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33화 (33/178)

033/  크랭크 인 (crank in; 촬영개시) (8)

이도원은 또다시 뺨을 날렸다.

짝!

고개가 돌아간 남학생이 볼품없이 넘어졌다.

‘손은 더럽게 맵네!’

그는 정신이 아찔했다.

이도원은 그대로 차지은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가 잘못해서 친구들이 맞는 거야.”

“네가 뭔데 내 친구를 때려?”

차지은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경멸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이 처먹고 유치하게, 진짜.”

그녀는 성큼성큼 정자를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눈으로 쫓던 이도원이 남학생에게 손을 뻗었다. 시나리오에는 없던 행동이었다.

유태일 감독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설마?’

그는 스태프들에게 손을 저어 계속 찍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유태일 감독의 예감대로, 이도원은 연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일어나라.”

남학생은 이도원의 눈빛을 마주쳤다. 거역하기 힘든 강렬한 눈빛이었다. 눈빛만 봐도 이도원이 연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 예.”

남학생은 당황한 상태로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머지않아 적응하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이도원이 지갑을 꺼내 뒤적이더니 지폐 몇 장을 건넸다.

“너 선영이 동생이지? 상처가 난 것도 아니고, 부러진 것도 아니니까… 이거 받고 끝내자.”

“…예.”

카메라가 돈을 받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았다.

유태일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오케이 컷. 선영이는 누구야?”

그가 시익 웃으며 물었다.

스태프들도 한 마디 씩 했다.

“애드리브 좋았습니다!”

“잘 나왔어요!”

유태일 감독이 이어서 지시를 내렸다.

“이제 상희 친구 클로즈업해서 하나 따고 넘어갈게요. 각 인물들 클로즈업이랑 풀 샷, 미디엄 샷(MS; 인물의 허리 위를 잡는 샷)까지 몇 개 더 따고 오늘 촬영은 마치겠습니다. 듣기에는 간단해도 모두 끝내려면 새벽까지 이어질 테니까 한 명씩 따로 촬영할게요.”

그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밤 열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슬슬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지치고 허기질 시간이었다. 여러 구도에서 촬영을 하려면 새벽 3,4시는 넘어야 철수할 터였다.

“조감독. 야식 시켜놔.”

“예. 선배님. 치킨으로 가겠습니다.”

야식을 주문하는 동안 한숨 돌릴 시간이 났다. 배우들은 촬영장 한구석에 있는 음료수를 마시며 기다렸다. 모두들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유태일 감독이 격려했다.

“차지은 배우님부터 찍겠습니다. 스태프들과 차지은 배우님 먼저 위치해 주세요. 나머지 배우님들은 카메라에 안 걸리게 모두 조명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조금 더 힘내서 갑시다!”

그는 활기차게 말했다.

레디, 액션 신호도 더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머지 학생들은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구경을 했는데, 이도원만 모니터 옆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여기서 보니까, 확실히 능력 있는 스태프들이야.’

이도원은 모니터를 주시하며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유태일이 카메라 구도까지 섬세하게 지시 내리긴 했지만, 나머지는 온전히 스태프들의 능력이었다.

그때 차지은이 모니터 쪽으로 왔다.

“감독님. 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녀는 오늘 촬영 분량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차지은 배우님은 먼저 가셔도 좋습니다.”

유태일 감독의 허락이 떨어졌다.

차지은은 스태프들에게 인사하고 이도원에게 말했다.

“오빠, 먼저 가서 죄송해요.”

“집으로 가는 거야?”

“아뇨. 라디오 있어서…….”

“쉬러 가는 것도 아니네, 뭐.”

이도원은 빙긋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생이 많아. 아까 이동할 때 감독님한테 들었는데, 오늘 새벽부터 어린이 드라마 촬영하고 온 거라며?”

그 말을 하면서도 돈은 참 많이 벌겠지 싶었다. 그런 자신이 속물처럼 느껴진 이도원은 고개를 저으며 위로했다.

“정말 바쁘고 힘들겠구나.”

차지은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매일 하는 건데요, 뭘. 좋아서 하는 거고요. 그럼 가볼게요! 오빠, 그러다 모니터 속으로 빠질지도 몰라요.”

그녀는 꾸벅 인사하고 상희 친구 역의 학생들과도 작별했다. 그들은 단역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서로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차지은이 현장을 떠나기 무섭게, 유태일 감독이 불쑥 물었다.

“이도원 배우님이 마지막으로 촬영해도 될까요?”

상희 친구 역할의 단역들은 개런티가 적었다. 더구나 이번 촬영이 끝나면 다시 등장하는 씬도 없다.  그럼에도 꼼꼼한 촬영으로 많은 시간을 붙잡아 둔 것이다. 그들 모두 심신이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불만이 나올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을 한눈에 파악한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이죠.”

“촬영할 때 집중할 수 있도록 눈이라도 좀 붙여두세요.”

유태일 감독이 자가용 있는 쪽을 고갯짓 했지만 이도원은 사양했다.

“아닙니다. 구경하는 게 좋아요.”

몇 년 만에 돌아온 현장인지 모른다. 그는 깨기 싫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즐겁군.’

이도원은 행복감에 젖어 남몰래 웃었다.

만약 단역들이 그의 표정을 보았다면 실성했다고 여길 것이다. 단역들의 표정은 완전히 상반돼 지치고 짜증난 상태였다. 그들을 본 이도원은 새삼 차지은과 비교가 됐다.

‘생각해 보면 차지은도 정말 대단해.’

나이는 차지은이 더 어렸다. 그녀는 훨씬 험난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혹자는 그녀가 유명세를 얻은 만큼 대우를 받으니 그럴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도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불평하는 사람은 어딜 가든, 어떤 위치에 있든 불평을 하지. 일찍 시작한 사회경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차지은은 저들보다 훨씬 성숙하다. 얼굴만 예뻐서 그 자리까지 간 건 아니란 뜻.’

물론 상희 친구 역할의 단역 학생들이 보편적이었다. 그 나이다운 모습이었다. 다만 차지은이 나이에 비해 성숙할 따름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유태일 감독의 촬영지시가 이어졌고, 스태프들은 쉴 틈 없이 일을 했다. 그리고 결국 사고가 터졌다.

이도원에게 뺨을 맞았던 남학생이 무어라 이야기하더니, 집에 가려는 듯 가방을 메고 일어났다. 현장 분위기 때문이라도 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아 씨. 도저히 못 해먹겠다.”

그는 다른 남학생에게 말했다.

“네가 오자고 해서 왔더니 이게 뭐야? 출연료도 오늘 안 준다잖아!”

현장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모든 스태프들의 분노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유태일 감독은 팔짱을 끼고 사태를 관망했다. 그에게 다가온 스태프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출연료 주고 보내.”

유태일 감독은 관심을 끄며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현장에서는 늘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런 사소한 일로 일일이 신경을 썼다간 신경과민으로 미쳐버릴 것이다.

한편 이도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는 유태일 감독에게 말했다.

“제가 좋게 타일러 볼까요?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납득시켜주고 싶진 않군요. 이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저 학생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니까요. 어리광이 통하면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는 줄 알고, 모두 자신에게 맞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착각을 할 텐데… 받아주고 싶지 않습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남학생이 이도원에게 성큼성큼 걸어와 물었다.

“너, 아까 나 쳤냐?”

남학생은 심사가 단단히 꼬여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막장이었다. 간혹 현장에서 불만을 표하는 배우들이 있었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쳤다.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나 참… 너도 연기를 배우는 처지 같은데 배우란 말이 아깝다. 그리고 촬영은 진즉에 끝났어. 네가 그만 꺼져도 된다는 뜻이지.”

이도원은 웃는 낯을 하고 있었지만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인간이었고, 두 번째로 싫어하는 인간이 장난하듯 연기를 하는 부류였다.

이도원은 나직하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더 중요한 걸 알려줄까? 지금 하는 모든 촬영은 너희 분량을 늘려주기 위한, 너희를 위한 촬영이란 사실이다.”

그는 얼굴을 바짝 갖다 대며 물었다.

“한 대 더 맞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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