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프로덕션 (production; 촬영기간) (2)
낚시터에서 토요일 밤을 꼴딱 지새운 이도원은 일요일도 일찍부터 움직였다. 그는 공사장 부지로 가서 열두 시간이 넘도록 화술훈련과 대본 연습에 매달렸다.
평일이면 영락없이 밤 촬영이 이어졌고, 주말에는 밤낮 없는 촬영이 계속됐다. 그럼에도 이도원은 화술훈련을 빼먹지 않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그것도 부족하면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을 활용했다. 간간이 만나서 연기를 지도해주는 이상백 교수마저 지독한 연습벌레라며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두 달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버렸다.
이도원은 이번 영화의 마지막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중대병원 병실 앞 복도에서 잠시 휴식을 갖는 중이었다.
그때 불현듯, 이도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메시지였다. 종종 연락이 오는 박서진이나 박아현이겠거니 했는데 생판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미래정신과의원 차수희 원장입니다. 요새 도원 학생이 내원하지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문자 보내요. 잘 지내고 있죠? 조만간 시간이 나면 한 번 내원해서 그간 일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 봐요.
보낸 이는 차수희였다.
모두 읽은 이도원은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그가 근래 병원을 찾지 않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말 그대로 바빠서였고, 둘째는 차수희를 떠올리면 이상야릇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의 정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봤다고…….’
이도원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역시 대부분 남자들이 단순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남자는 몇 가지 간단한 조건만 충족되면 호르몬작용만으로도 충분히 호감을 가질 수 있었다. 더구나 차수희는 전생에 서른일곱 살이던 이도원과 교제하기에는 적령기의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같은 일곱 살 차이라도 십 대 때와는 달리, 이십 대 후반과 삼십 대 중반은 큰 차이가 아니었다. 문제는 현재 그의 정신연령과 신체나이가 모순된다는 사실이다.
‘정리해야 한다.’
이도원은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그녀는 자신을 이성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이도원의 정신연령은 서른일곱이었지만 신체 나이는 열일곱 살. 그래서 더 이성적으로 감정을 자제해야 했다.
바쁘면 그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보고 싶을 뿐이었다.
“난 현재에 만족해.”
이도원은 휴대폰 화면을 끄며 중얼거렸다.
우연히 그 말소리를 들은 차지은이 물었다.
“여친 연락이에요? 표정이 심상치 않네요?”
그녀는 이성관계에 호기심이 많을 나이, 그리고 호기심에 솔직한 나이다. 하물며 두 사람은 두 달간의 촬영으로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더불어, 방학 시즌에 들어가면서부터 촬영 스케줄도 빡빡해졌다. 붙어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치의 연락.”
“주치의? 오빠, 어디 아파요? 아닌 것 같은데……. 뭐 ‘Love sick’이니 한 건 아니죠?”
은 직역하면 상사병으로, 유행가였던 노래다. 이도원의 십팔번이기도 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 여자친구 없어.”
“에이, 그것도 뻥.”
차지은이 볼 것 없다는 듯 부정했다. 그녀가 보기에 이도원은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면서도 상반되게 잘 챙겨주고 듬직한 구석이 있었다. 즉, 외모도 근사하고 매력도 넘친다는 뜻이다.
반면 이도원 역시 그녀가 확신하는 이유를 짐작했다. 중, 고등학생들의 보편적인 기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쉽게 아파한다. 절제력이 떨어지고 감정에 솔직한 시기였다.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연기해야지,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어? 촬영 한 번 들어가면 가족들 얼굴 볼 틈도 없는데.”
그 말에 차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공감했다.
“그러게요. 휴… 친구들은 연애하느라 바쁜데, 난 연예인이나 보고 있네요. 연예인이랑 오빠동생 하면 뭐 해요? 서로 얼굴 볼 시간도 없는데.”
그 순간, 이제는 친숙해진 유태일 감독의 목소리가 대화를 자르고 들어왔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마지막 장면은 아니지만 마지막 촬영입니다. 두 달간 고생한 만큼 좋은 장면을 뽑아봅시다.”
그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사기를 고양시키려는 듯 말했다. 삼 일 째 철야로 작업을 하고 있는 스태프들의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학교 측에서 갑작스레 촬영 장비 반납 일을 한 주나 단축하는 바람에 쉴 틈 없이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 배우들은 교대로 쉬었지만 스태프들은 꼼짝없이 현장에서 말뚝을 박았다. 오죽하면 촬영이 끝나도 장비를 철수하지 못하고 한둘 씩 남아 교대로 새우잠을 자며 현장 장비를 지켰다. 장비 세팅 시간을 최소화시켜 바로 다음 촬영을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얼굴을 보던 차지은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녀는 이미 다섯 번의 엔지를 반복해서 낸 상태였다.
“엔지 더 내면 큰일 날 분위기네요…….”
차지은이 이도원을 향해 속삭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이 크겠어.’
현장 분위기가 이처럼 굳으면 배우들의 연기도 굳어진다. 배우들이 중압감을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들이 오케이 사인을 받아야만 촬영이 종료되는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능히 짐작한 이도원이 말했다.
“긴장하지 마. 지금까지 잘했는데, 뭘,”
“오빠는 현장경험도 없다면서… 어떻게 저보다 멀쩡해요? 완전 무사태평이네요.”
차지은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그가 먼 미래에서 왔으며, 자신보다 적어도 수 배의 현장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알 수 없었다.
이도원은 씩 웃으며 되물었다.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순간만 집중하면 돼.”
*
한편, 조감독이 가져온 소식을 들은 유태일 감독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현장의 누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오늘 내로 장비를 모두 반납하라고? 단축된 반납 일이 내일모레 아니었나?”
“현수 선배 장난이겠죠, 뭐.”
조감독이 확신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태일의 라이벌로 소문난 김현수는 현재 영화과 학회장이었다. 그는 교수들을 구워삶는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도 학과 내 정치력이 뛰어난 그가 잔꾀를 부린 것이 분명했다.
유태일이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 영화촬영을 위한 모든 준비 단계) 때 이미 섭외, 예산, 장비, 로케이션, 촬영 스케줄까지 모두 보고했잖아. 안 그래도 막바지에 일주일이나 프로덕션(production; 영화촬영 시작부터 끝날 동안의 기간)을 단축한 것도 모자라서 오늘 중으로 장비를 반납하라고? 씬을 빼라는 건가?”
그는 나직한 분노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조감독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도 자세한 상황이야 모르지만, 아무튼 오늘 내로 반납하랍니다. 우리가 예정보다 빨리 끝내려고 타이트하게 촬영하지 않았더라면 영화 자체를 엎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씬, 적당히 마무리 치고 편집으로 살리시죠. 선배님도 아시겠지만, 이러다 이도 저도 안될 수 있습니다.”
그가 타일렀지만, 유태일 감독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두 시간 남았는데? 네 시간만 늘려봐. 현수를 조지든, 학과장한테 사정을 하든.”
“선배님…….”
“가능하다고 해줘라. 난 독단적이라서 워낙 미움을 샀지만, 넌 현수나 학과장이랑 친하잖아.”
유태일 감독이 부탁했다. 뜨거운 눈길을 받은 조감독은 울컥한 마음에, 긴 한숨을 뱉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근데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그 이상은 무리에요.”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고 모니터를 봤다. 그는 금 새 차분해진 목소리로 스태프들에게 지시했다.
“롱테이크로 바꿔서 갑니다.”
그 선언에 카메라 감독이 이의를 달았다.
“상태, 상희 모두 감정이 폭발하는 씬입니다. 그리고 대사도 많습니다. 컷해서 짧게 찍었을 때도 엔지가 났고요. 롱테이크로 가면 오늘 밤 새 찍어도 건지기 힘들 겁니다, 선배님.”
그를 보조하는 포커스 풀러, 촬영 퍼스트, 세컨드, 써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뿐만 아니라 조명감독, 조명 퍼스트, 세컨드, 써드, 그립팀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붐 오퍼레이터(boom operator; 마이크 기둥을 다루고 고정 마이크를 설치하고 녹음 필름을 공급하는 사람)를 불러들인 음향감독이 말했다.
“그냥 컷 나누시죠. 편집만 잘하면 더 잘 나올 겁니다.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많이 지쳤습니다. 일주일이나 단축됐지만 아직 반납 일까지 삼 일이나 여유가 있지 않습니까?”
감독과 조감독을 제외하고 현장의 누구도 장비 반납 기간이 또다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공개된다면 스태프들과 배우들 모두 부담이 가중될 터였다. 따라서 유태일 감독은 그 사실을 숨기며 대답했다.
“이 장면은 롱테이크로 가야 잘 나옵니다. 모두들 강행군으로 많이 지치고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제대로 만듭시다. 두 달 동안 고생한 작품인데 후회는 남기지 말아야죠. 우리의 수고가 아깝잖습니까. 안 그래요?”
다들 불만이 완전히 해소되진 않았지만 과에서 탑을 달리는 유태일 감독의 제안이었다. 더구나 선배가 웃는 낯으로 타이르는데 제동을 걸 수는 없었다.
스태프들이 모두 원위치로 돌아갈 때쯤 이도원과 차지은도 준비를 마쳤다. 자리가 잡히고, 현장 분위기를 살피던 유태일 감독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카메라 롤.”
그는 현장을 무겁게 짓누르는 피로감과 불만을 일거에 떨쳐버리려는 듯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레디, 액션!”
스크립트가 슬레이트를 쳤다.
“씬 넘버 37-3, 테이크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