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49화 (49/178)

049/  텔레스코프(Telescope; 동시대사) (1)

청담동 소재의 고급 오피스텔.

김진우는 어두운 거실의 소파에 기대 있었다. 그의 정면을 TV에서 나오는 색색 불빛이 물들였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개봉한 <우리의 심장>이 큰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주연을 맡았던 신인배우 이도원 씨가 어제 일자로 제대했다고 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연예가 소식>을 보고 있던 김진우의 휴대폰 액정에 푸르스름한 불빛이 들어왔다.

무음으로 돌려놓은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개새끼]라는 이름이 선명히 찍혀있다.

김진우는 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집 앞입니다. 나오시죠. 어르신께서 저녁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알았다.”

전화를 끊은 김진우는 추리닝을 걸치고 나갔다.

오피스텔 앞 대로변에 에쿠스 한 대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 정장을 말끔하게 빼입은 삼십 대 남자가 서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타시죠.”

“똥개 새끼 주제에 나한테 명령하듯 말하지 말랬지?”

김진우는 쏘아붙인 뒤 차에 탑승했다.

잇따라 운전석에 탄 남자가 압구정동의 선술집으로 운전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다 왔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차에서 내린 김진우는 룸식 고급 선술집 앞에 섰다.

그때 따라서 내린 남자가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김진우는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양팔을 펼쳤다.

남자가 옷을 더듬으며 훑어 내렸다. 그는 김진우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압수한 뒤 말했다.

“다 됐습니다. 들어가시죠.”

김진우는 불쾌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선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일 층에 들어서자 기모노를 입은 여성 종업원이 다가와 김진우에게 물었다.

“예약하셨나요?”

“김진우.”

짤막한 대답에도 종업원은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친절하게 김진우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정장을 입은 김봉민 의원이 먼저 와있었다.

“옷 꼬락서니하고는…….”

김진우를 보자마자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한 김봉민 의원은 혀를 차며 고갯짓을 했다.

“거기 앉아라.”

“왜 불렀습니까?”

김진우는 앉지 않고 물었다.

김봉민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나직하게 다시 말했다.

“거기 앉아.”

김진우가 앉자 김봉민 의원은 술을 따라주며 엄포를 놓았다.

“이별주다. 네가 다시 떠나든지, 부자 간의 연을 끊던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한 김진우는 화제를 돌렸다.

“독백대회 때마다 <리어 왕>의 ‘에드먼드’를 연기했습니다. 에드먼드는 누구처럼 서자죠. 당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는데, 끝까지 안 봤나 보군요. 한 번 오셨다는 말은 들었는데 말입니다.”

조용히 대답한 김진우가 술잔을 비우고 물었다.

“이미 답은 정해진 것 아닙니까?”

“난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거다.”

김봉민 의원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덧붙였다.

“부자 간의 정으로.”

“하하하!”

김진우가 쩌렁쩌렁하게 웃은 뒤,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지나가던 개가 웃겠습니다. 어린 아들을 미국으로 추방했던 양반이 아버지라고요?”

“예술 고등학교를 보내주는 조건으로 약속했을 텐데? 졸업만 하면 다시 돌아가겠다고. 비밀을 지키되, 활동을 해도 미국에서 하라고 했다.”

“재방송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잊겠습니까?”

김진우는 비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쩌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주 보수적인 나라죠. 제가 서자인 걸 세상이 알게 되면 당신은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을 겁니다. 공인이란 게 얼마나 좆같은 건데, 너도나도 하겠다고 달려드는지…….”

“건방진 놈.”

김봉민 의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 어미를 닮아서 가진 재주라고는 광대놀음 밖에 없는 놈이, 배우라도 돼서 날 압박해보겠다?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하는 건데 말이야.”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김진우를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의 코트를 챙겼다.

“알량한 재주 한 번 부려봐라. 그 알량한 재주로 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기대되는구나.”

담담하게 말한 김봉민 의원이 방을 나섰다.

콰직!

손에 쥐고 있던 소주잔이 깨졌다.

김진우의 손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개새끼.”

그는 김봉민 의원이 떠난 자리를 노려봤다.

김진우의 의중을 파악한 김봉민 의원은 그의 앞길을 막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김진우 역시 지금껏 원하는 건 모두 가지며 살아왔다. 그건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 뻔뻔한 낯짝이 일그러지게 해주지.’

그 순간을 보기 위해서라면 수단이나 방법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일어난 김진우는 압수당했던 휴대폰을 종업원에게 돌려받고, 선술집을 나섰다. 그는 부재중으로 찍혀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나야. 오늘 파티, 갈게.”

수화기 뒤편에서 시끄러운 클럽 소리가 들려왔다.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은 김진우는 대로변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는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청담동 앤지로 가주세요.”

*

한편 이도원의 전역을 축하해 줄 겸 박서진이 마련한 동창회 자리에 나갔다. 학교 다닐 때 교우관계가 넓은 편이 아니었기에 대부분이 모르는 얼굴이었다.

반면 동창들은 이도원을 보며 반색했다.

“오! 이 배우!”

그중 박서진이 다가와서 이도원을 자리로 안내했다.

박서진이 자랑을 해서 동창들 대부분이 <우리의 심장>을 본 상태였다.

이도원은 새삼 영화가 상업화 됐으며,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망하군.’

동창들은 이도원을 보고 저마다 한 마디 씩 했다.

“이야, 진짜 잘 됐더라!”

“영화 잘 봤어!”

“대박. 내 친구 중에 배우가 있다니!”

일일이 대답할 새도 없이 몰려드는 관심에 이도원은 쓰게 웃음 지었다.

학창시절에는 정작 변변한 인사도 나누지 않았던 동창들이 하나같이 죽마고우라도 된 듯이 친한 척을 해왔다. 이도원은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자리에 어울렸다.

그때 정장을 입은 동창 하나가 이도원의 옆자리로 은근슬쩍 자리를 옮기며 말을 붙였다.

“완전 축하해! 자, 여기 내 명함이야.”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영업 판으로 뛰어들었다고 영웅담을 늘어놓던 친구였다. 그는 생명보험사 명함을 건네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너도 이제 배우로서 사회생활도 시작했으니까 저축도 해야지! 특히 연예인은 수입이 불안정해서 노후대비를 잘 해둬야 해.”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타임 슬립 전에도 이런 친구들이 종종 있었다. 연기를 하다 포기하고 마땅히 취직할 학벌도 없는 동료들은 보험이나 자동차 영업을 전전했다. 그들은 반반한 외모와 유려한 화술을 바탕으로 돈벌이를 했는데, 대부분 체질에 맞지 않아 쪽박을 쳤다. 그 와중 이도원도 수차례 권유를 받아 본 경험이 있었다.

재무설계를 해준답시고 설명하던 동창은 죽었다 깨도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먹잇감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이도원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르잖아? 지금 잘 나가는 배우로 활동할 때 준비를 해둬야 해요. 자, 한 잔 받고!”

이도원은 한 귀로 흘리며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난 미래를 알고 있다. 내가 만약 금융업에 종사했던 사람이었으면 엄청난 떼 부자가 됐겠군.’

안타깝게도 그는 전생에 금융에 대해 무지했다.

“나중에 서연이 통해서 연락 줄게. 잠깐 화장실 좀.”

이도원은 대충 대답하며 자리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갔다.

졸업하고 바로 입대하면서 군 외박 때나 술을 먹었었다. 휴가 땐 대부분 가족들과 보내거나 이상백을 찾아가 연기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여차여차, 몸이 알코르에 적응되지 않은 상태라 술기운이 빨리 올랐다.

소변기 앞에서 정신을 다잡던 이도원의 눈에 벽에 붙은 명언 글귀가 들어왔다.

[자신에게 투자하라 - 펑리위안]

이도원은 잠시 몸이 얼어붙었다. 반대로 두뇌는 빠르게 회전했다.

보험설계사인 동창이 미래를 위해 투자하라고 했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다고. 그런데 이도원은 미래를 알고 있다. 꼭 앞으로의 경제동향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가 가진 지식들이 쓸모가 있을 것이다.

‘난 앞으로 선방할 영화들을 알고 있지.’

문제는 이도원에게는 개인적으로 투자할 자본이 없다는 것.

할리우드는 영화 소액 펀드가 존재하지만, 한국영화는 소액 투자를 받지 않는다.

‘회사를 통해 투자 사업이 가능하다.’

이도원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마침 현재 이상백 교수는 활발한 영화제작 및 투자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도원의 말만 믿고 거금을 투자할 리 없었다.

반대로,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충분히 회사를 키울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계약조건 중 작품 결정권을 보장해주겠다는 내용이 있다. 내가 성공 할 작품을 결정하면 회사는 투자를 하겠지. 그리고 난 벌어들인 개런티로 다시 회사 주식을 매수한다.’

신의 한 수란 말이 꼭 어울렸다.

이도원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맺혔다.

“의리를 저버리고 대형 기획사로 갔으면 큰일 날 뻔했군.”

동창회 자리로 돌아간 이도원은 까먹지 않도록 휴대폰 메모장에 자신의 계획을 적고 동창들과 어울렸다.

다들 취기가 오르고 술과 안주가 동이 나자 슬슬 다음 장소에 대한 의견이 나왔다.

“이다음에 어디 갈까?”

“술도 먹었겠다, 클럽이지!”

“내가 아는 파티팀 형 있어. 엔지 고정 파티팀인데, 게스트로 넣어달라고 할게.”

“뭔 게스트야. 돈 모아서 테이블 잡자.”

“그럴까?”

한참 클럽 이야기가 오갔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이 년도 채 되지 않은 혈기왕성한 동창들과 달리, 이도원은 클럽같이 시끄러운 장소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반대 의견을 펼치지 않고 조용히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거기서 빠지면 되겠군.’

그는 클럽에 도착하면 정신 없는 분위기를 틈 타 은근슬쩍 빠질 참이었다.

거의 결정 나는 분위기에서 대견하게도 박서연이 이도원을 챙겼다.

“얘들아. 도원이는 연예인인데, 좀 불편하지 않을까?”

한편 이미 장소 섭외를 마친 동창들은 합리화를 했다.

“야, 어두워서 더 편해! 안 보이고. 괜히 연예인들이 클럽을 많이 가는 게 아니라니까?”

“도원이 보면 여자애들 다 죽을걸?”

“우리끼리 노는 건데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여자애들은 남자 꼬시고, 남자들은 여자 꼬시면 되지. 갠플해, 갠플.”

이도원은 곤란했다. 관심이 집중되면 자리를 피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동창들에게 말했다.

“난 가서 조금만 놀다 가야 돼. 스케줄이 있어서.”

동창들은 아쉬워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도원은 그중 박서연이 가장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놓치지 않았다.

‘면회 한 번 안 온 계집애가, 간만에 보니까 또 심숭생숭 한가 보네.’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회비를 내고 동창들을 따라 나갔다.

워낙 시끄러운 가운데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박서진이 말을 붙였다.

“몇 시쯤 가야 돼?”

“갔다가 상황 보고.”

이도원은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박서진은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땐 괄괄한 성격이었는데, 숙녀가 다 됐는지 전과 달리 부끄러워했다. 그녀가 달라진 건지 이도원이 달라진 건지, 아니면 둘 다 달라져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이도원은 친근하게 말했다.

“면회 한 번 안 오더라? 연락 좀 해. 의리 없는 계집애야.”

“넌 답장을 한 통도 안 하더라? 편지를 몇 통을 보냈는데…….”

그 말에 이도원은 아차 싶었다. 박서진이 괜히 조심스럽게 굴던 게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미안해. 그래도 내가 친구가 너 밖에 더 있냐? 무튼 오늘은 잘 놀고, 조심히 들어가라. 번호 안 바꿨으니까 연락하고.”

두 사람이 대화할 시간은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동창들이 우르르 몰려나왔고, 이도원과 박서진은 파도에 휩쓸리듯 택시를 탔다.

“앤지로 가~ 주쎄요!”

클럽행을 주도했던 동창이 크게 말했다.

이윽고 동창회 일행은 기본요금 거리인 청담동 소재의 클럽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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