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디졸브(dissolve; 장면전환) (2)
이도원은 차수희와 잠정적 이별을 고한 뒤 공사가 중단된 부지의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끼니도 거르고 연습에 매달렸다. 알게 모르게 상심했던 그는 해가 저문 뒤에야 집으로 갔다.
그는 다음날 화술훈련을 마치고 미리 전화로 기별한 뒤 이상백을 찾아갔다.
이상백은 학과장실에서 이도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못 본 새 핼쑥해졌구나. 촬영이 많이 고됐나 봐.”
실제로 이도원은 살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전에 비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배우 스케줄이 만만치가 않았거든요. 오늘 개런티 들어와서 저녁에 가족들과 외식하기로 했습니다.”
“효자군.”
이상백이 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연기를 좀 볼까? 카메라 앞에만 있다가 무대 연기를 하면 많이 달라서 적응이 안 되는데, 이런 차이점도 언제든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오랜만에 희곡을 해볼까요?”
이상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프린트해온 독백대사를 주었다.
“지정연기라고 하지. 그 자리에서 바로 대본을 나눠주고 앞, 뒤 내용을 모른 채 독백대사를 분석하는 거다. 이런 방식은 해당 배우의 재능과 기본기를 한눈에 볼 수 있지. 입시연기는 대부분 이런 지정대사와 특기로 진행된다.”
타임 슬립 전, 입시는 물론 수많은 오디션을 거친 경험이 있는 이도원에게는 익숙한 방식의 연기였다.
“예. 알겠습니다, 교수님.”
“준비 시간은 십 분 주마.”
그 말을 남긴 이상백은 강의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이도원은 책상에 기대어 독백대사를 훑어보았다. 지정대사는 운이 좋게 알고 있는 작품이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잘 모르는 작품일 경우가 훨씬 많았다.
‘세일즈 맨의 죽음.’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 맨의 죽음>은 입시 때도 많이 쓰이는 유명한 작품이었다. 여느 입시생이라면 한 번 쯤 읽어봤겠지만, 이상백은 이도원이 아직 고등학교 일 학년인 것을 감안해 이 작품을 권한 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내용은 현대 사회에도 밀접했다. 주인공 윌리 로만은 뒤떨어진 시대의 세일즈 맨으로, 노년을 보내며 돈에 쫓기면서도 과거의 영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자신의 꿈을 전가하며 굳게 믿었던 아들 비프마저 등을 돌리게 되고, 마침내 사회의 비참한 희생자로 남는다는 내용의 희곡이었다.
독백은 아들 ‘비프’의 대사였다. 과거 영광스러운 한때를 보냈던 비프가 현재 자신의 신세를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좌절하고, 과거를 못 잊은 채 자신을 무턱대고 믿는 아버지에게 하는 대사였다.
이도원은 십 분 간 대사를 분석하고 연습을 반복했다. 독백을 세 번 읽었을 때 이상백이 들어왔다.
“기회는 바람같이 지나가는 법이지. 네게 주어진 준비 시간이 끝났으니 이제 관객에게 결과를 보일 차례다.”
이상백이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았다.
이도원은 교탁 앞으로 나가 호흡을 다듬으며 몰입했다. 그는 뒤돌아서서 대본을 치웠다.
순간 이상백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그 새 다 외웠다?’
그가 관객이 되어 잠잠히 바라보는 가운데, 이도원이 홱 돌아서며 말문을 열었다.
“어느 미친놈이 제 목을 스스로 매겠어요!”
음성이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발성이 확 늘었군. 훈련을 빼먹지 않았어.’
이상백이 흐뭇하게 생각했다.
이도원은 진정하려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그대로 있었다. 호흡에 따라 그의 표정은 분노에서 괴로움으로, 괴로움에서 절망으로 얼룩졌다.
“난 오늘 만년필을 움켜쥐고 십일 층이나 되는 델 뛰어내려왔어요. 그때 난 하늘을 봤죠.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들을 본 거예요.”
이도원은 그 순간을 그리듯 시선을 위로 향했다. 그리고 꿈속을 거니는 듯 한 몽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들을 본 거예요 일하고 먹고, 다리를 뻗고 앉아서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는 시간을…….”
그의 어조는 점차, 이상백 감독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또렷해져갔다.
“난 만년필을 들여다봤습니다. 뭣 때문에 내가 이런 걸 훔쳤을까. 난 왜 마음에 없는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쓰지?”
거기까지 왔을 때, 점점 음성에 힘이 들어가고 언성이 높아졌다.
“내가 원하는 건 바보 구실밖에 못하는 저 사무실 안이 아니라, 내가 어떤 인간이라는 걸 안다고 말만 하면 언제까지나 날 기다려주는 저 탁 틘 넓은 들판에 있다고, 난 왜 그 말을 못하죠?”
허공에 아버지 윌리 로먼의 얼굴이 그러졌다. 그는 인생을 부정당한 사람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도원의 목소리에서 기운이 연기처럼 빠져나갔다.
“아버지, 전 한 다스에 일 달러 짜리 싸구려에요. 아버지도 그렇고요. 우리 부자는 남을 지도할 자격이 없어요. 뼛골이 빠지도록 일이나 하는 세일즈 맨에 불과해요. 결국 어떻게 됐죠?”
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물었다. 그리고서 날카로운 비수로 아버지의 심장에 찌르듯, 얼음같이 냉담한 표정으로 소리 질렀다.
“다른 외판원들이나 마찬가지로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마는 그런 싸구려 인간들이라고요! 전 한 시간에 일 달러 짜리 인간이에요. 아시겠어요? 그러니깐 내가 무슨 선물이라도 사들고 올 줄 아신다면 큰 착오에요, 이제 그만 단념하시라고요!”
듣고 있는 이상백의 표정이 다 일그러졌다. 아들에게 현실이라는 비수로 난도질당한 아버지의 표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이도원은 허무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반쯤 울먹이고 반쯤 웃으며, 절망이란 갈기를 두른 사자처럼 윽박질렀다.
“아버지, 난 쓰레기라니까요. 아버지는 그걸 모르세요? 원망이고 뭐고가 어디 있어요? 난 요 모양 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니까요! 제발 절 가도록 내버려 두세요, 그리고 그 허황된 꿈을 태워버리세요.”
그는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듯 지친 목소리로 아버지를 향해 중얼거렸다.
“이러다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야 말 거예요.”
독백은 거기까지였다.
이도원은 잠자코 서서 이상백의 평을 기다렸다. 불현 듯 이상백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내 심장이 절망으로 타들어갔다. 철석같이 믿었던 아들과 현실에게 부정당한 좌절감이 날 당장에라도 한강물에 밀어 넣으려 하더구나.”
그는 말을 이었다.
“아마 네가 공연을 한다면, 현실을 부정하던 세상 사람들은 공연을 보고 나서 대교 난간 위에 서있을지 모른다. 네 감정과 대사들이 그들의 등을 떠밀겠지. <세일즈 맨의 죽음>에서 윌리 로먼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듯이.”
최고의 찬사였다.
이상백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관객을 무대 위에 세우는 연기였다.”
이도원은 소름이 돋았다.
“감사… 합니다.”
이상백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연기를 혼자 볼 수 있다니, 나야말로 고맙지. 난 너의 관객이 되어줄 수 있을 뿐 더는 가르쳐 줄 것이 없다. 어떻게 이런 빠른 시간에 성취를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너의 재능도, 그 재능 보다 큰 노력이 없었다면 꽃을 피울 수 없었으리라 여긴다.”
그가 이어 말했다.
“앞으로는 끊임없이 너 자신을 연구하고, 단련하고, 경험해라. 이제부터는 너 자신과의 싸움이야. 배우는 하루를 노력하면 일보 전진하고, 하루를 쉬면 이보 퇴보한다.”
이도원은 가슴 깊이 충고를 받아들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를 가만히 보던 이상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제 일선에서 물러날 때가 됐나 보군.’
이상백은 주머니 속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회사를 설립해서 대신 꿈을 이루어달라던 투자자의 제안을 섣불리 수락하지 못하고, 수일에 걸쳐 고민하던 참이었다.
이상백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며 이도원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가족들과 상의해 봤는데, 어머니는 제가 대학 진학을 하길 원하세요.”
“대학 진학이라...... 내가 대학교수지만, 네게 학교생활은 낭비일 수 있다. 넌 모르겠지만 학교에서 1,2학년 때 배우는 건 무대에 대한 이해야. 보통 무대를 직접 설치하고 공연기획도 직접 해보면서 스태프부터 시작하지. 무대에 직접 서서 공연을 하는 건 3,4학년 때 부터란 뜻이다.”
현실을 알려준 이상백이 이어 말했다.
“물론 학교에서 배우는 건 있겠지. 하지만 그런 과정을 모두 거치기에는 네 재능이 아깝다. 현장에서 배울 점들이 더 많을 거야. 나도 영화판에는 인맥이 많지 않지만, 극단 쪽은 네가 설자리를 얼마든 만들어 줄 수 있다. 밑바닥부터 시작하지 않고 바로 연기를 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연극판은 경력을 중요시 여겼으며 선후배가 칼 같았다. 낙하산이 통할 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란 뜻이다. 이상백이 이런 제안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맡고 계신 학교 극단으로 집어넣으시려는 건가?’
학교마다 연기과 동문들끼리 모여 만드는 극단이 있다. 이런 극단의 단장은 보편적으로 무대연출 능력이 있는 선배나 교수가 맡는다.
이상백은 반복해 말했다.
“넌 관객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타임 슬립 전 학교를 다녀봤고, 동감하는 부분이었다.
“만약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다면 영화 쪽으로 진출하고 싶습니다. 물론 무대 연기를 끊을 수는 없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