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40화 (40/178)

040/  디졸브 (dissolve; 장면전환) (1)

이도원은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어서야 집 앞에 도착했다.

차가 끊긴 시간이었기에 그는 택시를 타고 아파트 단지에 내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저 멀리 비틀대는 그림자가 보였다.

청바지에 흰 티를 입고 스냅 백을 쓴 여자였다.

‘이 야밤에… 한잔 거하게 하셨네.’

이도원은 신경을 끄고 그녀를 지나쳐가려 했다.

곁눈질로 힐끗 보기 전까지 그런 마음이었다.

“누나?”

화들짝 놀란 이도원이 얼음이 된 듯 걸음을 멈췄다. 술에 취해 비틀대던 여자는 바로 누나 이다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풀린 눈에 힘을 주며 이도원을 확인하더니 깔깔 웃었다.

“우리 동생 아니야?”

이도원을 와락 안은 이다원이 말했다.

“너, 엄마한테 이르면 죽는다!”

“이게 무슨 꼴이야?”

이도원이 물었다.

누나 이다원은 전교에서 1,2등을 다투는 공부벌레였다. 방학 때도 독서실 출석을 거르지 않는 모범생이자 교우관계까지 깔끔한, 말하자면 바른 생활의 표본이었다.

‘세상 고등학생이 다 술을 마셔도 안 마실 인간인데.’

이도원은 내심 생각했다.

그때 누나 이다원이 그를 잡아끌어 벤치에 앉힌 뒤 물었다.

“우리 동생! 맥주 한 캔?”

“이미 술이 만취해서 맥주는 무슨… 술 깨고 들어가. 엄마 걱정하신다.”

“아이고, 우리 동생 철들었저요~?”

“시끄러워.”

이도원은 잠잠히 기다렸다.

이다원이 옆에 나란히 앉더니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내가 미안해. 내가 너 열심히 하는 거 아는데… 흑, 공부도 스트레스받고 넌 연기한다고 룰루랄라 신나서 다니고… 질투도 나고 부럽기도 하고 그랬잖아. 열받잖아. 흑흑.”

“가지가지 하네. 진상이다, 진상이야. 아주.”

이도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다원은 울음을 뚝 그치며 실없이 웃더니 물었다.

“그래도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그녀를 빤히 보던 이도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울다 웃으면 똥꼬에 털 난다. 아이스크림 좀 먹자. 술 깨게.”

“올. 그런 것도 알아? 너 술 먹어봤어?”

먹어봤어도 많이 먹어봤다.

‘아마 누나 너보다 백배 이상은 마셔봤을 걸.’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전생에서의 기억일 뿐, 타임 슬립 한 후로는 입에 대본 적이 없었다.

“시끄럽고 따라와.”

이도원은 누나 손을 질질 끌고 편의점으로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였다.

남매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나란히 서서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불쑥 옆에서 이다원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네? 엄마한테 안 이를 거지? 나 술, 오늘 처음 먹어 본 건데. 세상이 빙글빙글 돌더라. 죽을 뻔했음.”

이도원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물었다.

“연기는 잘 돼가?”

“응.”

“재밌겠다. 나도 해보고 싶었는데.”

“대한민국 사람 절반이 해보고 싶었을걸?”

“넌 내 동생이지만 성격이 굉장히 못됐어.”

“사돈 남 말 하시네요. 그 피가 어디 가나?”

“원래도 싸가지 없었는데, 요새는 재수 없음이 하늘을 찔러.”

남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숨죽이며 집으로 들어갔다. 이내 안방에 발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수색작전을 방불케 하는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이도원은 침대에 누워 누나를 생각하며 반성했다. 그는 이십 년 전으로 돌아와 연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꿈을 위해 가족들을 챙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주변을 잘 돌아보지 못한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유별난 성격의 괴짜들이 많았다. 그러나 적어도 이도원은 그러면 안 됐다. 어쩌면 전생에서도, 누나는 힘들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졌고, 이번에야말로 보다 행복한 삶을 꾸리자고 마음먹었었다.

‘집안 돌아가는 사정은 신경도 못 쓰고, 촬영 한 번 끝냈다고 즐거워하는 꼴이라니.’

이도원은 아직 본격적인 활동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타임 슬립 전 여러 아역들을 보았다.

대개 부모가 방송활동을 하는 한 아이에게만 매달려 있으면 나머지 형제, 자매, 남매가 외로워진다. 자존감이 떨어진 뿐더러, 주변에선 연예인 누구 언니, 누구 동생으로 인식된다.

‘당장 활동을 할 게 아니면 극단에 들어가거나 입시를 하는 길 밖에 없는데.’

생각해봐야 할 문제였다.

이도원은 최선의 선택을 위해 다시 고민에 잠겼다.

*

다음날 이도원은 새벽같이 일어났다. 그는 방학기간에도 일곱 시를 넘기는 법이 없었다.

화술훈련을 마치고 꽃단장을 했다. 슬림한 청바지와 루즈핏 반팔 티를 입고 왁스를 발라 머리를 넘겼다. 스프레이로 고정까지 시킨 뒤 향수를 뿌리고 거실로 나갔다.

누나 이다원이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데이트? 욱…….”

그녀는 술병이 났는지, 말하다 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있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어머니가 이다원을 째려보며 말했다.

“네 누나는 어제 한잔하셨단다.”

한심하다는 듯 나직이 한숨을 쉰 이도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도원이 식탁에 앉자 어머니가 밥을 내왔다.

“우리 남매들, 면담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어머니가 나란히 앉아 밥을 먹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딸내미는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오질 않나, 아들내미는 얼굴 보기도 힘들고.”

“죄송해요.”

이도원이 대답했고 이다원도 고개를 푹 숙였다.

어머니가 이어서 말했다.

“우리 딸은 내년에 꼭 한국대학교 가야지?”

“네.”

이다원이 대답했다.

어머니가 이번에는 이도원을 보며 물었다.

“예술한다고 학업을 등한시하는 우리 아들은… 연기로 대학을 가려는 생각이니?”

이도원은 대입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미 타임 슬립 전 대학을 졸업했었다. 그렇잖아도 성인 연기자로 활동을 하려면 한 살 이라도 젊을 때 데뷔를 하는 것이 유리했다. 보다 많은 배역을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요. 바로 활동하려고요.”

“안 돼.”

어머니가 딱 잘라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걸 존중하는 대신, 대학은 가거라. 지금껏 주변에서 과부라는 소리를 들어도 조금도 창피하지 않았어. 난 너희에게 아버지 몫까지, 부모 역할을 모두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너희 둘도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해 놓고 하고 싶은 걸 하도록 해. 그게 이 어미를 위한 일이다.”

어머니는 확고한 부분이 아니면 여간해선 강압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대부분 여지를 두고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자세로 임해 왔다. 하지만 어머니가 분명한 주장을 피력한다면, 그건ㅊ쉽게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이도원이 대답했다.

“조금 더 고민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지금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어떤 선택이라도 섣부르거나 불확실한 길을 가진 않을 거라는 거예요.”

이도원은 부쩍 듬직해져 있었다.

그가 달라졌다는 걸 이서연도 느낀 마당에 가족들이 못 느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이도원이 어느 날 갑자기 달라졌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대하기로 말을 맞추었을 뿐이다. 물론 이도원도 그 사실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자신도 혼란스러운데, 가족들이라고 선뜻 수용하기 힘들 터였다.

분명한 건 이도원이 전과 달리 매사에 침착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그 점을 감안한 어머니가 대답했다.

“네 판단과 결정을 존중하마. 하지만 너뿐 아니라, 우리 가족을 생각해서 결정하길 바란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소리 없이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이도원은 설거지를 한 뒤, 현관에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갔다 올게요.”

”어디 가니?“

“친한 누나 만나러 가요!”

대충 둘러댄 이도원은 집을 나서서 미래정신과의원으로 갔다.

이미 두 번이나 내원했던 이도원을 알아본 간호사가 물었다.

“이도원 환자?”

“예.”

“어머, 그렇게 말끔한 차림으로 오니까 몰라보겠네요. 선생님은 진료 중이세요.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간호사가 오렌지주스를 한 잔 내왔고 그는 조금 더 기다렸다.

잠시 뒤 원장실에서 나온 남자가 진단서를 받아 갔다. 교대로 원장실을 들락인 간호사가 이도원을 호명했다.

“이도원 환자분, 들어가세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원장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머, 이게 누구야?”

차수희는 언제나 그렇듯 예쁜 웃음을 짓고 맞아주었다.

“도원 학생. 정말 오랜만이에요! 문자 보냈었는데, 답장도 안 하더라고요.”

그녀가 눈을 흘겼지만 이도원은 빙긋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촬영 중이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다시 왔잖아요?”

“후후, 그러네요. 오늘의 목적은 치료? 아니면 상담?”

“상담으로 하시죠. 요즘 심리적으로 굉장히 좋아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차수희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이도원이 말했다.

“영화촬영을 했습니다.”

“예전에도 그렇고, 도원 학생의 일상은 항상 흥미진진하네요.”

차수희는 손에 핸드크림을 바르며 눈을 반짝였다.

이도원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하루하루가 새로워요.”

그는 차수희가 핸드크림을 바르는 동안 왼쪽 약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다. 미처 전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커플링이군.’

이도원은 직감하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현실의 벽이 너무 단단하고 높았다.

‘차라리 이렇게 되니 좀 낫네.’

상실감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후련한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차수희가 혼자였다면, 이도원은 그녀가 틈을 보일 때 고백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됐으면 다시 이곳을 찾기 민망해졌을 것이다.

‘차수희 입장에서야 어린아이의 치기로 보았겠지만.’

이도원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자 차수희가 물었다.

“오늘은 말이 별로 없네요?”

“그냥 문자 보고, 얼굴 뵈러 왔습니다.”

이도원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보겠습니다. 연습이 남아있어서요.”

“아, 그래요…….”

차수희는 조금 당황해 말끝을 흐렸다. 뭔가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지금 느끼는 기분의 정체를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도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차수희에게 느낀 호감은 이곳에 두고 가자.’

그는 새삼 다짐하며, 인사를 하고 원장실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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