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45화 (45/178)

045/  디졸브 (dissolve; 장면전환) (6)

이도원은 이상백과 저녁식사를 하고 온 날 어머니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상백에게서 받은 명함은 큰 효과를 냈다. 연기를 하는 이도원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대학교 연기과 학과장의 진로상담 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조언이 있을까? 마침 다음 날이 주말이었기에 만남은 생각보다 쉽게 진행됐고, 어머니와 이상백은 집 앞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후 2시 50분.

이도원은 사고를 쳐서 학교에 부모님을 모시는 것처럼 괜히 긴장이 되었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한결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이상백을 기다렸다. 그리고 약속시간 5분 전, 마침내 이상백이 도착했다. 그는 청바지와 티 위에 골덴자켓을 걸친 편안한 복장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도원이의 연기지도를 맡게 된 이상백이라고 합니다.”

“도원이 엄마예요. 교수님 이야긴 도원이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제 욕을 많이 했을 텐데요?”

가벼운 농담으로 딱딱한 분위기를 해소시킨 그가 앉으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제가 어머님을 좀 뵙고자 한 이유는 도원이의 장래 문제 때문입니다.”

“예, 교수님. 말씀하세요.”

“제가 사견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어머님께서는 도원이가 어떤 방향으로 진로를 잡길 원하시나요?”

“저는 대학을 가길 원해요.”

어머니가 생각을 정리하더니 덧붙였다.

“학력사회고, 그건 연기자들의 세계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더구나 배우는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직업이 아니죠. 언제 은퇴하거나 그만 두게 될 지도 모르고요. 나중에 예술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하려 해도, 대학은 졸업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결론만 말씀드리면 대한민국 예술계가 눈 뜬 장님이 아닌 이상 아드님은 좋은 대우를 받게 될 겁니다. 그건 십 년의 세월 동안 이쪽 분야에서 학생들을 지도해왔고, 아드님도 직접 지도해 본 제가 누구보다 잘 알죠.”

이상백은 처음부터 승부수를 꺼내들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아드님이 영화촬영을 한 건 알고 계시죠?”

“예. 그럼요.”

“그 영화의 감독도 영화계에서 촉망받는 신인입니다. 유태일 감독이라고, 인터넷만 봐도 아실 수 있죠.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수상했습니다.”

“예. 도원이에게 어느 정도 듣긴 했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독립영화라고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수상을 하면 차기작에 투자자들을 구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인감독은 탑 배우를 쓸 여력이 안 되기 때문에, 함께 작업해 본 배우들 중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와 차기작을 같이 하죠. 제가 봤을 때 아드님은 머지않아 유태일 감독의 차기작에 참여하게 될 겁니다. 더구나 벌써부터 소속사들의 러브콜이 들어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대로 가면, 앞으로 펼쳐질 바쁜 생활을 학업과 병행하긴 쉽지 않겠지요.”

“일리는 있지만 감독님이나 소속사들이 당장 관심을 주고 있다고 해서 자신의 운명을 타인에게 매달려 가는 건 아닌 것 같네요, 교수님. 게다가 소속사가 있는 배우들 중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 배우들도 많은 걸로 알고 있어요. 만약 그렇게 되면 연기로 성공하기 위해 자존심도 내던지게 되겠죠? 저는 도원이가 미래를 결정하기에는 아직 어리고, 대학을 가서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얻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이라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 뒤로도 한참 줄다리기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이상백은 포기하지 않고 어머니를 설득하고자 했다.

이윽고, 어머니가 선을 그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더 이상 말씀하시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네요.”

이상백은 입을 열었지만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대화에 대해서도 한 번쯤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백은 이도원을 보며 살짝 웃더니 일어났다.

그에게 악수를 청한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 없이도 지금껏 도원이를 잘 키워왔습니다. 그런 저로서는 교수님께서 도원이의 미래를 자신의 일처럼 걱정해주시는 게 너무나 감사하고요. 꼭 도원이를 위한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어머님이신데, 당연히 최선의 결단을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보다도 훨씬 도원이를 위하는 분이시니까요.”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작별했다.

이도원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힘들군.’

결과야 어찌 됐든 마침내 자리가 끝났다.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도원에게 말했다.

“교수님의 말 몇 마디로 네 의견에 동의해 줄 수는 없구나. 넌 내 아들이잖니. 내가 봤을 때 네 미래를 위해서는,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선 대학을 졸업하는 쪽이 맞다. 넌 아직 어리고 시간은 네 편이야.”

“네, 엄마.”

이도원은 이렇게까지 된 이상 어머니를 거스를 마음은 없었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대학 재학 중이나, 줄업 후에도 기회는 생길 터였다.

그때 어머니가 덧붙여 말했다.

“당장은 널 지지할 수는 없지만, 네가 직접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지금 내 불안을 기대로 채울 수도 있지 않겠니? 네가 어미를 생각한다면 먼저 순위권 대학의 입시시험에 통과하는 모습을 보여주렴.”

뜻밖의 제안에 이도원은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입시 장벽.’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연기과 입시는 백 대 일이 넘는 경쟁률이 몰리기 때문이다. 기삼운칠이란 말이 공공연히 나돌 만큼 연기과 입시는 복불복인 상황이었다. 일부 학교는 외모만 보고 뽑는다지만 순위권 대학인 한예대, 한일대, 중영대, 동인대는 연기나 성적을 보았다.

‘내게는 아직 일 년 반의 시간이 있다.’

이도원은 그 시간 동안 만에 하나의 탈락 가능성도 배제시킬 결심이었다.

*

이도원은 하루하루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화술 연습과 체력단련은 물론 이상백을 찾아가 연기를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았다. 이미 연기력은 손색이 없었기 때문에 작품 해석과 인물 해석에 대한 참신한 생각들을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눈코 뜰 새 없는 생활을 하는 그에게 오늘은 한 가지 일정이 더 추가되었다. 레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연락을 취하고 사람을 보내온 것이다. 명함을 건네며 자신을 실장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이도원에게 말했다.

“<우리의 심장>에서 보여주었던 도원 군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 레드 엔터테인먼트는 도원 군의 미래를 꽃 피어 주기 최적화된 시스템을 가지고 있죠. 그 예로, 도원 군과 함께 참여했던 차지은 양 역시 우리 회사 식구입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쉽게 의사를 결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 순간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제가 원하는 건 간단합니다. 필요에 의한 성형수술, 프로그램 출연, 작품에 관해 선택권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 말에 남자, 김진준 실장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었다.

‘여간 내기가 아니로군.’

연기자를 꿈꾸는 평범한 열일곱 살 소년이라면 대형 기획사인 레드 엔터테인먼트의 제안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결정을 내릴 터였다. 레드 엔터테인먼트는 그만큼 많은 연예인들을 배출했으며 업계에서 잘나가고 있는 회사였다.

김진준 실장은 이도원을 한 번 더 떠보기로 마음먹었다.

“도원 군이 제안한 사항들은 우리 회사뿐 아니라, 어디서도 충족시켜 줄 수 없을 겁니다. 신인배우 한 명을 키우는 데에는 많은 투자비용이 듭니다. 그리고 회사 측에서 과감한 투자를 할수록 도원 군의 미래는 밝아집니다. 우리는 최선의 투자조건을 제안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도원 군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것만이 도원 군을 반드시 성공시키는 길이고, 회사 측에서도 이익을 낼 수 있는 길이죠. 많은 자료와 조사, 경험을 바탕으로 한 회사의 시스템을 이용하는 편이 도원 군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한 식구로서 윈윈하기 위해서랄까요?”

말은 청산유수였다. 하지만 이도원은 쉽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지 않았다.

‘굳이 결정을 서두를 필요 없다. 당분간 시간은 내 편이야.’

생각을 정리한 이도원이 대답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죠.”

김진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잊지 마십시오. 기회를 잡느냐, 놓치느냐는 타이밍 싸움입니다. 그리고 도원 군이 <우리의 심장>에서 호연을 펼친 지금이,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기에는 적기입니다. 전문가들의 관심이 수그러들면 저희도 지금과 같은 제안을 하긴 힘들 테니까요.”

은근한 경고가 섞여있는 내용이었지만, 이도원은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실장님의 말씀은 꼭 잊지 않고 염두에 두죠.”

김진준 실장은 협박으로 결정을 촉구하려다 오히려 자신이 협박을 당한 기분이 되었다.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도원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떠났다.

창문으로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이도원은 보드마카펜을 들어,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에다 써두었던 [레드 엔터테인먼트]라는 글자에 가로줄을 그었다.

*

“뭐? 이도원 스카우트 실패?”

레드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로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맞은편에 앉은 김진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초장부터 성형 거부, 방송 출연 결정권, 시나리오 선택권을 요구하더라고요.”

“저가 잘 나가는 기성 배우야, 뭐야? 풋내기 신인 주제에.”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는지, 객기를 부리던데요. 그 조건이면 3대 기획사는 물론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오히려 그 점을 노리고 데려가는 곳이 있을지도 몰라. 이 업계에서 수십 년 구르면서 터득한 경험이다. 다 잡은 물고기라도 어장 안에 가두기 전에는 안심하지 말라.”

“하긴, 어장 안에 가둬도 데려가는 경우가 있죠.”

김진준 실장의 말을 들은 이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 늦추지 말고 이도원과 접촉하는 회사들 조건 파악 잘 해봐. 그렇잖아도 현재 연기력 되고 스타성 있는 이십 대 라인이 약해서 삼십 대 배우들이 사골국물 우리고 있다. 이도원은 각별히 신경 써서 잡는 편이 낫다.”

“만약 놓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김진준 실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도원은 사장되기 아까운 장래성을 가진 배우였다.

그 질문의 의도를 짐작한 이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미 적에게 넘어갔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언제 적에게 넘어갈지 모르는 핵무기는 폐기하는 편이 낫지. 이쪽 시장은 좁다. 좁은 만큼 경쟁은 과열되고, 내일을 장담할 수 없지. 감정적인 태도는 좋지 않다. 좋은 배우 하나 살리자고 회사의 운명을 시험할 필요는 없어.”

이로빈은 충분히 말 몇 마디로 아무 힘없는 열일곱 소년 배우를 사장시킬 수 있는 거물이었다. 업계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그에게 낙인찍힌다면 이도원은 어느 곳에서도 써주지 않는 신세가 될 것이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김진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굳은 다짐을 말했다.

“이도원은 꼭 우리 쪽 사람으로 만들겠습니다. 배운다고 되는 연기를 하는 친구가 아니니까요.”

그 모습에서 기대 이상의 의욕을 발견한 이로빈이 대답했다.

“아무리 아까운 연기자라도 회사 시스템에 예외를 두진 마. 작은 균열이 견고한 성을 무너트린다. 내 말 뜻 알고 있지? 과욕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뜻이야. 개런티는 무리해서 올려도 좋지만 그 맹랑한 녀석의 요구 조건은 들어줄 수 없다는 걸 명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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