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크랭크 인(crank in; 촬영개시) (10)
마티니(martini; 그날의 마지막 샷, 막 씬)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유태일 감독은 이도원을 보며 생각했다.
‘늦게 달아오르는 타입인가 하면, 처음부터 잘했어. 현장에 익숙해질수록 계속 발전하는 것 뿐이다. 원래 현장감이 있었다는 뜻인데.’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도원은 이번이 첫 촬영이라고 했다. 그런데 연기의 상승곡선을 그려보면, 마치 오래 쉬었다 복귀한 현역 배우를 보는 느낌이었다.
유태일 감독은 알쏭달쏭한 기분에 사로잡혀 그날의 마지막 사인을 보냈다.
“오케이, 컷.”
유태일 감독이 시계를 봤다.
열 시간에 가까운 촬영 시간 동안 불과 두 씬을 찍었다. 아직 여유가 있으니 중요한 씬에선 최대한 많은 구도로 편집할 장면을 비축해 놓자는 의미였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유태일 감독은 불평 한 마디 없이 임해준 이도원을 치하했다.
이도원 역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스태프분들도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스태프들은 이제 철수를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정리를 해도 아마 여섯 시나 되어서야 잠이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유태일 감독과 조감독은 밤을 꼬박 새며 오늘 건진 장면들을 모니터링하고 편집해야 했다. 하필 내일은 데이(day; 낮) 씬이라 스태프들은 두어 시간도 못 자고 다시 촬영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 토요일이니까 아침 아홉 시까지 모이기로 하죠.”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스태프들이 배우보다 힘들다는 것을 잘 아는 이도원은 밝게 외쳤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이도원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택시에서라도 좀 자둬야 밤을 꼴딱 새우고 다시 나오는 일만은 막을 수 있었다. 컨디션이 난조면 연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도원이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문전에 조간신문이 도착해 있었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침상을 차리던 어머니가 말했다.
“뭘 이렇게 늦게까지 했어? 어디 그래서 촬영하겠니? 촬영 간다더니 얼굴이 반쪽이 됐… 어맛!”
어머니가 싱크대 위로 그릇을 떨어트리며 화들짝 놀랐다. 이도원의 특수 분장이 만든 부작용이었다.
이도원은 맥없이 웃으며 물었다.
“특수 분장이에요. 고생해서 늙어버렸거나 한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근데 누나는요?”
“그… 참, 감쪽같네……. 아직 자고 있지.”
어머니가 대답했다.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 미처 생각을 못 했다. 토요일인데다 이른 시간이었으니 당연히 자고 있을 텐데. 이도원은 신발을 벗고 터덜터덜 걸어들어가며 멍한 상태로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도 좀 자고 나올게요.”
이도원은 특수 분장을 지우기 위해 세수하고, 이를 닦고, 발을 닦고 누웠다. 그러자 졸음이 물벼락처럼 쏟아졌다.
*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필름이 끊겼던 이도원은 시끄러운 알람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우와, 진짜 죽겠네.”
사람이 이렇게 피곤할 수 있나 감탄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눈을 뜨고, 어머니가 방문에 기대어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어디 그래서 촬영하겠니?”
“재밌어요.”
이도원은 반쯤 정신을 놓고 샤워를 했다. 다음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믹서로 야채와 과일을 갈았다. 주말인데도 모처럼 일찍 일어나서 수저를 뜨던 이다원이 물었다.
“그 영화, 학생 작품이라며. 상영되는 거 아니지?”
“왜?”
“상영된다고 하면 애들한테 자랑 좀 하게.”
“됐어.”
이도원이 딱 잘라 말하자, 이다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투덜댔다.
“예, 예~ 그러시겠죠. 대단한 일하신다고 고성방가를 하질 않나, 당당하게 외박을 하질 않나… 다 참아줘도 소용없네요!”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건강주스를 한 입에 들이켰다.
어머니가 이다원의 머리에 꿀밤을 날리며 나무랐다.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셔요? 아주? 열심히 일하고 들어온 동생한테 누나란 녀석이…….”
“아, 쫌!”
이다원은 식탁으로부터 피신했다. 그녀는 가방을 메고 현관에 서서 외쳤다.
“미천한 딸은 공부해서 신분 탈출하러 독서실 갑니다. 아들만 데리고 사세요, 아주!”
그녀가 퇴장하자 어머니가 물었다.
“그런데 정말 영화 개봉은 안 하니?”
“왜요?”
“그… 오늘 학부모회 아줌마들이랑 영화 보기로 했거든. 다들 자식 얘기 밖에 안 하더라.”
이도원은 다시 한 번 웃었다.
*
이도원은 촬영을 위해 중영대학교로 가는 길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이상백이었다.
-오늘은 뭐 하니?
“촬영하고 일정은 없어요. 끝나는 시간은 정확히 모르겠는데, 어제 철야 촬영하고 스태프들도 자야 해서 아마 저녁때쯤 마칠 것 같습니다.”
-그럼 나랑 어디 좀 가자.
“예, 교수님. 그런데 어디를요?”
-낚시터.
“예?”
-아무튼, 끝나고 학교로 와라. 내 차로 가면 되니까.
“아무것도 안 가지고요?”
-내 아들 낚시 장비 있으니까 걱정 말고.
이상백은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뭐지?’
이도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금일 이도원이 촬영할 데이 씬은 상태의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상태는 일용직 노가다를 뛰고 가끔 일수 일도 나갔다. 돈 될 만한 일이 있다면 더럽고 험한 일도 마다않는 생활을 전전했다.
마침내 막 씬.
이도원은 돈 봉투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액수를 확인한 그는 일을 알선해 주는 친구 이은조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좀 적다?”
“아냐. 요즘 경기가 어려워서 그래, 경기가.”
이은조가 대답하자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그를 비꼬았다.
“지랄하고 있네. 니들이야 경기가 어려울수록 잘 먹고 잘 사는 놈들이잖아? 남의 불행을 행복으로 아는 사회 악, 해충들.”
이어서 이도원이 탁자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고 눈을 찌푸리며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원래 신분이 미성년자기 때문에, 그는 불을 붙이는 대신 라이터를 찾는 흉내를 냈다.
“불.”
이은조 역할의 조연이 라이터를 건넸다.
이도원은 라이터를 받고 자신이 물고 있던 담배를 부러트렸다.
“아니다, 끊어야지.”
중얼거린 이도원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라이터를 쥐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이은조의 손을 내리쳤다.
쾅! 소리와 함께 이은조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똑바로 들어.”
이도원이 얼굴을 바짝 가져가며 나직하게 말했다.
“내 돈 갖다 장난치면 내가 가만히 두겠냐? 너도 알잖아. 나 부모도 잡아먹은 새끼라는 거.”
“미, 미안하다.”
이은조가 손을 부여잡고 서둘러 봉투를 하나 더 꺼냈다.
이도원은 돈 봉투를 낚아채며 피식 웃었다.
“그러게 왜 구라를 쳐, 구라를. 인생 진실 되게 살란 말이야. 진실 되게.”
그는 영락없는 건달이었다.
유태일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오케이 컷.”
스태프들은 촬영하는 동안 숨이 턱 막혔다. 현장의 방음을 유지하기 위해 감탄을 뱉지도 못 했다. 이도원은 충분히 어려울 수 있는 성인 건달의 역할을, 그야말로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소화해낸 것이다.
이은조 역할의 배우가 이도원을 향해 박수를 쳤다.
“진짜 열일곱 살 맞냐? 와, 내 심장이 다 떨리네. 손은 괜찮아?”
그 말대로 이도원의 주먹이 부어있었다.
유태일 감독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테이블 쳤습니까?”
“저렇게 내 손 때렸음 뼈 부러졌죠.”
이은조가 엄살을 부리며 말했다.
“열정이 대단합니다. 탁자 보세요.”
테이블 한쪽이 부서져 있었다.
이도원의 주먹을 보며 스태프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어요?”
“병원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유태일 감독이 거들었다.
“그러다 촬영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손만 따거나 할 땐 어떻게 하려고요. 너무 경솔했습니다.”
이도원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오버했네요. 그래도 오늘 내로 얼음찜질만 하면 회복될 거예요. 제가 설마 손을 못 쓸 만큼 세게 내려쳤으려고요?”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 행동이 다소 과했더라도, 이도원의 열정은 촬영장의 활기를 지폈다. 피로와 싸우던 스태프들에게도 어느 정도 환기작용을 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촬영한 데이 씬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유태일 감독도 전날만큼 스케줄을 빡빡하게 운영하지 않았다. 나이트 씬은 돌아오는 월요일로 미룬 것이다.
“일요일은 차지은 배우님 데이 씬 촬영이 있을 겁니다. 이도원 배우님은 월요일 날 오시면 될 거예요. 촬영 장소랑 시간은 조감독한테 연락이 갈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이도원은 현장의 모든 인원에게 인사를 하고나서야 현장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