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디졸브(dissolve; 장면전환) (9)
“그리고 두 분께 할 말이 있어요.”
이도원은 웃고 있었지만 심상치 않은 표정이었다. 이도원의 얼굴을 본 어머니와 이다원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설마 갑자기 성격이 변한 게, 어디가 아프다거나…….
뭐, 그런 표정이었다. 이도원은 오해를 풀기 위해 본론을 꺼냈다.
“저, 휴학하고 군대 가려고요.”
“뭐어?”
이다원이 크게 놀랐다.
반면 어머니는 침착한 얼굴로 물었다.
“휴학하겠다는 건 입학한다는 소리니까 기쁜 일이긴 한데… 군대는 너무 이르지 않니?”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가려면 빨리 가는 게 낫다더라고요. 작년에 주민등록증도 나왔고, 이제 군대만 갔다 오면 성인 연기자로 활동하는 데에 아무 지장도 없다는 뜻이죠. 제대해도 스물한 살이에요.”
현명한 판단이었지만 가족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였다. 그렇다고 반대할 명분도 마땅찮았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어차피 한 번은 다녀와야 하는 군대를 조금 일찍 다녀오겠다는 것뿐이었으니까.
“다들 어떻게든 안 가려고 하던데 이걸 대견하다고 해야 할지… 특이하다고 해야 할지…….”
어머니도 티는 안내지만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한편 이다원은 전문용어로 멘탈붕괴였다.
“내 동생이 군인 아저씨가 돼?”
항상 어리게만 봤던 동생이, 그녀 자신도 성인이란 자각이 들기도 전에 군대를 간다니. 군인 ‘아저씨’가 되겠다니! 그 말을 동네 마실 나간다는 사람처럼 하고 있다니…….
두 사람을 보며 이도원은 빙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요새는 편하다고 하더라고요.”
*
2018년 2월 3일 입대.
군번 18-71005217.
이도원은 일반 육군으로 입대해 강원도 인제군에 위치한 12사단 52연대 2대대로 보병부대의 소총수로 갔다.
훈련소를 마친 이도원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 철책선이 둘러진 첩첩산중의 GOP(General OutPost; 일반전초)로 발령을 받았다.
혹한의 날씨와 적막한 근무시간은 이도원에게 소리를 잃었던 전생의 지난날을 되돌아볼 시간을 주었다.
이도원은 매번 마음을 다잡았다.
‘현재에 감사하자.’
근무, 작업, 잠.
초소에 고위간부가 순찰이라도 오는 날이면 미친 듯이 청소를 했다. 또 눈이 오면 보급로가 막히지 않도록 자는 시간도 빼서 제설작전을 나가야만 했다. 이처럼 GOP 초소 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시간도 그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형식상 기본 취침시간과 개인정비시간은 보장됐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보장되지 않는 나날을 보냈다. GOP는 민간인통제구역이기 때문에 친족관계만 면회가 가능했다.
이도원은 그 와중에 잠자는 시간을 쪼개어 헬스장을 갔다. LED를 입에 물고 침낭 안에서 희곡을 읽었다. 이미 한 번 군대를 갔다 온 이도원이었기에 선임들에게 각별한 예쁨을 받으며, 일병 때부터는 침낭 뿐 아니라 근무 중 초소 안에서 틈틈이 희곡을 볼 시간도 생겼다. 이도원의 초소 내 별명은 ‘여우’였다.
상병이 되었을 땐 GOP에서 막 철수해 FEBA(Forward Edge of the Battle Area; 전투지역 전단) 주둔지로 가게 되었다. 초소에서 철수해 FEBA에 내려온 뒤에는 그동안 제한됐던 본격적인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일과시간 이후 개인정비시간도 보장됐기 때문에 헬스도 하고, 희곡도 읽었다. 또한 위병소 근무 때는 후임에게 사주경계를 일임하고 초소 안에서 하늘이 떠나가라 뮤지컬 노래를 부르거나 대사 연습을 했다. 그건 혹한기 훈련을 받으며 행군과 숙영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FEBA로 내려오자 낯선 사람들의 면회가 줄을 이었다. 면회자들은 바로 이도원이 거절한 적 있는 소리굽쇠와 필담의 소속사 실장들이었다.
이도원은 내심 투덜거렸다.
‘군인의 마음을 훔치려면 소속 여배우를 보내야지, 무슨 시커먼 남정네들만 보내?’
반면 레드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이도원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들은 김진준 실장 대신 이도원과 친분이 있는 차지은을 보냈다.
당연히 부대에선 난리가 났다.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면회를 왔는데, 그게 친동생도 아니고 국민 여동생 차지은이라니!
미리부터 이도원은 연기를 하다 왔다고 언급한 바 있었기 때문에 소대원들은 자신도 불러달라고 간청할 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반면 다른 소대원들은 당장이라도 면회 장소로 침투할 기세였다.
‘북한군이 내려와도 이렇게 전투적이진 않을 텐데.’
이도원은 속으로 생각하며 면회 장소로 나갔다.
차지은은 매니저를 통해 중대원들이 모두 먹을 만큼의 치킨을 사 왔는데, 한 박스는 친히 골라서 들고 있었다.
“오빠!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는 활기찼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키도 크고 미모에도 물이 오른 상태였다.
하필 현재 신분이 군인인 이도원은 일순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금 새 바로잡고 시익 웃었다.
“뭘 직접 왔어? 아침부터 후임들의 등쌀에 죽을 뻔했다.”
이도원은 차지은에게 의자를 빼주고 맞은편에 앉았다.
“많이 컸네.”
그 말에 차지은이 깔깔대고 웃었다.
“오빤 완전 빡빡이네요?”
“버릇없는 건 여전하고.”
이도원은 치킨을 세팅했다.
그의 얼굴을 이모저모 뜯어보던 차지은이 말했다.
“그래도 잘생겼어요, 오빤.”
이도원이 헛기침을 하며 나무랐다.
“끼 부리지 마. 그나저나 요새 밖은 어때?”
“폭풍전야죠.”
차지은이 시익 웃었다.
“오빤 어떻게 알고 군대로 도망친 거예요? 우리 대표님이 지금이라도 오빠 잡아야 한다고 성화에요. 우리 영화가 곧 개봉하거든요.”
“<우리의 심장>?”
“네. 유태일 감독님이 이번 영화 성과에 따라, 계약상에 없던 인센티브 개런티도 주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공돈 생기겠네. ”
이도원은 화제를 돌렸다.
“그렇잖아도 TV로 네 얼굴 많이 봤었는데. 영화 개봉하면 개런티가 더 뛰겠다.”
이도원은 남 일인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그때 차지은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슬슬 개봉 소식이 방송으로도 나갈걸요? 오빠는 기대되지 않아요?”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나야 뭐 무명인데, 별일 있겠어?”
“지금 소속사들 모두 뒤늦게 오빠 잡으려고 난리에요. 오빠 군대 가고 나서 잊고 있다가 발에 불똥 떨어진 거죠. 지금 계약하면 예전에 비해 수십 배는 조건이 좋아졌을 걸요?”
차지은은 자신의 일처럼 흥분했다.
피식 웃은 이도원이 고개를 저었다.
“이거 비밀인데… 나, 이미 소속사 있어.”
“이게 무슨 대국민 사기극 같은 소리에요?”
“이상백 교수님이라고 내 연기 스승님이 이번에 창업을 하셨거든. 아직 특별한 활동은 안 하고, 영화 투자만 하고 계시지만.”
“백 프로덕션요?”
차지은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손뼉을 치며 이도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이상백 사장님과 사제관계라고요?”
“백 프로덕션은 또 어떻게 알고 있어?”
“제작하는 영화마다 성적이 좋거든요. 우리 대표님 말씀하시는 걸 옆에서 들었죠, 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백은 자랑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도원에게 조차 사업에 대한 말을 아꼈다. 그래서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만일 자랑하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면 여러 소속사들을 누르고 이도원을 스카우트 했다고 떠벌렸을 터였다.
‘이제 나만 나가면 되겠군.’
이도원은 내심 생각하며 차지은에게 말했다.
“아무튼 좋아 보이니 다행이다.”
“오빠도 좋아 보여요. 오빠 같은 군인들이 있어서 저 같은 고등학생들이 발 뻗고 자는 거 맞죠? 그나저나, 제가 오빠가 말한 비밀을 대표님한테 누설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오빠 데려오라고 저를 보낸 건데.”
차지은의 질문에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 말라고 하면,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소리까지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꼭 비밀로 해야 되는 말이면 차지은에게도 함구했을 것이다.
“레드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님한테 전해달라고 너한테 말 한 거야. 필담이랑 소리굽쇠에서 온 사람들한테도 이미 계약한 곳이 있다고 해서 보냈고. 물론 그곳이 백 프로덕션인지 말하진 않았지만.”
“그러면 기획사들 끼리 서로 오해해요. 선수 뺏겼다고.”
“헛걸음하게 만드는 건 예의도 아닐 뿐더러, 시달리기 싫어서 얘기한 거야. 그래도 내가 소속된 곳이 백 프로덕션이라는 건 당분간 비밀로 해줬으면 하는데.”
이도원이 눈을 빛냈다. 어차피 곧 알려질 일이고, 지금 와서 알려져도 별 문제는 없을 테지만 기왕이면 깜짝 등장하는 쇼맨십을 보이고 싶었다.
한편 그의 눈빛에 잠시 넋을 놓았던 차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웃었다.
“오빤 머리 짧은 게 낫네요.”
*
병장이 된 어느 날, 마침내 이도원이 애타게 기다리던 파도가 밀려왔다.
“TV에 이도원 병장님이 나옵니다!”
예전에 영화잡지 <시네마 24>에 실렸던 이도원의 인터뷰 내용이 방송되면서, 이도원은 군 생활 21개월 중 20개월을 채우고 말년에 연예병사로 전출을 갔다. 유태일 감독의 <우리의 심장>이 대박 나며 이도원이 재조명 받은 결과였다.
말년을 순조롭게 보낸 이도원은 사회로 돌아왔다. 영화 자체는 스타덤에 올랐지만 아직 이도원은 촉망받는 신인, 그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따로 팬덤이 형성되거나 하진 않았다.
전역모에 개구리 오바로크를 달고 사회 공기를 맡으니 휴가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이제 다음 주 방영되는 드라마를 부대 안에서 안 봐도 돼.’
22개월 간 대부분의 시간을 강원도 산골에서 부대 안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선뜻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도원이 집에 도착했을 땐 누나 이다원이 노트북을 켜고 과제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에 휴가 나왔다 들어가더니, 벌써 전역이야?”
그녀는 마치 어제 본 동생에게 인사를 건네듯 물었다.
이도원은 야속한 기분이 들었지만 제대를 했다는 기쁨이 더 컸다.
군 생활 자체는 타임 슬립 전 한 번 해보았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군부대 안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는 건 큰 고통이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새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이도원은 설렘으로 부풀어 오른 가슴으로 매정한 누나 이다원을 이해하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동생이 제대했는데 눈길 좀 줘봐.”
그는 이다원의 옆에 앉아서 팔을 쿡쿡 찔렀다.
전같으면 신경질을 냈을 이다원이 피식 웃었다.
“너 좀 유명해졌더라? 어렸을 때 너 봤던 친구들이 연락 오더라고.”
그녀의 말에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시치미를 뗐다.
“난 잘 모르겠는데. 군대에만 박혀있었더니.”
“잘생겼다고, 소개해 달라고 난리야. 눈이 어디 달렸는지…….”
“그래도 동생이 밖에 나가면 한 인기 합니다.”
이도원은 자신 있게 말하며 웃었다.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실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군대에 있을 때조차 박서진과 박아현의 편지를 수십 통 받았다.
가끔 차수희의 편지도 왔다.
‘정작 차지은의 편지는 한 통도 없었지만.’
이도원은 입맛을 다셨다.
직접 면회를 온 건 차지은뿐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편지를 쓰거나 하진 않았다. 아마 바쁜 스케줄로 바빴을 터였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이다원이 놀렸다.
“아저씨 냄새나! 그 군복부터 좀 벗고 오시죠. 내 대학 동기들도 이제 막 군대를 가는데, 어린 내 동생은 뭐가 좋다고 몇 년 빨리 아저씨가 됐는지.”
그녀는 고개를 젓더니 물었다.
“이제 앞으로 뭘 하려고?”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대답했다.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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