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디졸브(dissolve; 장면전환) (8)
이도원은 인터넷으로 입시원서를 접수했다.
휴대폰 문자로 시험일정과 수험번호가 발표되었다.
첫 시험은 중영대학교. 연출, 연기 모두 최고를 달리고 있는 명문으로 유태일 감독이 졸업한 학교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입시생들이 몰려들었다. 올해 중영대학교 연기과 경쟁률은 253 대 1.
경쟁률로만 따지면 의대나 사범대를 상회하는 경쟁률이었다.
‘거품이 많긴 하지만.’
생각한 이도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연기는 딱히 기준이 되는 조건이 없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기적을 바라고 상위권 대학에 지원한다. 비록 중영대학교 입시전형에는 성적을 반영한다고 나와 있었지만 여느 연기과가 그렇듯 실질적인 비중은 실기가 차지했다.
이러한 실기시험은 지원자가 많기 때문에 오후, 오전으로 시험 조를 나누어 진행된다. 이런 방식으로 며칠에 걸쳐 학생을 뽑았다.
이도원은 마지막 삼 일 째 오전 조로 걸렸다. 만일 오후 조였다면 오후에 잡힌 동인대학교 시험과 둘 중 한 곳을 선택을 해야 할 뻔 했다.
‘시험이 겹쳤으면 원서 값도 날렸을 테고.’
이도원은 정문부터 걷던 걸음을 멈췄다.
마침내 도착한 중영대학교 공원예술원.
<우리의 심장> 대본 리딩 때 와 본 곳이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학교 건물 앞은 이른 아침부터 수험생들로 바글바글했다. 이도원을 비롯한 지원자들 모두가 검은색 재즈 바지와 검은색 티를 입고 있었는데, 시험 볼 때 요구되는 의상이었다. 모형 칼이나 부채를 들고 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지원자도 있고, 혹시나 잊어버릴 새라 대사를 중얼거리거나, 끊임없이 물을 마셔대며 목을 푸는 지원자들까지 다양했지만 모두가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만은 똑같았다.
‘평소 하던대로.’
오직 이도원만은 편안한 얼굴로 화술을 점검했다.
건물 앞 공터에서 연습하던 지원자들은 재학 학생들에게 안내를 받아 빈 강의실에 모였다. 강의실의 화이트보드에는 간단한 주의사항이 써져있었다.
[실제 총기나 도검류는 사용불가 합니다. 지정연기를 제외한 특기는 연기 외의 것으로 준비해 주세요. 검은색 상하의를 입어주세요. 실기장에 입장하면 대답이나 지시를 기다리지 말고 준비한 연기와 특기를 보여주시면 됩니다.]
이윽고 학교 측 지정 대사가 나왔다. 지정 대사를 확인한 지원자들의 얼굴에는 희비가 엇갈렸다.
이도원도 프린트지의 지정 대사를 슥 훑었다. 그 결과 중영대학교에서 입시생이라면 한두 번쯤 연습해봤을 유명 희곡만 내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희곡 독백을 내줘서 운에 기대는 시험을 보기 보단, 누구나 알고 있는 희곡 독백으로 실력을 평가하겠다는 취지였다.
세 가지 독백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스탠리’, <갈매기>의 ‘뜨리고린, <햄릿>의 ’햄릿‘ 대사였다. 이중 하나를 선택해 시험을 보면 되는 것이다.
시끌벅적하게 연습하던 지원자들은 수험번호 순으로 열 명 씩 시험을 보러 나갔다. 시험의 모든 과정은 재학생이 진행했다. 마침내 조용히 대본을 읽던 이도원의 차례가 왔고, 지원자 아홉 명과 함께 대기실로부터 시험장까지 재학생의 뒤를 따라갔다.
‘떨리는군.’
기분 좋은 흥분을 느낀 이도원의 입가에 미소가 매달렸다. 지원자들이 복도에 나란히 앉고, 입구와 출구가 양쪽 끝에 하나씩 있었다. 입출구에는 재학생이 한 명 씩 위치해 있었는데 개중 출구에 있던 재학생이 시험 방식을 말했다.
“이쪽 입구로 들어가셔서 저쪽 출구로 나오시면 됩니다.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셔서, 수험번호를 말하고 연기를 시작하시면 돼요. 연기가 끝나면 인사하고 나와서 신발을 신고 집으로 가시면 됩니다. 모두들 건투를 빕니다.”
간단한 설명을 끝으로 한 사람씩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이도원의 순서가 왔다. 이도원은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보았을 땐 몰랐는데, 시험장 안은 캄캄하고 널찍했다. 높은 천장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들어와 있었다. 무대와 객석만큼 떨어진 거리의 교수 석에는 세 명의 교수들이 앉아있었다. 독백대회 때와 흡사한 풍경이 펼쳐지자 긴장감이 최고조로 치달렸다.
이윽고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61번 수험생 이도원입니다.”
교수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작하겠습니다.”
이도원이 잠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리고 그대로 대사를 시작했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한 점의 떨림도 없는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그 한 마디에 딴 곳을 보고 있던 교수도,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교수도 이도원에게 집중했다.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참는 것이 장한 일인가, 아니면 무기를 들고 노도처럼 밀려드는 고난에 맞서 싸우는 것이 장한 일인가?”
이도원이 천천히 눈을 떴다.
사이를 두고, 그의 호흡이 교수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죽는다는 것은 잠드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이도원은 교수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집중했다.
“만일 잠드는 것으로 육체가 상속받은 마음의 고통과 수많은 수련을 끝낼 수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누구나 열렬히 바라는 삶의 청산일 것이다.”
독백에 몰입한 진지한 태도에 공기의 중량이 늘어났다.
무거운 기압이 교수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 장엄한 분위기야 말로 고전극이 가진 힘이다. 알아듣기 힘들게 꼬아놓은 대사를 느낌만으로 전달하는 것, 움직임이나 화술만으로 관객들을 휘어잡는 것.
“죽는 일은 잠드는 일… 그럼 꿈도 꾸겠지.”
이도원이 한숨 섞인 음성을 뱉었다.
나직하지만 강렬한 목소리였다.
“아, 이것이 문제다!”
그는 말을 이었다.
“대저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잠을 잘 때, 어떤 꿈을 꾸게 될 것인가가, 우리를 주저하게 만들고 재앙의 긴 삶을 살아가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참을 손가.”
이도원의 시선이 또렷하게 초점을 잡았다.
큰 눈을 찌푸리며 대사를 씹어뱉었다.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 억압자의 부정, 오만한 자의 무례함, 버림받은 사랑의 아픔, 재판의 지연, 관리들의 거만함, 유덕자가 천한 자들로부터 받는 모욕을!”
완벽히 정제된 호흡과 발성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울려 퍼질 만큼 큰 목소리가 아님에도 고막에 벼락처럼 꽂혔다.
“단 하나의 단도로 자신을 청산할 수 있을진대, 누가 지친 삶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땀범벅이 되어 신음하려 하겠는가?”
이도원은 우수에 젖은 눈동자를 빛내며 또박또박 말했다.
“사후의 한 가닥 불안과 한 번 가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우리의 의지를 흐리게 하고, 그 미지의 세계로 날아가느니 차라리 이 세상의 번뇌를 짊어지게 만드는구나. 그리하여 사리분별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고, 불타던 우리의 결단력은 사색의 창백한 병색이 드리워져 의기충천하던 의지도 옆길로 빗나가 실행의 힘을 잃고 만다.”
교수들은 이도원의 표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도원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독백하고 있었지만 모두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 이도원이 손바닥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은 천장을 향해 있었다.
부서질 듯 한 태양을 바라보는 간절함을 담아, 이도원이 마지막 대사를 읊었다.
“이 아름다운 오필리어 숲의 여신아. 기도 중이거든, 내 죄의 용서도 함께 빌어주오.”
교수들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도원의 손끝이 향한 허공을 바라보기도, 이도원 자체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도원은 다음으로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Why God Why'를 불렀다. 연기가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노래의 음색이 완전히 지워질 때까지도 교수들은 이도원이 지정대사로 보여준 ‘햄릿’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침내 세 명의 교수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현역인가?”
워낙 재수생도 많고 성인 연기자들도 지원하기 때문에 고등학교 삼 학년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이도원은 손을 내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질문에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교수가 다시 물었다.
“인문계? 예체능계?”
“인문계입니다.”
더 물어볼 것처럼 입을 열었던 교수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다만 펜을 내려놓더니 빙긋 웃었다.
“꼭 우리 학교로 왔으면 좋겠군.”
이도원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끝으로, 이도원은 시험장을 나왔다.
출구의 학생에게 신발을 돌려받고 학교 건물을 나갔다.
시험이 끝난 지원자들은 몇 명 씩 무리 짓고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너 뭐 물어봤어?”
“이 독백은 왜 선택했냐고.”
“나도. 이유가 뭐냐고 묻던데?”
“난 중대공연 뭐 뭐 봤냐고 물어보더라.”
반면 이도원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합격이군.’
연기가 끝났을 때 직감했지만, 교수가 이도원을 탐냈을 때 확신했다.
대부분 지원자들은 질문을 많이 받을수록 안심한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질문을 받은 지원자가 합격할 확률이 높았다. 재수생들은 좀 다르지만 많은 지원자들이 질문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한다. 하지만 이도원의 목표는 시작부터 달랐다.
“이제 두 곳 남았나.”
오늘 오후에 있는 동인대학교 시험과 내일모레 있을 한국예술대학교 시험, 일주일 뒤의 한일대학교 시험. 네 곳 모두 합격한다. 그것이 이도원이 원하는 목표였다.
사실 모든 곳에 합격을 하든 한두 곳 떨어지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다만 전생과 흐름이 바뀌어서 유태일 감독 작품 <우리의 시간>이 개봉되지 못한다면 학교를 다녀야만 카메라 앞이나 무대 위로 오르기 유리할 것이다. 이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이도원은 전생에 다녔던 동인대학교와 정반대 성향의 커리큘럼을 가진 중영대학교에 입학할 생각이었다.
‘바로 휴학 신청을 하고 군대로 간다.’
상황이 뜻대로 돌아간다면 성실한 학교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중퇴를 하게 되지 않을까?
눈을 빛낸 이도원은 중영대 교문을 나섰다.
*
중영대학교, 동인대학교, 한일대학교, 한국예술대학교.
연기과가 있는 대학 중에서 알아주는 현역 배우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교들이다. 또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명문대학교들이기도 했다.
이도원은 자신이 지원한 네 곳 대학교 입시시험에서 교수들을 놀래켰다. 그리고 마치 약속된 일처럼, 모든 학교에서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그는 마침내 사이트에 접속해 어머니에게 수험 결과를 보여주었다.
“정말로 합격했구나.”
어머니는 얼굴이 빨개져서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건만 이도원은 보란 듯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것이다. 자랑스럽고 뿌듯한 마음을 이루 다할 수 없었다. 그녀를 더욱 기쁘게 만드는 한 가지 소식이 더 있다면, 작년 이다원 역시 한국대학교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기에 이런 복을 누리누?”
어머니는 비싼 한우를 잔뜩 사 와서 잔치를 열었다. 잔치의 구성원은 어머니와 이다원, 이도원. 세 식구였다.
이다원은 작년부터 이미 날카롭고 까칠한 누나가 아니었다. 이도원이 일 학년 때만 하더라도 예비 입시로 지친 열여덟 살의 사춘기 소녀였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도원을 대했다.
“자, 축하 선물!”
이다원이 집에 오는 길에 사온 청바지를 내밀었다.
‘이래서 사람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해.’
이도원은 이상백이 낚시터에서 해주었던 조언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든 말든, 이다원은 신이 난 기분을 마음껏 표출했다.
“친구들이랑 점심 먹고 오던 길에 예쁜 청바지가 있더라고. 우리 동생이야 뭐, 걸치면 마네킹이니까!”
어머니도 이도원의 선물을 개봉했다. 연기 연습을 할 때 필요한 녹음기와 수첩이었다.
“연기 더 열심히 하라고, 좀 사 왔다.”
“이건 제가 사도되는데요. 작년 누나 대학 붙고 받았던 선물이랑 너무 비교가 되는데.”
이도원은 슬쩍 투덜거렸다. 속마음은 더 할 나위 없이 기뻤지만 장난을 친 것이다.
그때 누나 이다원이 이도원의 선물을 살펴보며 나무랐다.
“네가 얼마나 엄마 안 챙기고 연기만 했으면, 선물도 연기할 때 필요한 물건이야? 그러게 잘 좀 하지. 쯔쯧쯧.”
피식 웃은 이도원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잘 쓸게요.”
그는 이제 중대발표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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