니가 생일선물로 준 녹음기였다.
‘현재도, 앞으로도 이동 시간이 많을 텐데 시간을 버리긴 아깝지.’
이도원의 생각이었다. 그는 달리는 차 안에서, 희곡 책을 펼치고 대사 녹음을 시작했다.
*
백 프로덕션에 도착했을 때, 오준식은 어쩐지 얼굴이 반쪽이 된 느낌이 들었다.
‘두 시간 내내 대사 연습을 할 줄이야.’
흥겨운 노래도 반복으로 들으면 질리는 법인데, 고루한 희곡 대사를 반복으로 듣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오준식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짓궂게 웃은 이도원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백 프로덕션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그는 데스크 여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이상백은 벌써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상백이 안경 너머로 이도원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아직 쌩쌩하구나. 거기 좀 앉아라.”
이도원과 오준식이 소파에 나란히 엉덩이를 붙였다.
이상백은 서류를 들고 와서,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바로 일 얘기를 좀 해야겠다. 준식 씨는 모두 적고.”
오준식이 수첩과 펜을 꺼냈다.
준비가 되자 이상백은 말을 이었다.
“전략기획팀에서 결정한 바로는 도원이 네가- 광고촬영을 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다. 아직 너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걸 준식이랑 나 밖에 모른다. 그런 조건으로 회사에 들어왔다는 게 알려지면 앞으로 들어올 배우들도 같은 조건을 요구할 테니까.”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교복 광고를 하게 되면 앞으로 소화해야 할 역할들과 너무 차이가 나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전략기획팀에서 노리는 점이다.”
이상백이 말을 이었다.
“네 연기력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의견이야. 인터넷과 지면광고는 연기가 필요 없으니 네 이미지 그대로 나올 텐데, 앞으로 네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캐릭터에 따라 이미지가 변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이 배우는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다고 받아들이겠지.”
“제가 한 가족의 가장과 살인마라는- 극과 극의 배역을 하고 싶은 것도 같은 이유긴 하죠.”
“결국 이번 교복 광고는 전혀 나쁠 게 없다는 판단이다. 오히려 십 대들에게 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지. 배우 비주얼만 좋으면 궁금해서라도 찾아볼 나이가 아니냐?”
수첩을 긁적이던 오준식이 장난스럽게 거들었다.
“도원이 정도면 광고 나가는 대로 바로 팬카페도 생길 거고요.”
곰곰이 생각하던 이도원은 그들의 말마따나 나쁠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광고는 하도록 하죠.”
“광고 촬영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 개런티도 나쁘지 않다. 길어야 하루인데 개런티는 쏠쏠하지.”
이상백이 광고계약서를 건넸다.
“계약서에도 결정권이 네게 있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네가 직접 싸인해야 돼.”
“그럼 광고사에서 도원이의 계약 내용을 알아채지 않을까요?”
오준식이 물었지만 이상백은 고개를 저었다.
“광고 회사는 알아도 상관없다. 그렇게까지 파고들어서 생각하지도 않을 거고. 그저 배우의 의견을 존중해 싸인도 직접 하도록 한다는 정도로 받아들이겠지.”
하긴, 신인배우에게 결정권을 준다는 걸 누가 믿을까?
이상백과 이도원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회사 내부 사람들을 제외하면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오준식과 이도원,이 계약서를 읽는 동안, 이상백은 탭 북을 꺼내 인터넷 포털사이트로 접속했다.
이윽고 이상백이 두 사람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끊임없이 도전을 꿈꾸는 배우 이도원]
(서울=시네마24) 김흥수 기자 = “긴장은 속으로 하고 링 위에서는 절대 아픈 척하지 마라. 내가 가진 만큼 보여주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니 떨고 있던 제가 어느 순간 카메라 앞에서 놀고 있더라고요.”
부산국제영화제 수상작 <우리의 심장>에서 ‘동생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삼류인생 상태를 연기했던 이도원(21)은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그러나 바로 군대로 떠났고, 이제야 돌아왔다.
<우리의 심장> 촬영 당시 십 대였던 그는 스물일곱 살의 배역을 훌륭히 소화하며 주목받았다. 이처럼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그이지만 고등학교 일 학년 때까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독백대회에 나갔고 우승했죠. 그곳에서 이상백 교수님을 만나게 됐고요.”
백 프로덕션 이상백 대표(45)는 그의 연기 스승이다. 이도원은 여러 기획사들의 러브콜을 고사하고 백 프로덕션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저를 아들처럼 아끼며 가르쳐주셨죠. 그 덕분에 영화 오디션에 합격했고, 유태일 감독님의 <우리의 심장> 작업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그처럼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이도원은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한다.
“아직 힘이 넘쳐서 그런지 강한 역할을 갈구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역할이든 소화해 낼 수 있는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저만의 연기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이 젊고 패기 넘치는 신인배우는 내년 초 TBT 미니시리즈 <시간아! 돌아와>, 중순 유태일 감독의 차기작인 <악마의 재능>에 출연할 예정이다.
그가 촉망받는 신인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배우로 발돋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mail protected]
김흥수의 기사를 모두 읽은 두 사람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이상백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낯간지럽군. 천둥벌거숭이 같은 널 받아줬다고?”
이도원은 이번 생애 첫 만남을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이상백을 바라보며 물었다.
“인터뷰 내용은 괜찮죠?”
“어련할까. 이 기사를 신호탄으로, 네 기사들이 꽤 많이 올라왔어. 한 번 보거라.”
이상백은 화면을 넘겼다.
그 말대로 인터넷에는 다양한 제목의 기사들이 올라와 있었다.
[신인 이도원 주연 <악마의 재능> 올해 중순 크랭크 인]
[어리지 않은 ‘아역’ 이도원, <시간아! 돌아와> 주인공 유력]
[단숨에 시선을 끈 신인배우 이도원]
[‘유망주’ 이도원, 백 프로덕션과 한솥밥]
[이상백 대표, 이도원은 백 프로덕션 1호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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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죽 훑는 이도원을 본 이상백이 물었다.
“소감이 어떠냐?”
“글쎄요. 신기하기도 하고, 실감이 안 나기도 하고.”
이도원의 말은 한 점 가식 없는 진심이었다.
그를 본 이상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태일 감독 차기작이야 크랭크 인 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시간아! 돌아와>는 오늘 오디션 결과가 나온다. 작가가 대본 수정하고 널 아역이랑 성인 역 둘 다 쓰려 한다는 말이 있던데, 알고 있니?”
“그럼요.”
제가 바라던 바인 걸요.
이도원은 뒷말을 삼켰다.
고개를 끄덕인 이상백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많이 힘든 스케줄을 견뎌야 할 거다. 결과가 나오면, 오늘 내레이션 녹음을 하고 내일부터 제작발표회에 다니게 될 거야. 드라마 홍보하면서, 비축해 놓을 초반 몇 회 분 촬영하게 되겠지. 그다음에는 생방에 가까운 빠듯한 스케줄로 촬영이 계속될 테고. 드라마 촬영은 시간 싸움이거든.”
이도원의 이력에는 아직 드라마가 없었기에, 이상백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영화랑은 다르다. 그날 방영분을 당일에 마무리해서 보내고 편집하는 경우도 다반사지. 영화 역시 제작기간이 있지만 웬만하면 넉넉하게 잡고, 엔지를 내면 또 찍으면 된다. 하지만 드라마는 스케줄도 더 빡빡하고 시간이 없어. 연습할 시간은 더 없고. 심적으로 굉장한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타임 슬립 전, 조단역으로 활동할 때 이미 여러 번 드라마 촬영을 해 본 경험이 있었다. 물론 이도원 역시 다른 배우들처럼 드라마보단 여유가 있는 영화 쪽을 선호했다.
다만 초반에 인지도를 높이고, 이도원에게 들어가는 투자비용과 비례해 단기적인 수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회당 지급을 받는 드라마를 하는 편이 용이했다.
이런 부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한 작품이라도 더 찍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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