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디졸브 (dissolve; 장면전환) (7)
‘인생은 타이밍.’
이도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돌아가는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내 배우 인생은 이제 시작됐어.’
소리굽쇠와 필담과도 미팅을 했지만 즉석에서 이도원의 조건을 수락하는 곳은 없었다. 두 곳의 담당자 모두 한 차례 대화를 나눈 뒤 회사로 들어갔다.
이도원은 다시 이상백을 찾아갔다.
“입시 준비는 잘 되어가냐?”
어머니를 직접 만나 반응을 보았던 이상백이 물었다.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평소대로 하고 있죠. 그래도 뜻밖의 수확이 있었습니다. 입시만 통과하면 중퇴를 하든, 현장으로 가든 인정해주시기로 했으니까요.”
“그것참 반가운 소식이로군.”
이상백은 턱을 괴고 잘 벼른 칼날처럼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우리 제자가 오늘 날 찾아온 용건은 수업이 아닌 것 같은데.”
“역시 표정만 봐도 알아차리시네요.”
이도원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교수님, 소속사 겸 제작사를 창립하신다고 하셨죠?”
“그랬지.”
“저를 일 호 배우로 받아주세요.”
그 말을 들은 이상백은 흥미로운 표정을 그렸다.
“왜? 좋은 조건으로 제안이 여러 차례 들어왔을 텐데. 너도 알겠지만 나는 네게 찾아왔던 회사들처럼 근사한 등용문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괜찮습니다. 세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요.”
이상백이 무릎을 탁 쳤다.
“그 세 가지 조건 때문에 다른 곳들과 불협화음을 냈겠군?”
“예. 성형, 작품, 출연 결정권을 요구했습니다.”
“거절할만하군.”
고개를 끄덕인 이상백이 시익 웃으며 덧붙였다.
“난 아니지만.”
“그래서 교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실은 부탁드릴 게 하나 더 있지만요.”
“무섭구나. 그래도 한 번 말해봐라. 들어나 보자.”
“입시시험 통과하는 대로 군대를 갔다 올 생각입니다.”
“왜? 활동하긴 지금이 가장 좋아. 군대 갔다 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될 수도 있다.”
이도원은 내심 웃었다.
그는 앞으로 이십 년 동안의 미래를 대충 알고 있었다. 모든 부분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전생에 배우로서 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영화판 돌아가는 추세 정도는 미리 예측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앞으로 2,3년 안에 유태일 감독의 영화 <우리의 심장>은 상업화된다. 영화가 일반 대중에게 화제가 되면서 이도원 역시 다시 각광을 받게 될 터였다.
구구절절 이야기할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이도원은 아리송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군대에 갔다 온 뒤로 활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괜히 한참 활동할 때 군대가 걸리면 아쉬우니까요.”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썩 좋은 판단이라고 지지해 줄 수도 없겠다. 나중 가봐야 지금의 선택이 묘수였는지, 악수였는지 알 수 있겠어.”
“이 두 가지 조건만 승낙해주시면 계약서는 작성해 두고, 군 제대 후 공표하는 걸로 하시죠.”
“널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이가 무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말하는 것도 도무지 열일곱 살짜리 애 같지가 않고.”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당돌한 대답을 들은 이상백이 빙긋 웃었다.
“사무실은 구했으니 계약은 사업자 신고한 뒤, 사무실에서 하기로 하자. 구색은 갖춰야지.”
“알겠습니다.”
대답한 이도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 소속사들의 제의를 거절하면 업계에서 안 좋은 이미지로 찍히겠지. 지금 당장 활동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이상백 교수님의 회사에도 피해가 갈 수 있다. 하지만 군대에 있는 사이, 소속사들은 건방진 아역배우 하나를 대수롭지 않게 잊어갈 거야.’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이도원은 생각을 마무리 지었다.
‘내가 다시 나타났을 땐, 이미 <우리의 심장>이 개봉한 뒤다. 더 이상 어디서도 날 하찮은 신인 아역배우로 볼 수 없게 될 거야. 대중의 관심을 등에 업고, 개선장군처럼 교수님 소속사로 들어간다.’
*
19개월 후.
고등학교 1학년 막바지에서 고3이 되는 동안 이도원의 시간은 바람같이 흘러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에게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먼저 연기력 면에서 어느 정도 스스로 만족할 만큼 발전을 이루었다. 기술적인 면모와 감정적인 면모가 안정적인 밸런스를 이루게 되었고, 수많은 희곡들을 보고 뮤지컬 노래 연습을 했다. 최근에는 간간이 철학과 심리학도 공부하고 있었다.
‘배우는 많이 알아야 한다.’
아는 만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이도원의 생각이었다. 타임 슬립 하기 전, 지난 삶에서는 연기적인 부분만 공부하기에도 바빴다. 하지만 이제 그는 한 층 여유롭고 새로운 각도로 연기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이도원은 한국예술대학교, 중영대학교, 동인대학교, 한일대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어머니는 네 곳 중 한 곳만 합격해도 이도원의 결단을 존중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네 곳을 모두 지원한 것이다. <우리의 심장> 출연료로 지불한 원서 값만도 만만치 않았다.
‘기왕 하려면 제대로 한다. 굳이 대학을 가지 않더라도 나중에 쓸모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도록.’
어차피 같은 실력으로 네 곳의 시험을 치르게 될 터였다. 모두 합격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분명 나중에 화젯거리가 될 것이다.
“학교만 날 선택하란 법 있어? 내가 학교를 골라가야지.”
이도원은 시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간이연습실로 삼았던 공사장 부지의 컨테이너 박스.
이도원은 입시연기 외에도 특기로 노래를 선택했다. 가장 많은 입시생이 선택하는 특기였다.
이도원이 선택한 곡은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Why God Why'였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패배로 인해 철수하게 된 미군 장교 크리스. 그는 사이공을 떠나기 전, 운명의 장난처럼 전쟁에 의해 부모를 잃고 창녀로 팔려갈 수밖에 없었던 킴과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달빛 어린 도시를 볼 수 있는 작은방으로 킴을 데려간다. 그녀가 잠들자 방을 나온 크리스는 길거리를 거닐며 구슬프게 노래한다.
신은 왜?
왜 그녀를 만나게 했으며, 또 바로 떠나게끔 할까?
‘원곡이 훨씬 더 좋다.’
이도원은 원어 그대로 'Why God Why'를 부를 참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중저음. 목소리에 적합한 곡을 고르라면 뮤지컬 <이순신>의 ‘나를 태워라’ 같은 작품이 최선이겠지만.
‘가사가 너무 좋잖아!’
이도원은 이 노래의 가사가 가슴에 꽂혔다. 미성으로 소화했을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노래였다. 늘 무대에서 해보고 싶은 곡이었지만 목소리에 맞지 않아 놓쳤던 작품과 역할이기도 했다. 대학 때 기회를 얻지 못했고, 그 뒤에는 사고가 나서 영영 부를 수 없었다. 그런데 비로소 입시 무대에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도원의 입이 슬며시 열렸다.
“Why does Saigon-, naver sleep at night?(왜 사이공은 밤에 잠들지 않는 걸까요?)"
눈앞에 도시의 환한 밤 풍경이 펼쳐져 있고, 후덥지근한 기후, 풀냄새가 섞인 바람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는 느낌이었다. 이도원은 눈을 감고 사랑하는 여자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체향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Why does this smell of orange tree?(왜 이 소녀는 오렌지나무 향이 나는 걸까요?)"
머릿속에서 불현 듯 차지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에게서는 항상 은은한 오렌지 향이 났다. 감정에 빠져든 이도원은 왜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생각할 새도 없이 노래를 이어나갔다.
“How can I feel good when nothing's right? Why is she cool when there is no breeze?(비겁한 상황에서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요? 바람 한 점 없는데, 왜 그녀는 달콤한 바람 같을까요?)”
이도원은 자조적으로 끝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음색이 잔잔하고 애절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Vietnam-.(베트남)”
그는 자신이 선 땅을 불렀다.
“You don't give answers, do you fiend?(너는 대답이 없구나. 네 친구는 답을 줄까?)
이도원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듯 노랫말을 뱉었다.
“Just questions that don't eveer end-.(한없는 질문만 있을 뿐-.)”
그 목소리가 고음으로 치달았다. 하늘에 들릴 듯 쭉 뻗어갔다.
“Why God? Why today?(신이시여, 왜? 왜 지금입니까?)"
이도원은 고개를 숙이며 가로저었다.
“I'm all through here, on my way. There's nothing left here that I'll miss.(되돌아가는 길, 나는 줄곧 이곳에 있어요. 아무 미련 없이.)”
그는 다시 하늘을 향해 끝없는 질문을 던졌다.
“Why send me now a night like this? Who is the girl in this rusty bed?(왜 이런 밤에 나를 보낸 건가요? 이 낡은 침대의 소녀는 누구인가요?)”
절절한 물음이었다.
노래가 계속될수록 이도원은 빠져들었다. 가사의 내용과 진행에 따라 감정은 끊어질 듯 아련해지기도, 과격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클라이맥스.
"Why god? Why this face?(신이시여, 왜인가요? 왜 이런 표정이죠?)“
이도원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Why such beauty in this place? I liked my memories as they were. But now I'lll leave remenb'ring her. just her-.(왜 이런 곳에, 이러한 아름다움이라니? 나의 추억은 소중했지만. 이제 그녀에 대한 기억에서 떠나려고 해요. 바로 그녀로부터-)"
음성이 뚝 끊겼을 땐, 심장이 욱신거렸다.
마음속에서 감정이 솟아올랐다. 뮤지컬 곡이 가요와 다른 점은 잘 부른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몸짓연기와 표정연기가 필요하다. 일반적인 연기가 화술과 움직임의 순환이라면, 뮤지컬은 노래와 움직임의 순환이라고 할 수 있다.
“하.”
이도원은 빙긋 웃었다. 썩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미스 사이공>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준비 끝. 내일부터 시작될 입시가 끝나면…….’
<미스 사이공>에서 크리스가 베트남을 떠났듯, 이도원 역시 당분간 군대로 떠나게 될 것이다.
이도원은 미련을 삼키며 기대감에 젖었다.
‘맹수가 사냥감을 사냥하기 위해 숨죽이듯, 기다리자. 내 미래를 위해.’
이미 한 차례 군대를 갔다 와본 그였다. 아무리 미래를 위해서라지만, 말하자면 재입대의 결심이 쉬울 리 없었다. 군 제대를 한 남자가 꼭 한 번 꾼다는 악몽이 재입대의 꿈이다. 한 번은 모르고 다녀오지만 다시 이등병부터 군 생활을 반복해야 한다는 건 그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차라리 기억이 사라지면 모를까-.
“가고 나서 생각하면 돼.”
이도원은 중얼거리며 짝 소리 나게 뺨을 때렸다. 눈 딱 감고 입대만 하면 나머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어차피 한 번 들어가면 때가 될 때까지 되돌아 나오지 못하는 곳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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