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51화 (51/178)

051/  텔레스코프 (telescope; 동시대사) (3)

백 프로덕션의 일 층 데스크에 있던 여직원은 이도원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도원 배우 맞으시죠?”

“예.”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직원이 데스크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잡아주었다.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영화 잘 봤어요.”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대하기 편하고 선한 인상의 여직원이었다.

이도원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이도원이 들어가자 여직원이 문을 닫는 버튼을 눌렀다.

“이따 뵙겠습니다.”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삼 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열 명 정도가 일하는 사무실이 나타났다.

이도원의 앞을 지나던 한 남직원이 물었다.

“어떻게 오셨죠?”

“이상백 대표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 이도원 배우?”

“예.”

남직원은 서류철을 두 손 가득 들고 대표실을 눈짓했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도원은 사무실 안쪽에 있는 대표실 문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그러자 안으로부터 이상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이도원이 들어갔을 때 이상백은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대표이사 이상백]이라는 직함이 써져있는 명패가 놓여있었다. 안경 너머로 이도원을 발견한 이상백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 왔니? 거기 앉거라.”

이도원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앉았다.

이상백은 일거리를 서둘러 마무리 짓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오랜만에 봤는데, 일 얘기를 나누게 됐구나.”

“그러네요.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데, 정말인가 봐요.”

이상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었다.

“군대까지 갔다 오고, 더 늠름해졌구나.”

“감사합니다.”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대표님도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호칭을 바꾸는 게 자연스럽구나.”

이상백은 웃으며 계약서를 꺼내 건넸다.

“회포는 일 얘기가 끝나면 풀고, 천천히 읽어봐라. 급한 것 없으니까. 네가 일전에 말해두었던 조건들은 모두 넣었다. 작품 선택권, 출연 결정권, 성형 거부권. 나머지는 프로덕션을 창립하면서 계획한 회사의 룰대로 맞췄다.”

“예.”

이도원은 계약서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원이 신인인 걸 감안하면 요구조건을 들어준 것만 해도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걸리는 부분이 보였다.

“대표님. 엔터테인먼트는 대부분 신인배우에게는 5대5, 유명 기성배우일 땐 9대1로 책정하지 않나요?”

“맞다.”

“아직 저랑은 크게 상관이 없지만, 백 프로덕션은 유명 기성배우에게도 최대 계약비율이 7대3이네요?”

고개를 끄덕인 이상백이 말했다.

“우리 회사는 기성배우들에게 계약금 조차 없고, 계약비율도 다른 회사들에 비해 불리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현업에서 일하고 있는 스태프들과 매니지먼트 쪽에 많은 투자를 해서 시스템적으로 배우들 스스로 체감할 수 있게끔 했다.”

이상백은 자랑스럽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스태프들의 연봉이나 복지수준을 업계 최고로 보장해줌으로서 양질의 인력을 흡수하고 있지. 그러니 배우들의 마케팅 전략과 현장업무 역시 수준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래야 신인들에게 보다 장기적인 전략을 세워주고 제공해 줄 수 있지.”

“신인들에게 유리한 조건이군요.”

이도원은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이상백다웠다. 안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기성배우의 비율을 낮추는 대신 신인 배우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자는 의미였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회사가 돌아가면 도산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백 프로덕션은 신인배우를 키우는 데에 드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영화제작사로서 이익을 통해 충당하겠다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중 성공하는 작품은 10% 내외. 영화제작이 지금처럼 매번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실패하는 영화가 나오게 되면 적자가 발생하고, 매출을 올려줄 기성배우가 없다면 위험을 대처할 방안이 사라진다. 많은 기획사들이 9대1의 파격적인 대우로 기성배우를 영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은 투자로 안정적인 고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기성배우들은 굳이 7대3을 제안하는 백 프로덕션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기획사는 초기에 어떻게든 기성배우를 잡아와서 수익을 내야한다. 그런데 백 프로덕션은 영화제작 성공으로 거둔 성과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신인배우들에게만 투자하고 있으니 성과가 부진할 수밖에 없지.’

속으로 생각한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의를 제기했다.

“기성배우들이 회사의 철학과 경영방침을 미리 이해하기 어려울 텐데요.”

그의 한 마디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대해 문외한인 이십대 초반이 던지는 질문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이상백은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회사 투자자와 미팅을 갖는 기분이군.’

그럼에도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엔터테인먼트는 사람에 대한 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사람에 대한 투자야말로 생명력이자 경쟁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안정적인 매니지먼트를 제공해줌으로서 신인이 언젠가 기성배우가 되고, 그들이 회사의 탄탄한 자산이 되어줌으로서 새로운 배우들을 영입할 길도 열리게 될 게다. 오래 전부터 몸집만 불리던 엔터테인먼트들이 많았지만, 대부분이 도산하고 말았지. 우리 회사가 추구하는 바는 단기적인 이익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믿고 함께할 수 있는 곳이 되는 게 목표란 뜻이지. 때문에 영화 투자사업을 함께 진행하는 거고.”

“잘 알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당장 더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사인을 했다. 계약서상에 조건을 확인했고, 회사가 추구하는 이념을 듣고 만족했다면 더 이상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이제 뭘 하면 되죠?”

그 물음에 이상백이 대답했다.

“준비를 좀 해 놨다.”

그는 책상으로 가서 색깔 별로 정리된 파일을 챙겨와 이도원 앞에 늘어놓았다.

“현재 네가 들어가기 적합한 조건의 영화, 드라마, 광고를 뽑아봤다. 먼저 네 프로필을 보내고, 드라마나 영화는 오디션을 거쳐야겠지만 한 번 읽어 보거라.”

이도원은 파일들을 하나 씩 면밀히 검토했다. 파일 안에는 제작사와 투자사, 제작진 명단, 시놉시스, 시나리오 등의 자세한 정보들이 들어있었다. 파일을 읽어보던 이도원은 보라색 파일을 가장 먼저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파일 색깔을 확인한 이상백이 빙긋 웃었다. 이도원이 처음 고른 작품은 유태일 감독의 차기작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네가 제대하기 전이라서 유태일 감독에게 말은 못했지만, 아마 네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오디션은 필요 없겠네요.”

“그렇겠지.”

이도원은 계속 보다가 노란색 파일 하나를 더 내려놨다. 신인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한 케이블 드라마였다.

“이건 왜 골랐니?”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이상백 감독이 물었다.

이도원은 그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제작진에 보니까 민영기 조연출이 있어서요. 유태일 감독님을 소개해주신 게 이 분이거든요.”

그는 의리를 중시해 결정했다는 듯이 흉내를 냈다.

물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도원이 고른 <시간아! 돌아와>는 타임 슬립 전 어느 정도 중박을 쳤던 드라마였는데 어느 정도 화제가 됐었다. 대박을 내지 못한 건 일단 케이블에서 방송된 드라마고, 남자 주인공이 발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발 연기를 했던 주연 배우를 제외하고 모든 배우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 각광을 받았다는 것만 봐도 캐릭터들의 매력이 넘치고 스토리가 괜찮았다는 뜻이다. 당시 발 연기로 망쳐놓은 캐릭터는 이도원이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었던 캐릭터이기도 했다.

이상백은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리오는 괜찮으니까,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다.”

이도원은 나머지 파일들을 한데모아 책상에 툭 쳐서 정리한 뒤 구석으로 치우며 물었다.

“영화와 드라마 스케줄을 맞출 수가 있을까요?”

“그건 회사 측에서 고민할 일이지.”

이상백은 빙긋 웃으며 대답하고 이어 물었다.

“계약 사실은 언제쯤 보도할 생각이냐? 네 의견을 묻고 진행하고 싶었는데.”

“저는 상관없습니다. 대표님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이도원은 장난기를 담은 미소를 그렸다.

“다른 기획사에서 놀라자빠지겠군요.”

“상상도 못했겠지. 삼대 기획사를 모두 까고 백 프로덕션으로 들어갔을 줄은.”

“괜찮으시겠어요? 시선이 곱지 않을 텐데.”

“그 정도도 감수하지 못해서야 터줏대감이 자리잡고 있는 이 바닥에서 사업을 할 수 있겠느냐?”

이상백의 말은 옳았다. 열 사람이 모두 좋아할 수는 없다. 열 사람 중 다섯만 좋아해줘도 성공한 것이다. 눈총을 받기가 두렵다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뭘 하면 될까요?”

“네 매니저로 배정된 녀석과 셋이 점심이나 먹자꾸나.”

이상백은 이도원의 매니저로 배정된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뒤편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대표님!

“잠깐 제 방으로 좀 와주세요. 오늘부터 함께 활동할 배우와 점심 같이 할 테니까요.”

두 사람은 매니저로 배정된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내 이십대 초반의 이도원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가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오준식 입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매니저로 배정된 남자가 단번에 이도원을 알아봤다.

“이도원?”

이도원은 시익 웃으며 자신의 휴대폰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곧 오준식의 휴대폰이 울렸다.

“<우리의 심장> 촬영 때 보고 처음이네. 몇 년 만이지?”

이도원의 질문에 오준식이 화색을 띠며 대답했다.

“이야, 군대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고등학교 일학년 때 후로 처음 보는거네.”

연락은 한두 번 했었다.

이도원은 묘한 기분이 사로잡혔다.

‘사람 인연이란 게.’

참 우습고 신기했다.

오준식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는지 설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보던 이상백이 물었다.

“두 사람, 이미 구면인가?”

오준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대표님. 저 고등학교 때 <우리의 심장>에 보출(보조출연) 했었거든요. 그때 봤었죠. 하하!”

이도원이 처음 봤을 때 오준식은 어딘가 울적한 기색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밝아보였다.

“좋아 보이네. 어떻게 된 거예요?”

이도원이 이상백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상백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우리 학교 학생이었지.”

오준식이 덧붙여 설명했다.

“수시 붙고 졸업하자마자 잠깐 프로필 돌리면서 단역 오디션 보러 다녔거든. 그러다 어렵게 대학에 붙었는데, 들어가고 보니까 외부활동 금지라네? 때려 치울 결심 하고, 운전병으로 제대해서 교수님 밑으로 들어갔지.”

“아직은 휴학 중이지만.”

이상백이 강조했다.

“나는 이 친구가 학교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아직 배우의 꿈을 갖고 있고.”

대충 상황파악이 된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군요.”

이상백이 코트를 챙겨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자세한 이야긴 밥 먹으러 가서 하자고.”

*

이상백은 이도원에게 일주일 동안 휴식기간을 주었다. 그 동안 회사 측에서도 활동준비를 마칠 테니 주변정리를 하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이도원이 활동하는 포문은 <시네마24>의 김흥수 기자와 인터뷰를 통해 열기로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

이상백과 오준식, 두 사람과 점심을 먹은 이도원은 바로 유태일 감독을 만나러 떠났다.

‘겸사겸사, 차기작 이야기도 꺼내겠군.’

유태일 감독이 이도원을 찾는 이유는 세 가지로 짐작해 압축할 수 있었다.

전역을 축하한다는 의미, 차기작 섭외 제의, <우리의 심장> 수익에 대해 인센티브 개런티를 주겠다는 것.

인센티브에 대한 부분은 일찍이 차지은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도원은 쓴 웃음을 지었다.

‘휴가 때라도 한 번 찾아뵐 걸 그랬나.’

연기 연습할 시간은 있으면서, 왜 사람 만날 시간은 없었는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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