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프로덕션 (production; 촬영기간) (3)
제작진은 계속 같은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여섯 번의 엔지, 그리고 일곱 번째 연기 시작.
이도원은 병실 안의 침대 곁에서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숨죽여 흐느꼈다.
이도원을 겨냥했던 카메라가 누워있는 차지은에게로 움직였다. 그녀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안 와도 돼.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어차피 오빠는 또 잘 살겠지. 엄마, 아빠 돌아가신 후에 그랬던 것처럼.”
이도원은 고개를 홱 돌리며 그녀를 노려봤다.
“너! 어떻게 그런 말을…….”
“내 말이 틀렸어?”
차지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내가 살려면 새 심장이 필요하대. 오빠가 어떻게 할 건데? 병원비도 없는데! 수술비는 어디서 구하려고?”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모니터를 주시하던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순간 차지은이 점점 차오른 호흡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가! 가라고!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아!”
마지막 대사가 씹혔다.
그녀의 탄성이 마이크에 걸렸다. 그리고 다시 반복된 실수로 인해 눈을 질끈 감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고개를 저은 유태일 감독이 외쳤다.
“컷! 엔지.”
스태프들 사이에서 아깝다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차지은은 상체를 일으키며 사방에다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손발이 차가웠다. 머릿속은 이미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스태프들은 침묵하고 있었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 뒤로 다섯 번의 엔지가 났다. 테이크 숫자가 오를수록 차지은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애썼지만 절망만 남았다.
이윽고, 유태일 감독이 물었다.
“좀 쉬었다 할까요?”
사실 쉴 시간은 없었다. 스태프들은 정신적 여유도, 반납까지 시간적 여유도 부족했다. 하지만 유태일 감독은 그 점을 표면 위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그럼에도 차지은은 자신을 짓누르는 중압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해볼게요. 감독님.”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다시 갑니다. 레디.”
이도원과 차지은이 다시 감정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태일 감독은 스크립트에게 빠지라는 신호를 주었다. 따라서 스크립트는 슬레이트의 테이크 숫자를 바꿀 뿐 굳이 외치지 않았다. 배우들의 부담을 줄이려고 배려한 유태일 감독이 초심으로 돌아가 첫 테이크인 것처럼 밝게 외쳤다.
“액션!”
그가 사인을 보내자 배우들이 연기를 시작했다.
‘괜히 테이크 숫자로 부담을 줄 필요 없다.’
유태일 감독은 한 가지 수를 더 냈다.
‘액션을 외칠 때 움츠러든다. 신호도 보낼 필요 없어. 어차피 편집으로 만지면 된다.’
또다시 같은 부분에서 엔지가 났다.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바로바로, 준비될 때마다 계속 가세요.”
두 배우가 대사를 주고받다가, 다시 엔지가 나던 부분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가! 가라고!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수차례 열연을 했지만 항상 같은 곳에서 막혔다.
그녀는 매번, 대사를 순간적으로 잊었다.
이를 지켜보던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촬영을 계속해도 엔지가 반복될 뿐이다. 차지은에게는 부담감을 덜어낼 시간이 필요해.’
그는 곰곰이 생각하며 컷 사인을 보내지 않았다. 좀 더 지켜보려는 목적이었지만 차지은은 쉽게 흐름을 잡지 못했고, 대사를 잇지 못했다.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뭐라도 해보란 말야… 무슨 짓이라도! 제발, 난… 죽기 싫어.”
이미 감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대사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그녀가 느끼는 중압감이었다.
“괜찮아요. 조금 쉬겠습니다.”
유태일 감독이 휴식을 지시했다.
지칠 대로 지친 스태프들이 현장 이곳저곳 퍼졌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맨바닥에 드러누웠다. 이틀 꼬박 밤을 새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들 틈에 섞여있던 조감독은 유태일 감독을 바라보며 내심 감탄했다.
‘역시 유태일 선배다. 가장 조급한 사람은 선배님일 텐데…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어. 정말 강한 분이지만… 이번에도 촬영에 대한 고집이 통할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차지은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병실 밖 복도로 나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 제발!”
그녀는 미칠 지경이었다.
힐끔 차지은을 본 이도원은 화장실을 갔다가 자판기 앞에 섰다. 스태프들 것까지 챙기기에는 지폐가 부족했다. 따라서 그는 차지은 것만 챙겨서 돌아갔다.
이도원은 말없이 에너지음료를 건넸다.
음료수를 건네받은 차지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오빠… 죄송해요.”
목소리나 말투마저 전에 비해 딱딱해져 있었다.
이도원은 그녀의 실수 덕분에 열 번이나 똑같은 감정연기를 반복해야 했다. 에너지가 고갈되어 그의 연기까지 흔들릴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이도원은 덤덤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어깨에 들어가 있는 힘 좀 풀어. 네가 할 수 있는 간단한 대사에서 실수를 하는 건 긴장해서 그럴 뿐이야. 지금까지 잘해왔고, 편하게 연기해.”
차지은은 현장 경험이 처음이라기에는 너무나 노련하게 적응했던 이도원을 보았다. 그녀는 문득, 그라면 어떤 걱정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빠라면 알고 있을 것 같아요. 오빤 단 한 번도 큰 실수를 하지 않았죠. 이럴 땐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거죠?”
이도원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지금까지 네 대사만을 말했다면, 지금부턴 내 대사를 잘 듣고 대답만 해보자. 상희가 어떤 인물인지 네 머릿속에 각인이 돼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거야. 감정도 그대로 가져갈 수 있을 테고.”
“애드리브가 과해지면요?”
“지금 대사가 입에 안 붙잖아. 부담감도 있고,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억지로 대사를 생각하고, 네 본모습을 바꿔서 연기하려니까 힘이 들어가는 거야. 네 연기에 상희를 입혀봐.”
“그러다 또 엔지가 나면요? 전혀 다른 대사가 나오거나…….”
이도원은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배우는 원래 엔지를 내는 거야. 그 엔지 중에서 감독이 마음에 드는 오케이를 고르는 거고. 많이 찍을수록 더 좋은 장면이 나올 거야. 스태프들도, 나도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언젠가 촬영은 끝나겠지. 네가 후회 없는 연기를 하려면, 쓸데없는 걱정은 버리고 너 자신한테 집중해.”
차지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도원은 그녀를 보며 덧붙였다.
“대본에 의지하지 말고 틀리건 말건 그냥 쭉 밀고 나가. 부족한 부분은 내가 커버해 줄 테니까. 여긴 무대가 아닌 촬영장이야. 편집을 통하면 네가 대사를 틀려서 더듬는 것조차 감정연기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지.”
그녀는 이도원의 말을 들으며 어쩐지 십 년 묵은 체중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직 부담감은 여전했지만, 마음을 비우려 애썼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차지은은 화장실 세면대에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그녀는 물기가 가득한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방수 분장으로 인해 창백하고 병약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차지은은 그 얼굴과는 상반되게,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차리자. 처음처럼!”
이도원은 먼저 병실에 들어가 있었다.
차지은이 돌아오자 스태프들이 포지션으로 돌아갔다.
유태일 감독이 그녀에게 물었다.
“준비됐나요?”
침대에 누운 차지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이번에야말로 잘 해보겠습니다.”
이도원이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의 표정을 읽고 고개를 끄덕인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카메라 롤.”
카메라가 작동했다.
스태프들은 모두 초심으로 돌아가 집중했다.
마이크가 내려오고, 감정을 끌어올린 이도원. 그는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떨구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