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크랭크 인 (crank in; 촬영개시) (9)
그 말을 들은 남학생은 이를 악물었다. 피하기 싫었지만 이도원은 외모부터 범상치 않았다. 말끔한 외모로 선하게 웃을 때는 몰랐는데, 인상을 찌푸리자 함부로 대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더불어 이도원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 체력단련으로 탄탄한 체격까지 갖추고 있었다.
유태일 감독은 그를 보며 다른 생각을 했다.
‘여러 역할을 소화할 수 있겠어.’
남학생의 객기는 유태일 감독에게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어리광이요, 재롱에 불과했다.
그때 조감독이 남학생의 팔을 끌어당겼다. 남학생은 실로 매단 연처럼 맥없이 끌려갔다. 조감독은 하루 종일 무거운 카메라나 조명, 마이크을 들며 1,2학년 시절을 보냈다. 게다가 군대까지 다녀온 조감독의 아귀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여기, 돈.”
조감독이 출연료로 오만 원 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넸다.
남학생은 얼굴을 붉힌 채로 별 수 없이 돈만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유태일 감독이 그 남학생과 함께 온 다른 남학생을 손짓해 불러서 물었다.
“둘이 친합니까?”
“아니요. 연기학원에서 만났는데, 안지 며칠 안됐어요.”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학생은 성향이 많이 달랐다. 둘은 오디션 때부터 그다지 친해보이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유태일 감독은 일찍이 집에 간 남학생의 성의 없는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다만 둘 중 반항아의 이미지를 가진 학생에게 대사를 주었을 뿐이다. 아니나다를까, 촬영 내내 툴툴대던 남학생은 예상 밖의 돌발행동을 보이고 집에 갔다. 유태일 감독은 피해를 끼친 남학생을 스크린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자신이 부른 학생에게 물었다.
“불평 안 하고 열심히 하던데. 촬영이 더 길어져서 힘들 테지만 그 남학생이 했던 역할을 한 번 해볼래요? 이 영화는 장편이고, 졸업 작품을 넘어서 영화제까지 출품을 할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남학생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침 동행한 친구 때문에 자신까지 찍히진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연기에 대한 욕심도 많았고, 연기도 열심히 했다. 집에 간 친구가 타고난 점들 때문에 연기를 더 잘한다는 평가를 받을 때마다 억울했다. 재능을 갖고도 노력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뒤집어졌다. 그런데 자신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한편 유태일 감독은 이도원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도원 배우님도 괜찮겠죠? 한 번 더 찍을 건데.”
‘이미 결정하고서 묻긴.’
이도원은 내심 웃었다.
물론 두말할 것 없이 괜찮았다.
“예. 당연하죠. 전 연기를 한다는 자체가 행복합니다.”
다소 낯간지러운 소리였지만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누구도 비웃지 못했다.
남학생은 이도원을 동경 어린 눈빛으로 보았다. 오늘 하루 촬영을 하면서 이도원에 대한 선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놀라운 연기력과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것도 멋졌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와 어울리지 않고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붙어 있었어. 그렇게 연기를 잘하면서도…….’
압도적인 연기력을 처음 봤을 땐 단순한 천재인 줄 알았는데 노력하는 천재였다.
남학생은 결연한 표정으로 유태일 감독과 이도원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롱테이크로 갑니다. 조명은 필라이트(fill light; 명암을 줄이고 어두운 영역의 디테일을 비춘다)로. 두 사람 그대로 연기 펼치고 액션 부분에선 카메라가 따라 움직일 겁니다. 편하게 연기하세요. 두 배우님들은 애드리브로 장면을 끌어가도 됩니다.”
카메라를 들고 움직이면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어려운 촬영 기법이었다.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지만 편집을 최소화할 수 있어 보다 자연스러운 연출이 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다른 구도나 부분적인 면은 따로 따야겠지만 롱테이크를 찍어두면 편집이 다양해진다.
이윽고 유태일 감독이 지시했다.
“카메라 롤.”
스크립터가 슬레이트를 내렸다.
유태일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레디- 액션!”
남학생은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돌변해서 툭 뱉었다.
“아… 씨발.”
그는 이도원을 삐딱하게 마주 보며 물었다.
“왜 우리한테 그래요? 상희 오빠면 다야? 존나 무서워서 동네 못 돌아다니겠네.”
짜릿한 느낌이 현장의 모든 인원을 강타했다.
‘이것 봐라?’
내심 놀란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사를 쳤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억울할 거야.”
그는 굳이 애드리브를 섞지 않았다. 남학생이 연기하기 편하게끔 앙상블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는 전과 똑같이,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좀 맞자.”
그 순간 손찌검이 이어졌다. 퍽 소리와 함께 남학생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그러나 남학생은 쓰러지는 대신 한 발 물러나며 비틀댔다. 그는 침을 퉤 뱉은 뒤, 기가 죽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이도원이 내심 감탄했다.
‘제법인데. 자연스러워.’
그는 애드리브를 살짝 섞었다.
“불만이 많나 보네? 너 선영이 동생이지?”
“…그런데요.”
남학생은 아킬레스건을 잡힌 듯 주춤거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뒷짐을 지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누나한텐 비밀로 해주세요.”
그때 유태일 감독이 연기를 끊었다.
“오케이 컷.”
그는 더 이상의 애브리브를 자르고 말했다.
“두 배우 연기는 좋았습니다. 딱 여기까지예요. 가혹한 이야기지만 좋은 조연과 단역은 자신의 역할까지 하는 겁니다. 가장 어려운 연기는 ‘가만히 있는 것’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죠. 영화 전체로 봤을 때 불필요한 씬이 커지거나 캐릭터가 목적 이상 의미를 뽐내게 되면, 상대적으로 주연이나 핵심적인 씬들의 비중이 떨어집니다. 이건 잔소리고,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이도원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과할 뻔했지. 욕심이 많은 녀석이야.’
남학생을 보며 짧게 단상한 이도원이 시선을 돌렸다. 유태일 감독은 배우의 연기욕심이 정도를 넘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하고 컷 사인을 보냈다.
‘혀를 내두를 만한 판단력.’
이도원은 놀란 심정을 내색하진 않았다.
유태일 감독이 두 사람과 모니터링을 하며 말했다.
“어차피 아까 집에 간 친구랑 체격이나 헤어스타일이 비슷하니까 잘 버무려서 편집하면 그림 나오겠군요. 생각보다 잘해준 덕분에 더 좋은 장면을 건졌습니다. 약속대로 아까 그 친구 대신 스크린에 얼굴이 나올 거예요.”
여러 구도에서 촬영이 끝난 학생들은 먼저 집으로 갔다. 한 번 사건이 있었기에 그 후로 반발하는 학생들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도원이 남았을 때까지, 함께 연기했던 남학생이 남았다. 그는 자신의 촬영 분이 끝났는데도 집에 가지 않은 것이다. 장시간 함께하며 말을 놓기로 했던 이도원이 마티니(martini; 그날의 마지막 씬)를 앞두고 물었다.
“왜 안 가?”
“네 연기, 마저 보고 가려고.”
과연 연기에 대한 욕심이 많은 친구였다.
이도원이 물었다.
“이름이 오준식이라고 했나?”
“응. 집에 가기 전에 번호 찍어줘.”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은 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볼 일이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