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프로덕션 (production; 촬영기간) (4)
이도원의 감정은 최고조.
반면 차지은이 스타트를 끊을 차례였지만, 그녀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시작 전 마음을 다잡았지만 막상 카메라가 돌아가자 몰입이 깨졌다.
이도원은 차지은의 역할인 ‘상희’의 대사가 채워야 할 빈 공간을 흐느끼는 호흡으로 대신하며 메꾸었다.
스태프들이 그 호흡에 이끌린 듯 움직였다. 카메라는 이도원의 얼굴을 클로즈업 했으며 마이크는 가까워졌다.
대본과 달리 이도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내가 온 게 싫으니?”
유태일 감독은 모니터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며 내심 생각했다.
‘상대 배우의 호흡을 이끌어내고 있다. 독주하던 지금까지와는 달라.’
대본상 엔지였으나, 그는 지금이 이도원이 해왔던 연기의 전환점이라는 걸 깨닫고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 이도원의 질문을 받은 차지은은 그 호흡에 동화되어 자연스럽게 상황이 받아들여졌다. 연이어 감정이 살아나며 입술 사이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제 안 와도 돼.”
어렵사리 말문을 연 차지은.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가쁜 호흡을 뱉었다.
순간 소매를 걷고 장비를 잡은 스태프들의 팔에 닭살이 우수수 돋았다.
“어차피 난 죽겠지. 오빠는 잘 살 거야. 엄마,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듯이.”
“아니야!”
이도원이 치고 들어가며 절절하게 말을 이었다.
“너,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차지은이 받아쳤다.
“내 말이 틀렸어?”
그녀의 호흡이 점점 거칠게 차올랐다. 그녀는 소리를 질렀던 지금까지와 달리, 이번 테이크에서는 처연하면서도 자조적으로 물었다.
“오빠 잘 때, 원무과에서 온 문자도 봤어. 내가 살려면 새 심장이 필요하대. 오빠가 뭘 할 수 있는데? 오빤 엄마,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아무것도 못해.”
“나도 노력하고 있어.”
이도원이 대사를 씹어뱉었다. 저릿한 목소리가 차지은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는 마음이 아픈 이유를 다른 데서 찾았다. 그리고 반발심 그대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입 밖으로 꺼냈다.
“그냥 가! 가라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면서… 난 살고 싶어. 내가 왜 죽어야 돼?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것도 억울한데! 왜 나까지 이런 일을 당해야 돼?”
이도원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끅끅- 울음을 참는 호흡이 새 나왔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진정해. 너 그러다 큰일 나.”
차지은도 이미 엉엉 울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마음을 추스리려 했지만,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그녀는 발음에 신경을 쏟으면서도 감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살려줘.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려줘, 오빠…….”
차지은이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오열하는 동생을 보며 이도원은 자리를 박차고 병실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쥐면서 덜덜 떨리는 손을 카메라가 줌으로 잡아냈다.
스태프 전원과 유태일 감독은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을 만큼 희열을 느꼈다.
‘카메라, 마이크! 따라가!’
유태일 감독은 속으로 외치며 스태프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것과 무관하게 이미 한마음이 된 스태프들은 이도원의 연기를 따라붙어 촬영하고 있었다.
철컥.
이도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복도로 나갔다. 그는 문 안쪽과 바깥쪽의 경계에 멈춰서, 고개를 돌려 차지은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차지은 침대 너머 있는 카메라가 풀 샷으로 잡았다. 순간 스태프들이 손발을 맞추기 시작했다.
조명감독이 황급히 이도원의 뒤로 돌아가서 전면에 있는 조명을 끄라고 손짓했다. 어두운 그림자가 이도원의 모습을 가렸고, 역광이 생겼다.
쓸쓸해 보이는 병실 침대 너머, 어둠 속에서 이도원의 눈동자만이 아스라이 빛났다.
‘이건 대본으로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이다.’
유태일 감독은 엔도르핀이 머리끝까지 솟은 상태였다.
스태프들 모두 한마음으로 숨을 죽였다.
‘상태’의 감정은 짙은 회색. 먹구름과 같은 적막함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이도원은 어떤 대사 보다 무거운 침묵을 던지며 몸을 서서히 돌렸다.
탁.
병실 문이 닫히고, 돌아누운 차지은의 외소한 어깨가 들썩였다.
카메라 감독이 빈 병원 침대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동시에 줌으로 당기자 초점도 위에서 아래로 잡혔다. 그녀의 쓸쓸한 모습과 병원의 풍경이 한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와이드 샷(WS; 배경을 포함해 광범위하게 잡는 샷)이었다.
“컷. 오케이!”
유태일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동시에 모든 스태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현장은 희열에 잠겼다.
셀 수 없이 반복된 테이크 만에 성공적으로 연기를 보여주면서 촬영을 끝낸 차지은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도원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환하게 웃었다.
그들을 보며 유태일 감독이 중얼거렸다.
“내가 이 맛에 감독을 하지.”
*
생각보다 촬영이 금방 마무리되었기에 몇 가지 부분적인 씬을 더 찍을 수 있었다. 스태프와 배우 모두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 결과였다.
현장 철수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나머지 스태프들이 현장을 정리하는 동안, 조감독을 대동한 유태일 감독은 직접 두 배우에게 다가와서 시원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정말 잘 해주었습니다.”
이도원이 웃으며 화답했다.
“많이 배웠습니다. 감독님.”
“저도요. 정말 너무… 흑흑, 감사드려요.”
차지은은 아직도 감격을 떨치지 못하고 발음을 뭉그러뜨리며 끅끅댔다.
유태일 감독은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워크숍 때, 그리고 영화제에서 상영될 때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촬영은 제 짧은 감독 생활 중에도 잊지 못할 촬영이었습니다. 감독으로서 이런 경험을 하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다음 작품도 꼭 두 배우님과 함께하고 싶군요.”
“불러만 주십시오.”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대답했고, 차지은은 무어라 말도 못한 채 고개만 반복해 끄덕였다.
정리가 되어가는 현장을 바라본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두 분은 귀가하셔도 됩니다. 워크샵나 영화제에서 만나면 그땐 식사나 따로 한 끼 하죠. 오늘은 저도 현장 정리하고, 또 바로 편집하러 가야 해서 힘들 것 같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흑… 네.”
조감독도 웃으며 그들을 치하했고, 악수를 나누었다. 나머지 스태프들과도 포옹을 했다.
두 달간의 대장정을 무사히 끝낸 이도원은 가슴이 부풀어 오를 만큼 벅찼다.
‘역시, 너무나 멋진 일이야.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이도원과 차지은은 현장을 나와 병원 앞에서 악수를 나누었다. 복받치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수른 차지은이 이도원을 보고 말했다.
“오빠. 감사해요. 정말…….”
“워크숍 때 보자.”
이도원은 담백하게 인사했다. 그는 그녀에게 따로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촬영기간 동안 계속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가까워져 있었지만, 아직 이도원은 일반인이고 차지은은 연예인이었다. 함부로 번호를 알려주기 꺼려질 수 있었다.
망설이던 차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빠. 그때 봐요. 그리고 그땐 꼭 연락처 교환해요.”
그녀는 그가 오해할까 봐 덧붙였다.
“저도 매니저 오빠한테 허락 맡을게요.”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그래. 어차피 자주 볼 텐데 뭘. 마지막 연기는 소름 돋을 만큼 좋았어. 영화도 잘 나올 거고.”
차지은은 못내 아쉬운 듯 몸을 돌리지 못했다.
이도원이 나서서 당분간 이별을 고했다.
“그럼.”
“예, 안녕히 가세요.”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이도원이 먼저 몸을 돌렸다.
‘오늘의 느낌을 잊지 말자.’
그는 다짐하며 지난 현장에서의 순간들을 생각했다. 당시의 감정과 상황이 생생하고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도원은 촬영에 돌입하면서 차지은이 놓친 대사의 빈 공간을 호흡으로 메우고, 애드리브를 이용해 그녀가 할 대사를 끌어냈다.
‘내 역할뿐 아니라 상대의 역할과 대사까지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는 계속된 엔지로 그녀의 역할과 대사를 인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애초 촬영에 돌입하기 전에는 자신의 역할에만 몰두했다. 자신의 역할과 상대역을 이해하고 펼치는 연기는 전에 비해 훨씬 큰 시너지효과를 냈다.
‘준비가 부족했었어.’
이도원이 상대방의 호흡을 빼앗으며 독주를 하는 데에는 준비성 부족이라는 뜻밖의 이유가 있었다. 차지은이 본인의 호흡을 잃고 엔지를 낸 이유도, 그의 연기적 결함이 미친 악영향이었다.
‘난 지금껏 대본을 읽어왔다.’
이도원은 차지은의 실수를 매워주기 위해, 그는 그녀에게 대본을 생각하지 말고 대답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상태’라고 굳게 믿으며 대본 그대로 하던 연기를 대화하듯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느낀 점은 그동안 대본을 잘 읽었을 뿐, 대본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인물이 살아있으려면 먼저 내가 자신을 상태라고 믿어야 한다. 동시에 나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면 안 돼.’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흐름을 주도하면서 상대 배우의 호흡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얻었다. 꼭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성취인 것이다.
“산 너머 산이군.”
그는 입 밖으로 뱉은 고민과는 달리 기분 좋게 웃었다.
이미 이도원의 머릿속은 연기의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것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