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디졸브 (dissolve; 장면전환) (5)
이도원이 카폐를 나간 뒤, 김흥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 요것 봐라? 스스로 몸값을 올리겠다, 이건데.”
인터뷰에서 느낀 김흥수의 감상은 이도원이 보통 영리한 소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도원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군 입대를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하며, 기사화되길 원치 않는다고 분명하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기사로 쓰진 말고 기획사 쪽에 슬쩍 흘려줘라?”
기획사들은 이도원이 입대를 하기 전에 잡으려고 안달이 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도원이 제안에 응하지 않고 군 입대를 하면 어떻게 될까?
‘그러다 다 잡은 기회를 날려먹으면 어쩌려고 그러지? 너무 튕기면 달아나 버리는 법인데. 단순한 객기인가…….’
그때였다. 김흥수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먼저 들어갔던 고건수였다.
“선배님! 대박사건입니다.”
“뭔데?”
“오늘 일자로 유태일 감독 작품이 상업영화로 계약됐답니다. 아직 정확한 정보는 없고, 최고 투자자가 차관우 회장이라고 하더군요.”
“기업인이 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사회부 애들 얘기 들어보니까 원래 영화에 관심이 많았답니다.”
“공식 라인으로 들어온 정보야?”
“비공식입니다. 제 사촌이 차관우 회장 밑에서 일하거든요. 키스톤월드 한국지사 과장입니다.”
김흥수는 입술을 매만지며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배급이랑 투자사 정보 더 들어오면 터트리자. 괜히 내보냈다가 영화 엎어지면 허위 보도로 잡힐 수 있어.”
“알겠습니다.”
“입단속 단디해라. 기자들한테도, 기획사들 쪽에도.”
“물론이죠, 선배님. 새나갈 일 없습니다. 키스톤월드 쪽도 차관우 회장 재량으로 암암리에 진행하고 있답니다.”
“너한테 들어간 정보는 남들한테도 노출될 수 있다는 뜻이야. 그 사촌 단속 잘해라. 그래야 특종은 우리가 딴다. 죽 쒀서 개 주는 수가 있어.”
전화를 끊은 김흥수는 소름이 돋았다.
‘설마 유태일 감독한테 언질을 받았나? 유태일 감독 영화가 개봉할 걸 알고 초세기를 한다? 이도원이?’
지금 기획사와 계약을 하는 것과, 상업영화가 되고 개런티가 책정된 다음 계약을 하는 것은 조건 자체부터가 다를 것이다. 기획사들 입장에선 그래서 더, 될성부른 떡잎인 이도원이 뜨기 전에 잡으려고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도원의 의도를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기다려보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
분명한 건 상황이 재밌게 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김흥수는 화제를 바꿔 후배 기자가 보낸 이메일을 확인했다.
“이도원 보다 두 살 많은 신인이라.”
후배 기자가 보내온 정보의 내용은 간단했다.
[중영대, 동인대 독백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한 김진우 프로필 첨부합니다.]
프로필 파일은 놀라웠다.
“이건 또 뭐야? 국회의원 김봉민의 서자?”
김흥수는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후배 기자에게 즉시 전화를 돌렸다. 보수적인 성향의 대한민국에서 서자의 존재가 알려진다는 건 김봉민 국회의원의 정치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는 일이었다.
후배 기자가 전화를 받자 김흥수는 대뜸 욕부터 지껄였다.
“이 새끼야! 너 미쳤냐? 사회부 기자들도 쉬쉬하고 있는 정보를 우리 쪽에서 터트리겠다고? 걔들이 몰라서 닥치고 있겠냐? 응?”
한참 더 욕설을 퍼부은 김흥수는 전화를 거칠게 끊으며 노트북에 시선을 던졌다.
‘그러니까 김진우가 김봉민의 서자라 이거지? 김봉민이 김진우를 어려서부터 외국에 거주시킨 것도 서자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고. 그런데, 이제서 왜 다시 한국으로 불러들인 거야? 김진우가 뜰수록 알려질 수밖에 없는데, 십오 년 간 숨겨온 서자를 연예인 하라고 예술고등학교로 보내?’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김봉민 의원에게 직접 물을 수도 없는 일.
“김진우를 만나봐야겠어.”
김흥수는 강렬한 대박 조짐을 느꼈다. 이도원과 김진우는 더 할 나위 없이 흥미로운 소품들이었다. 잘만 손질하면 영화계 기자가 된 후 최고의 기삿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이십 년 기자 경력이 예감하고 있었다.
*
이도원은 교복을 벗고 제의가 들어온 기획사 홈페이지로 접속했다.
차지은의 소속사이자 많은 아이돌과 배우를 배출한 최대 기획사 레드 엔터테인먼트. 그와 비견되는 배우 전문 소속사 소리굽쇠와 필담. 세 곳이 유력한 후보였다. 이미 영화계와 방송계에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세 회사가 제안을 하자, 다른 중소 단위 소속사들은 이도원을 포기하는 눈치였다.
‘교수님의 회사를 제외하면, 소리굽쇠나 필담이 더 구미가 당기는데.’
이도원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연기파 배우들이 많은 곳으로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조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가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
이도원이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될 만한 자문을 구할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방송국 카메라 감독으로 오랜 경력을 보유한 박서연의 아버지와, 제자들이 다양한 연기 활동을 하고 있는 이상백.
‘교수님이 낫지.’
이도원은 더 고민할 것 없이 이상백에게 연락을 했다.
수화기에서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울 오면 한 번 오라니까, 왜 이제 연락해?
“죄송합니다, 교수님. 그간 학교 다니면서 인터뷰다 뭐다 좀 시달렸어요.”
-내일 학교로 좀 오너라. 마침 그 일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내일 학교 끝나고 찾아뵐게요.”
-그래, 내일 저녁이나 함께 먹자.
이상백이 흔쾌히 대답했다.
이도원은 전화를 끊고 난 뒤, 씻고 누워서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중해야 돼.’
이도원이 만약 평범한 열일곱 살의 배우가 꿈인 학생이라면 고민하지 않고 대형 기획사 중 마음에 드는 곳을 선택해서 갈 것이다. 하지만 이도원은 한 번 대중들에게 노출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도원은 지금 시기가 자신의 인생에 승부처이자 전환점임을 느꼈다. 그는 기대 반, 설렘 반의 감정으로 밤잠을 설치다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
다음날 학교가 파하자 이도원은 곧장 한국예술대학교로 갔다. 그리고 학과장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상백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들로 혼란스럽겠구나.”
이상백은 냉장고에서 주스를 내오며 말했다.
이도원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 소리굽쇠, 필담에서 제안이 왔습니다.”
“제법 좋은 곳들이구나.”
이상백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너에게 제안을 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예?”
이도원이 모르는 척 묻자, 그가 잠시 망설이던 끝에 대답했다.
“옛날부터 막역하던 지내던 지인의 투자를 받아서 영화제작사 겸 배우 소속사를 차리기로 했다.”
“어려운 결심을 하셨네요.”
이도원은 대답하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만났을 당시 소극장을 하고 계셨다는 건 사업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뜻.’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비록 배우로 활동하는 제자들이 있다지만 이상백은 사업가 보다 예술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상백 교수의 제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따라오기보다, 잘 알려진 소속사에서 안정적인 연기 활동을 하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이도원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대형 회사를 먼저 염두해 둔 것이다.
‘교수님은 계속 예술영화만 제작하셨겠지.’
수익창출이 안되면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이 맞다. 어느 정도 자초지종을 짐작한 이도원은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만약 내가 바라는 대로 배우 활동을 하려면 교수님이 오너인 곳에 들어가는 편이 좋다. 문제는 내가 교수님 회사의 수입원이 될 만큼 인지도가 있느냐는 건데……. 긍정적으로 봐도 당장은 시기상조야. 다른 회사들과 조건만 맞으면, 그곳에서 인지도를 쌓고 들어가는 편이 낫겠어.’
무턱대고 의리만으로 회사를 결정하는 건 이도원과 이상백 모두에게 좋지 못했다. 이도원이 자신 때문에 잘못된다면 이상백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상백은 이도원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다.
“…원래는 내가 널 키워보려고 했지만 좋은 판단은 아닌 것 같구나. 네가 방금 열거한 곳들은 이미 탄탄한 커리큘럼이 쌓인 곳들이다. 셋 중 어느 회사를 선택하든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야. 네 능력을 충분히 발휘시켜줄 수 있을 거다. 그래도 정히 내게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나는 소리굽쇠나 필담을 권유하고 싶구나.”
이도원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판단이었다.
‘그래. 교수님은 이런 분이셨지.’
사업을 하려면 독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모험을 하고 친분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사업 수완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상백은 너무나 청렴하고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운명을 맡기고 어떤 결과를 얻든 원망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도원은 속마음을 감추고 빙긋 웃었다.
“일단은 여러 곳을 모두 만나볼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결정이 너무 늦어지면 안 된다.”
이상백은 이도원에게 주의를 주었다.
“네가 돛단배라고 생각해 보거라. 파도가 없으면 나아갈 수 없겠지. 예술인은 파도를 탈 줄 알아야 한다. 그 시기가 지나면 언제 또 파도가 올지 알 수 없어. 아예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지.”
그 말을 하는 이상백의 표정은 쓸쓸해 보였다. 다름 아닌 자신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도원은 짐작하며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다만, 미래로부터 타임 슬립한 이도원은 유태일 감독의 <우리의 심장>이 몇 년 후 상업영화화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화제에서 받은 상들도 그의 기억과 일치했던 것이다.
‘기다리면 반드시 더 큰 파도가 올 겁니다.’
속으로 대답한 이도원이 이상백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에 진학하길 원하십니다.”
“대학이 무의미하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말했다시피 네 연기를 여러 차례 본 나는 반대한다. 넌 현재 학교에서 누군가에게 연기를 배우는 것보다 현장에서 배우는 쪽이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수준이야.”
“어머니는 잘 모르시죠.”
“그렇겠지.”
이상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원은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교수님께서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어머님을 설득해 달라는 말이냐?”
“예.”
그 대답에 이상백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항상 어려운 부탁을 하나씩 가져오는구나.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고…….”
끝을 흐린 그가 말했다.
“어머님과 약속을 잡아서 내게 연락하면, 지금 네 수준과 내 생각을 정확히 이야기는 해 줄 수는 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이도원은 불쑥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교수님은 언제나 제게 대가 없는 호의를 베푸시는군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도원은 공짜를 믿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백은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공짜로 은혜를 베푼다.
잠시 사이를 두고, 이상백이 대답했다.
“노인도 아이의 마음을 가지면 젊게 살고, 아이도 노인의 마음을 가지면 늙게 산다. 나는 아이의 마음을 잃고 싶지 않다. 순수한 마음을 가지면 기적적인 일들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고, 바보 같다고 말해도 좋아. 아무리 악한 사람도 영화를 볼 때만큼은 감화되듯이, 나는 그런 감동을 줄 수 있는 예술을 하기 위해 어렸을 적 꿈꾸던 순수한 이상들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늘 다짐한다. 그리고 내 세상에서 어른은 아이를 보살필 의무가 있지.”
이상백이 덧붙였다.
“잔소리가 길었지만 너는 재능이 있는 아이고, 나는 어른으로서 네 재능을 보호하고 키워줄 의무가 있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