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54화 (54/178)

054/  텔레스코프 (telescope; 동시대사) (6)

이도원은 대본을 받았다.

주인공 최정우는 젊은 나이에 탄탄대로를 달리며 화려한 독신으로 살고 있다. 15년 전 공항에서 유학길에 오르지 않았다면 사랑했던 연인과 결혼해 아기를 낳고 살고 있겠지. 하지만 그는 가정을 일구는 길보다 성공을 선택했다. 혼자가 익숙한 성탄절, 모처럼 15년 전 헤어졌던 연인을 떠올리며 기이한 현상을 겪게 되는 최정우. 그는 15년 전 떠나지 않았다면 펼쳐졌을 현재로 간다.

대본의 내용은 최정우가 잠에서 깨어나 아내가 된 옛 연인과 아이들을 보고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면이었다.

‘내가 타임 슬립 했을 때와 흡사하군.’

이도원은 남몰래 시익 웃었다.

그때 민영기가 물어보았다.

“대본을 보면서 해도 됩니다. 준비됐나요?”

“준비됐습니다.”

이도원은 슥 훑은 대본을 한쪽 의자에 두고 왔다.

민영기를 비롯한 심사자들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 새 다 외웠어?’

그건 불가능했다.

그럴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으니까.

이도원은 상황만으로 어느 정도 숙지한 대사를 자연스럽게 이끌어갈 생각이었다. 생각하지 않아도 흘러나올 만큼 완벽히 입에 익히지 못했다면 대본 그대로의 대사는 의미가 없었다.

‘완벽한 연기를 보여줄 수 없다면, 나만의 최정우를 보여준다.’

다짐한 이도원은 호흡을 정리했다.

천천히 호흡을 가라앉힌 이도원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 장면은 잠에서 깨어나면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도원이 불현듯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자 심사자들이 미미한 웃음을 터트렸다.

코를 골다가 숨넘어가는 호흡과 함께 눈을 번쩍 뜬 이도원이 끔뻑거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지? 하는 생각이 얼굴에 쓰여 있다.

‘익살맞군.’

민영기는 미소를 띠고 생각했다. 나머지 심사자들의 입가에도 웃음기가 맺혀있었다.

이도원은 고개만 돌려 오른쪽을 보더니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옛 연인을 본 것이다. 15년 전 이후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녀가- 세월이 무색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잠들어있다. 물론 얼굴에는 고운 주름살이 생겨났지만.

이도원은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이불을 들춰보고, 자신이 팬티 바람이란 걸 깨달았다. 낯선 집안 풍경과 15년 전의 옛 연인. 제정신을 잃을 만큼 술에 취해 그녀와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찌 됐든 지금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이내 몸을 일으킨 이도원은 아주 조용한 몸동작으로, 살금살금 걷는 연기를 보였다. 침대 위에 있던 가운을 주워 입는 시늉을 한 그는 방을 빠져나가려다 문 앞에서 웬 꼬마와 맞닥트리고 덜컥 놀랐다. 이도원의 눈에만 보이는 꼬마 아이의 형상이 외쳤다.

“빠빠!”

이도원을 가리켜 혀 짧은 소리로 아빠라고 부른 것이다. 졸지에 두려움으로 표정이 굳은 이도원이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거실 반대편 방문 앞에 부스스한 소년의 형상이 서있었다.

열다섯 살 남짓한 소년.

“아빠, 왜 그래요?”

이도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도원의 표정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꼬마를 밀치고 거실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막 일어난 15년 전 헤어진 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밖에 무슨 일 있어요?”

외부적인 모든 건 이도원의 눈에만 형상화된 상상이었다.

이 부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심사자들은 이도원의 세심한 움직임과 시선처리에 전율이 돋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전생에 마임배우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던 이도원의 움직임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유로웠다.

한편 이도원은 소름이 돋는 양팔을 감싸 안고 집 밖으로 내달렸다.

“아- 아- 아- 아니야, 꿈이야! 내가 미쳤나? 아니면 정말 내가 그녀와- 실수라도 했단 말이야?”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이도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까지.

연기가 끝났음에도 심사자들은 이도원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연기에 몰입해 푹 빠져들었던 의식이 좀처럼 헤어 나오질 못한다.

이도원이 인사로 끝을 알렸다.

“이상입니다.”

모두의 표정이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막 재밌어지려는 영화를 보다 말고 나온 기분이었다.

‘이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늘었잖아?’

민영기 역시 놀랐다. 민영기는 괴물을 본 듯한 표정으로 이도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시간아! 돌아와>의 김미정 작가가 입을 열었다.

“피디 님. 주연배우, 아역과 성인 역할로 나누지 말고 한 사람으로 가시죠. 필요하다면 대본 수정도 불사하겠어요.”

영화에서 감독이 전권을 가지고 있다면, 드라마에선 작가가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프로듀서 조차도 작가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물론 김미정 작가가 말하지 않았다면 프로듀서가 같은 제안을 할 참이었었으니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프로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도원에게 말했다.

“이만 나가보세요. 자세한 결과는 회사 측에 통보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이도원은 리딩장을 나섰다.

오준식이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오디션이 길어져서 지루했을 텐데도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잘 했어?”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묘했다.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독백대회나 입시, 오디션 모두 혼자 치러야 했다. 가족들조차 한 번 초청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함께 결과를 기다리고 축하하고 기뻐해 줄 동료가 생겼다는 사실이 뭉클했다.

“다음 스케줄은?”

이도원이 묻자 오준식이 대답했다.

“오후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헬스 트레이닝. 여섯 시부터 여덟 시까지 연기 트레이닝이 있어.”

지금까진 이도원 혼자 관리를 해왔지만 이제부터는 프로로서 체계적인 관리를 받게 된다.

두 사람은 일 층으로 내려가 벤에 올랐다.

오준식은 이상백에게 전화를 걸어 일정 보고를 한 뒤 차를 몰고 개인 트레이닝을 받게 될 헬스장으로 갔다.

이도원을 내려준 오준식이 말했다.

“난 사무실 가서 스케줄 조정 업무 보고 여섯 시까지 데리러 올게. 수고해!”

“그래.”

근사한 건물에 [이설우 트레이닝센터]라는 간판이 달려있고 한쪽 벽에는 센터장인 듯 한 보디빌더 사진이 흑백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도원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삼 층으로 올라가자 모던한 인테리어의 실내에 운동기구가 꽉 들어차 있는 것이 보였다. 어두컴컴한 곳에 한 남자가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덤벨을 내려놓고 이도원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전 개인 트레이닝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이설우 퍼스널 트레이너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도원입니다.”

트레이너 이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연락은 받았습니다.”

이설우는 다가와서 후드 티에 쓱쓱 닦은 손을 내밀었다.

이도원이 그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앞으로 쭉 저를 담당해주시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서로 스케줄을 조절해가면서 시간을 맞추겠지만, 아마 매일같이 만나게 될 겁니다. 가족 보다 더 많이 볼게 될 거고요. 참고로 저는 아름다운 몸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한계점까지 끌어올린 하드 트레이닝을 돕고 있습니다.”

이설우의 엄포를 들은 이도원은 벌써부터 눈앞이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장난 아니겠군.’

이설우는 이어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했다. 결론적으로 국내에서 가장 유능한 트레이너 중 한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그는 다음으로 이도원의 인바디 체크를 했다.

“체지방 십 퍼센트, 골격근량 사십 퍼센트.”

결과를 중얼거린 이설우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원래 운동했었습니까?”

이도원은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집에서 꾸준히 운동을 했었습니다.”

뿌듯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왔던 체력단련이 빛을 본 것이다.

이도원의 배에는 뚜렷한 복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설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반인 치고는 괜찮은 몸입니다. 하지만 배우로서는 상품가치가 부족하달까요? 평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만 배역을 위해 살을 빼거나 찌울 때도 유리합니다. 그래야 몸이 상하는 것도 막을 수 있고요.”

그는 이도원의 몸을 만지며 말했다.

“복근, 어깨, 등은 그래도 적절하게 근육이 붙어있군요. 팔굽혀펴기, 그리고 복근운동만 한 느낌입니다.”

“정확하시네요.”

이도원이 쓰게 웃었다. 나름대로 운동을 꾸준히 해왔었지만 이설우가 보기에는 갈 길이 한참 먼 상태였다.

고개를 끄덕인 이설우가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헬스 트레이너처럼 우락부락한 몸이 아니니만큼, 크로스핏(cross-fit)이라는 운동법으로 몸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크로스핏은 프로그램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섞어 체력, 근력, 민첩성, 심폐지구력, 유연성, 속도, 균형감각, 정확성 등 전신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고안된 운동법입니다. 고강도의 훈련을 통해 최단 시간에 최대 효과를 낼 수 있어서 불규칙적일 수밖에 없는 운동 스케줄에 적합할 겁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이도원은 비명을 삼키며 운동을 해야만 했다.

스트레칭 한 시간, 유산소 운동 한 시간, 크로스 핏 한 시간.

이설우는 쉴 틈 없이 이도원을 몰아붙였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사실은 이 지옥과도 같은 세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지나갔다는 사실이었다.

온몸이 땀범벅이 된 이도원은 기진맥진했다.

프로그램을 마친 이설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씻고 오셔서 간단한 일정을 논의해보죠.”

이도원은 땀이 흥건한 웃옷을 벗어던지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개운하게 씻은 이도원은 이설우와 마주 앉아 식이요법에 대한 사항을 듣고 깔끔하게 정리돼 있는 식단 표를 받았다.

이도원은 다시 한 번 악수를 나누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설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스트레칭도 적절히 섞어가며 했기 때문에 근육통은 없겠지만, 그래도 틈 날 때마다 아까 배운 스트레칭을 하도록 해요.”

“예. 알겠습니다.”

대답한 이도원은 트레이닝센터를 빠져나왔다. 지하주차장에는 오준식이 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도원은 어렵지 않게 벤을 찾아가서 탑승했다.

“아이고, 죽을 뻔했다.”

이도원은 차 시트에 몸을 묻으며 끙끙거렸다.

오준식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운동 무지 힘들게 시켰나 보네?”

“쓰러지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더라.”

“그럴 수 있지. 요즘에는 연기만 잘한다고 먹히는 세상이 아니니까.”

고개를 주억거린 오준식이 헤드레스트 너머로 파일 하나를 건넸다.

“이번에 들어온 광고제의라는데 한 번 검토해봐. 그래도 주연이야.”

“나한테 광고모델 제의가 들어왔다고?”

이도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광고가 들어올 만큼 인지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 측에서도 좀 의외였나 봐. 데뷔 초부터 제안이 많이 들어오니까. 그래도 영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방송이나 광고 쪽은 비주얼이 전부다시피 하니까.”

이도원은 파일에서 제안이 들어온 광고를 꺼내봤다.

TV광고는 아니다. 많은 유명 연예인들이 찍었던 교복 광고였다.

“요즘에는 아이돌로 많이 쓰지 않나?”

“그랬었는데 이번에는 배우도 섭외하려나 보더라고.”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은 함께 촬영할 상대를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이도원이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박아현?”

어떻게 이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독백대회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이 등을 했던 동갑내기 여고생. 이도원에게 끈질기게 연락을 취했고 군대에 갔을 때도 편지를 보내왔다. 그 덕분에 근황은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기활동이 부진하자 이 인조 걸 그룹으로 전향했다는 내용을 본 것이다. 그래도 연기적인 재능은 뛰어난 편이었는데 내심 아쉬워했던 기억이 났다.

‘이렇게 또 아는 얼굴을 만나겠네.’

이도원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내심 친한 차지은과 함께하게 됐으면 했지만, 어디 세상 일 중 마음대로 되는 것이 있던가? 뭐,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 겸 박아현과 촬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도원은 박아현과 같이 활동하는 나머지 한 명의 사진을 봤다.

“윤세라.”

이도원이 중얼거렸다.

군 시절 TV를 통해 본 적이 있다. 가수활동과 연기활동, MC까지 병행하는 만능 엔터테이너. 박아현이나 이도원 보다 활동 경험이 많고 인지도도 높은 상대다. 그럼에도 윤세라의 나이는 박아현이나 이도원 보다 세 살 아래인 열여덟 살이었다.

앞좌석에서 이름을 주워들은 오준식이 부러운 듯 투덜거렸다.

“꽃밭에서 촬영하겠구먼, 꽃밭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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