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크랭크 인 (crank in; 촬영개시) (4)
다음 날 이도원은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내내 마음이 붕 떠있었다.
그동안 어렵사리 마음을 다잡았었지만 막상 촬영 당일이 되자 학교생활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가방 안에는 두툼한 대본과, 이십 대 중반 역할을 소화하며 입을 사복 두 벌이 들어있었다.
점심시간, 박서진이 이도원의 반으로 놀러 와서 물었다.
“너 영화촬영 간다며? 언니한테 들었어. 그나저나 드라마 오디션 떨어지고 낙심했을 텐데 정말 잘 됐다.”
그녀는 이도원이 고사했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항상 되도 않게 놀려대고는 했다. 그때마다 이도원은 모른 척 박서진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아버님께는 감사하다고 전했지?”
“당연하지. 언제 전했는데! 근데 무슨 영화야?”
“그냥 대학생 작품이야.”
이도원은 구구절절 설명하기 귀찮아서 둘러댔다.
박서진은 옆자리에 다리를 꼬고 읹아,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바라봤다. 마치 범인을 색출해내려는 탐정의 시선이었다.
“설마 여배우와 키스신이 있다거나…….”
꼬치꼬치 캐물으려고 하나, 순간 긴장했던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난 또 뭐라고.’
박서진이 말을 이었다.
“포옹한다거나…….”
그녀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런 쓸데없는 장면이라도 있으면 죽어!”
이어진 한 마디에 이도원은 웃어버렸다.
‘지가 뭐라고 마누라 노릇이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해할 수 있는 범위였다. 박서진은 아직 그를 좋아하고 있었고, 질투심을 드러내며 간섭할 만큼은 친했다.
*
학교가 파하자 이도원은 중영대학교로 갔다.
오늘 촬영은 중대병원 복도에서 의사를 협박하는 실내 씬 하나, 이도원이 담배를 피우려는 차지은과 친구들 무리를 발견하고 혼을 내면서 갈등이 불거지는 나이트 씬 하나였다. 이 중 병원 씬에서는 차지은이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차지은은 해가 완전히 지면, 7시까지 현장에 오기로 되어있었다.
이도원이 도착했을 땐 촬영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트럭에 장비를 싣고 있었다. 대부분이 1,2학년 학생들이었고 3, 4학년은 장비 점검을 했다.
유태일은 이도원에게 다가왔다.
“스태프들이 준비할 동안 배우님은 대본을 보고 있으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모든 스태프들이 움직이는 가운데 혼자 대본만 보고 있는 건 다소 민망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촬영장은 모두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한다. 그래야만 빨리 진행이 되고, 이 점에 대해서 누구도 불만을 품지 않는다.
이는 이도원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장소 섭외는 어떻게 했지?’
대학병원은 환자들의 불편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웬만하면 장소 섭외에 응해주지 않는 곳이었다. 물론 상업 드라마나 영화라면 가능하겠지만 학생 졸업 작품에 흔쾌히 응해주었을 리 만무했다. 장소 섭외는 대부분 제작부나 조감독이 하지만, 어쨌든 총괄은 감독의 몫이었다.
이도원은 새삼스레 대본을 훑어보며 감탄했다.
‘제작비가 적잖게 들어갔을 것 같은데. 제작사나 학교에서 투자라도 받았나?’
대부분의 영화과는 학생들의 처우가 열악했다. 간혹 사비를 털어 제작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장비도 교대로 쓰기 때문에 기한 내 촬영을 마치려면 며칠 밤을 지새가며 촬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도원은 장비를 대부분 실은 뒤 점검하는 영화과 1, 2학년들을 보며 마음이 짠했다. 타임 슬립 전 연기과를 재학하던 시절 1, 2학년, 무려 2년 동안이나 무대에 서보지도 못하고 무대 스태프로 참여했던 경험이 떠오른 것이다.
‘그땐 내가 뭐하고 있나 매번 생각했지. 결국 다 도움이 되었지만.’
이도원은 쓰게 웃었다.
영화과 1, 2학년의 애로 사항은 그뿐이 아니었다. 1, 2학년 작품은 선배들의 졸업 작품 등에 밀려 쪽 시간에 촬영을 진행했고, 그 와중에 선배들 작품까지 도와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눈에는 불타는 열정이 있었다. 그야말로 좋지 않으면 못 할 짓이다.
트럭이 출발하자 스태프 하나가 말했다.
“이도원 배우님! 차에 타시면 됩니다.”
이도원은 몇 대 없는 자가용에 탔다. 유태일 감독과 조감독이 뒤따라 차에 타며 에어컨을 틀었다. 6월 말인데도 벌써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1, 2학년들은 십오 분 거리를 걸어서 이동한 뒤 중대병원에 장비를 세팅해놔야 했다.
뒷좌석에서 운전자석 헤드레스트를 껴안고 있던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조감독, 콘티.”
운전자석에 앉은 조감독이 보조석의 이도원에게 콘티를 주었다. 오늘 촬영할 장면을 보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한 콘티를 받은 그는 동선을 떠올려보았다.
“의사 역할은 누구죠?”
“도원 배우님 보다 무려 열두 살 형입니다. 얼굴 보면 알 거예요. 영화에서 단역으로 종종 출연했던 분이니까. 연극 판에서도 십 년 이상 계셨고, 실력도 남다릅니다.”
대답한 유태일 감독이 손을 뻗어 콘티를 짚으며 설명했다.
“촬영을 시작하면 바로 알겠지만 우리는 콘티대로 한 장면을 여러 구도에서 딸 겁니다. 이 상황에선 도원 배우님을, 그리고 다음에는 의사를 찍겠죠. 찍는 순서나 카메라 구도는 콘티대로입니다.”
그는 주의사항을 말했다.
“테이크(take; 특정 화면을 담아낸 단위)는 레디, 액션! 하는 순간부터 컷하는 순간까지입니다. 이 테이크가 길어지면 촬영에 지장을 줄 수 있어요. 상대 배우를 찍을 때 카메라에 걸리거나, 오디오에 소리가 묻거나 하면 안 되죠. 작은 사물이나 침 삼키는 소리도 잡아낼 수 있을 만큼 아주 민감한 부분이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연기는 잘했는데 이런 부분들 때문에 엔지가 나면 안타까우니까요.”
이도원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유태일 감독은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그 외의 것들도 촬영을 하다 보면 차차 알게 될 겁니다. 그럼 이제 현장으로 이동해 보죠.”
조감독이 차 시동을 걸었다. 자동차 엔진 소리에 따라, 이도원의 심장도 뛰기 시작했다.
*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촬영 준비가 갖춰진 상태였다.
유태일은 닥터 가운을 입은 아버지뻘 의사와 매우 가까운 사이인 듯 무어라 대화를 나누었다.
‘무슨 관계지? 저 정도면 과장이나 병원장 급 의사 같은데.’
잠시 궁금증이 들었지만 이도원은 신경을 끄고 대본과 콘티 연구에 열중했다.
복도에는 촬영장소로 바로 온 의사 역할의 조연이 동선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가 맡은 배역은 오민식이란 의사로, 극중 최고의 흉부 외과의였다. 나이는 삼십 대 중후반으로 짐작됐으며 의사 역할에 잘 어울리는 지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는 유태일 감독을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유 감독님! 이 친구가 전에 말한 그 친굽니까?”
두 사람은 술 한 잔 나눈 적이 있는 듯 친근했다.
“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쪽은 이윤식 배우님. 그리고 이쪽은 제가 말한 이도원 배우님입니다.”
이도원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는 이윤식이란 배우를 훔쳐보았다. 유태일 감독의 말대로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유명한 연극배우로 출발한 그는 이십 년 뒤 훌륭한 명품조연으로 거듭난다.
이윤식이 답했다.
“반갑습니다. 유 감독님이 어찌나 칭찬하던지. 입에 침이 다 마르겠더라고.”
“선배님도.”
유태일이 눈치를 주자 이윤식이 껄껄 웃었다.
그들이 서로 통성명을 하는 사이 비상구와 이어진 계단의 조명 배치가 끝났다.
유태일은 자신의 자리로 가서 모니터를 보며 카메라 위치를 확인하고 말했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그 말에 따라 특수 분장을 마친 이도원과 의사 가운을 입은 이윤식이 복도 끝에 마주 섰다.
그들을 확인한 유태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조용해주세요. 카메라 롤(roll camera; 카메라 작동 명령어)-.”
카메라가 잡지 않는 곳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스크립터가 배우들 사이로 슬레이트를 쳤다.
“씬 넘버 21의 1, 테이크 원!”
그가 씬 넘버, 컷 넘버, 테이크 횟수를 나란히 부르자 촬영장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유태일이 말했다.
“배우들 레디.”
이윤식이 이도원을 보았다. 이도원이 이윤식을 보았다.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로 이미 대본 속 상황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배우들 눈동자로 감정이 서렸다.
그 빈틈없는 분위기를 유태일의 음성이 아울렀다.
“액션!”
짧고 낮은 어조의 명령이었다.
잇따라 카메라, 조명, 오디오가 두 배우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