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크랭크 인 (crank in; 촬영개시) (6)
병원을 나왔을 땐 완연한 밤이었다.
의사 가운을 벗은 이윤식이 유태일 감독에게 말했다.
“유 감독님. 다음 촬영 때 뵙겠습니다.”
그는 이도원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오늘 수고했어요. 유 감독님 말씀대로 연기력은 정말이지… 내가 다 위축되더라고.”
“아닙니다. 잘 맞춰주신 덕분이죠."
이도원이 겸연쩍게 웃었다. 예의상 뱉은 말이 아니었다. 진심이 담긴 대답이었다. 이윤식이나 되니까 이도원이 편하게 연기를 해도 받아줄 수 있었던 것이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그는 투수가 어떤 마구를 던져도 모두 받아내는 포수 같은 존재였다.
“하하. 연기만 잘하는 게 아니고 성격도 좋군!”
이윤식은 촬영이 끝나자 후련하게 말하며 현장을 떠났다.
유태일 감독과 조감독, 이도원은 다시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한 아파트 단지의 정자였다.
이도원을 보며 유태일 감독이 주의를 줬다.
“이제부터 이윤식 선배와 연기할 때와는 많이 다를 겁니다. 이윤식 선배는 이도원 배우님의 호흡에 맞춰주는 쪽이었지만, 이번에는 이도원 배우님이 맞춰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 촬영할 장면은 상희 역의 차지은만 생각해서도 안 되는 씬이었다. 상희 친구로 나오는 단역들과도 호흡을 맞춰야 했다.
“뺨을 때리는 장면이 있는 건 아시죠? 이번에 엔지 내면 욕 좀 얻어먹을 겁니다.”
“네.”
이도원이 대답했다.
촬영장소에는 차지은이 타고 다니는 벤이 주차되어 있었다. 그녀의 매니저가 유태일 감독에게 인사했다.
“지난번에 한 번 인사드렸었는데, 또 뵙습니다. 아시다시피 지은이가 스케줄이 많아서 두 시간 밖에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진행해 주세요, 감독님.”
매니저의 태도는 정중하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태일 감독은 예의를 갖추어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는 차지은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준비되는 대로 바로 촬영 들어갈 테니 차지은 배우님도 준비해 주세요. 상희 친구들도 준비해 주십시오.”
상희 친구들은 모두 이도원 또래였다. 하지만 그들은 특수 분장을 해서 스물일곱 살로 꾸민 이도원의 나이를 짐작하지 못했다. 오로지 안면이 있는 차지은만 깔깔 웃으며 그를 놀렸다.
“오빠. 완전 큰오빠 다 됐네요!”
교복을 입은 차지은은 더 할 나위 없이 예뻤다. 이도원 조차 순간적으로 설렐 만큼 풋풋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챙긴 그는 특수 분장한 얼굴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투덜댔다.
“이거 느낌이 엄청 불편해.”
“여자들은 화장하면 항상 그런 느낌을 달고 살거든요. 예뻐 보이려고. 여자한테 잘해야겠죠?”
“그래, 그러네.”
이도원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내 모든 스태프들이 촬영 장비를 세팅했다.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차지은과 상희 친구들 역할의 남녀 학생들 넷이 정자 곳곳에 앉고 서서 위치했다. 또한 정자 한구석에 오토바이 두 대를 세워놔서 분위기를 살렸다.
차지은은 손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함께 웃고 떠드는 연기를 해야했다.
이도원은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었다. 그가 등장하며 차지은의 손에 들린 담배를 보고 친구들을 혼내는 장면이었다.
유태일 감독이 촬영 개시를 알렸다.
“상태가 다가가는 장면, 와이드 샷(WS; 배경을 포함해 광범위하게 잡는 샷)으로 갑니다. 카메라 롤-.”
조명이 켜지고 카메라가 돌아갔다.
스크립터가 슬레이트를 치며 말했다.
“씬 넘버 7의 1. 테이크 원!”
촬영장이 조용해지자 유태일 감독이 크게 신호를 보냈다.
“배우들 레디-. 액션!”
차지은과 상희 친구들이 깔깔거리며 시끌벅적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중 욕이 반이었다.
멀리 떨어진 이도원이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그때 웃고 떠들던 아이들의 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컷. 엔지.”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상희 친구들, 대사 끊이지 않게 실제로 대화할 소재를 정해요. 불량한 걸로.”
그들이 작전회의를 했다.
잠시 후 상희 역의 차지은이 외쳤다.
“됐어요! 감독님!”
고개를 끄덕인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카메라 롤.”
스크립터가 슬레이트의 테이크 숫자를 2로 바꾸었다.
“씬 넘버 7의 1, 테이크 2.”
마침내 유태일 감독이 외쳤다.
“레디, 액션!”
이도원이 할 연기는 간단했다. 학생들에게로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감정을 드러내는 섬세한 몸동작을 가미했다.
잠시 멈춰 서있던 이도원이 고등학교도 중퇴한 노가다 꾼, 상태 역에 어울리도록 껄렁대는 발걸음을 보였다. 그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중간에 점차 속도를 줄이더니 상희가 보일 정도 거리부터 걸음이 빨라졌다.
그 모습이 정자 밑으로 사라질 때쯤 유태일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오케이 컷!”
그는 말을 이었다.
“다음은 미디엄 샷(MS; 인물의 허리 위를 잡는 샷)으로 상희랑 친구들 가겠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웨이스트 샷으로도 불리는 이 촬영 기법은 두 사람 이상이 대화할 때 주로 사용되는 기법이었다.
이도원이 빠지고 상희 역의 차지은과 상희 친구들이 연기를 했다.
“야, 저기 상희 오빠 아니야?”
한 여학생의 물음에 그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몰렸다.
상희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 짜증나네. 얘들아. 나 집에 들어가야겠다.”
전에 없이 거친 말투였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다른 애들보단 잘해.’
상희 친구 중 남학생이 껄렁대며 말했다.
“오빠면 대수야? 놀다 간다고 그래~”
다른 남학생이 그를 툭툭 건들며 고개를 저었다.
“야, 상희 오빠 몰라? 우리 누나가 말해줬는데, 옛날에 졸라 무서운 형이었대.”
“어쩌라고. 꼰대 새끼.”
껄렁대던 남학생은 굽히지 않았다.
“어, 안녕하세요!”
상희 친구들이 한쪽으로 인사를 했다.
차지은만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노려보다가 물었다.
“완전 열받은 표정이네? 어쩌라고?”
그녀는 들고 있던 담배를 부러뜨렸다.
“오케이, 컷!”
유태일 감독이 자르고 말했다.
“미디엄 클로즈업(MS; 인물의 가슴이나 어깨 위를 잡는 샷)으로 상희 표정 따고, 담배 부러뜨리는 부분은 손만 따로 찍겠습니다.”
촬영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차지은 부분이 모두 끝나자 유태일 감독은 이도원을 보며 말했다.
“상태 씬 들어갑니다.”
이도원이 아이들이 바라보던 곳에 섰다.
“자, 풀 샷(인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프라임 안에 담은 샷)- 카메라 롤.”
풀 샷은 대부분 인물이 출입하거나 대화하며 걷는 장면을 찍을 때 사용하는 촬영 기법이었다.
유태일 감독은 모니터를 통해 카메라 구도를 확인하고 말했다.
“레디, 액션!”
신호에 따라 이도원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비행을 저지르는 동생을 마주한 실망감과 더불어 분노가 치솟았다.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는 차마 동생 상희에게 분을 풀지 못했다.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상희였다. 그는 상희에게 화를 내는 대신 상희 친구들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니들은 뭐야?”
카메라가 잡히지 않는 곳에서 껄렁한 남학생을 연기했던 학생이 대본을 보며 대사를 쳐주었다.
“아니, 왜 우리한테 그래요~ 아, 졸라 짜증 나네.”
이도원은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억울할 거야.”
그가 고개를 들어 서늘한 눈빛으로 남학생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 닫아두었던 말문이 열렸다.
“근데 좀 맞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