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크랭크 인 (crank in; 촬영개시) (3)
이상백이 말했다.
“결론, 성대는 횡격막 아래 있다고 상상해라.”
이도원은 받아 적었다.
“명심해야 할 점은 사람은 누구나 갓난아기 때 복식호흡을 한다는 거야. 아기 목소리가 큰 것도, 우리가 누워있으면 저절로 배로 호흡을 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하지만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편리하게 숨을 쉬는 법을 저절로 깨우치고 가슴까지만 들이쉬게 되는 거지.”
이상백의 말은 대부분 타임 슬립 전, 이도원이 대학교 시절 배운 것들이었다. 반면 시간이 지나면서 잊고 있던 부분들이기도 했다.
이상백은 검지를 곧게 펴며 말을 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여덟 잔 이상 미지근한 물을 마셔라. 그리고 언제나 일상에서도 어깨, 목, 턱 등의 힘을 빼고 말해라. 연기를 할 때도 네가 가지고 있는 음역 내에서만 자연스러운 소리를 내라. 단 하루도 화술 훈련을 게을리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대답한 이도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소리를 잃은 지 너무 오래됐어. 하지만 내가 김진우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화술뿐일까?’
혼자 고민해도 나오지 않는 답이었다.
“교수님. 제가 예술제에서 봤던 연기자의 동영상이 있는데, 한 번 봐주시겠어요?”
“누차 말했지만 남을 의식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래도 궁금하긴 하구나.”
이도원은 휴대폰으로 <방송, 영화, 드라마 대본 커뮤니티> 카페에 접속해 일전 보았던 동영상을 재생했다. 다시 봐도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연기력이었다. 하지만 그를 모두 감상한 이상백의 의견은 달랐다.
“난 네 연기가 더 좋은데?”
이도원이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이 학생은 너보다 기본기가 안정적이구나. 더불어 감정을 이끌어내는 법도 잘 알고 있고. 하지만 너무 완벽해. 그런 완전무결함은 배우의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연기적인 단점이 될 수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관객들로부터 박수를 이끌어낼 수는 있겠지. 하지만 관객의 상상력을 제한해버릴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연기하는 캐릭터를 너무 정형화시켜서 자연스러움을 잃을 수 있다. 하지만 좋은 연기는 인물을 정형화시키는 게 아니야. 같은 인물을 갖고도 배우들은 서로 다른 해석과 연기를 펼쳐야 한다. 관객은 완벽한 희곡 속 인물 보다, 참신한 해석이 뒷받침 된 인물을 원해.”
이상백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화술은 단순히 어휘의 나열이 아니다. 어휘를 발화하는 원동력인 호흡, 발성, 그리고 배우 개인의 성격적 기질, 연기관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지. 그 배우를 구성하고 있는 호흡, 발성, 성격적 기질이 저마다 다르다는 뜻이야. 배우마다 기질에 따라 말의 템포, 어조, 말투 등이 다르듯이. 넌 그런 면에서 더 편한 느낌을 준다.”
그는 이도원의 어깨를 잡았다.
“네가 이 학생과 어떤 사연이 있어서 그렇게까지 과대평가를 하고 의식하는지 모르겠지만 넌 네 길을 가라. 그게 네가 찾는 해답이야.”
*
집에 온 이도원은 생각에 잠겼다.
‘꼭 이겨야 할 이유.’
분명 있었다.
이번 생애 김진우한테 밀리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참을 수 없을 터였다. 복수심은 그에게 경쟁심 이상의 집착을 불러왔다.
‘집착하다 보니 상대가 더 커 보였다.’
이도원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건 김진우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김진우가 이도원에게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인 건 맞지만, 현재로선 일방적인 관계일 뿐이었다. 그를 경계하고 그의 실력에 감탄할 시간에 한 뼘이라도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이도원은 후일 김진우를 다시 만났을 때 그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조급해하는 것보다,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출발 지점에 섰을 뿐이고,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장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멀리 내다보자.’
생각한 이도원이 긴 한숨을 뱉으며 넣어 두었던 대본을 꺼냈다. 그는 자신이 맡은 배역, ‘상태’의 대사를 보았다.
크랭크 인 날짜까지 삼 일이 남아있었다. 고작 삼 일 동안 상태란 인물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기간에 이해한 것이 촬영이 진행되는 두세 달의 시간 동안 일관되게 이어져야 한다. 중간에 바뀌어서 다른 느낌을 주면 영화 전체가 부자연스러워질 수 있었다.
영화촬영은 러닝타임 순서대로 찍지 않기에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영화는 예산을 최소화 하고 신속하게 촬영할 수 있는 순으로 제작된다. 따라서 배우는 두세 달의 촬영기간 동안 매번 촬영 때마다 같은 느낌으로 몰입해야 한다.
반면 연극은 사건들이 순서대로 진행된다. 자연스레 배우의 감정이 사건을 따라간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만 지나면 막을 내린다.
‘소리를 잃고 항상 무대에만 섰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얼마 만인지.’
이도원은 촬영과 무대의 차이점에 대해 두려움 보다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매일 같이 마음속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타임 슬립한 뒤 이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체력단련과 화술훈련을 해왔다. 그건 대회나 오디션이 있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이젠 이상백의 노하우까지 전수받고 있다.
이도원은 샤워를 하며 유태일 감독의 <가제: 우리>의 ‘상태’ 대사를 노래 부르듯이 외쳐댔다. 화장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통에 누나 이다원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아 좀! 조용히 좀 해!”
“얘는! 방문을 닫으면 되잖아?”
어머니는 이도원의 편을 들었다.
이다원으로서는 뿔이 날 수밖에.
“엄만! 왜 쟤 편만 들어요?”
“네 동생한테 연기하는 걸로 뭐라고 하는 건 너 공부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거랑 같아!”
“난 피해를 안 주고 쟨 피해를 주잖아요. 하여간 누가 아들 사랑 나라사랑 아니랄까 봐~ 모자가 한통속이야.”
“너……!”
이다원이 방문을 쾅 닫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엄마한테 버릇없이.’
이도원은 씻던 중 울컥했지만 무어라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소중한 것이다.
대신 자신이 대사를 멈추는 쪽을 선택했다. 그는 다 씻고 추리닝을 입은 후 현관에 서서 말했다.
“나갔다 올게요.”
“이 시간에 어디 가? 밤에 검은 옷 입었다가 사고 날라. 얼마 전 신문에, 검은 옷을 입은 보행자를 운전자가 못 보고 치었다더라.”
전생에서는 귀 기울이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이런 소소한 걱정이 싫지 않았다.
“회색 입고 가죠, 뭐.”
그는 회색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말했다.
“동네 산책 좀 하고 오려고요. 내일부터 촬영이라 머리도 복잡하고요.”
“네 누나가 뭐라고 해서 나가는 거니?”
“아녜요.”
이도원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 문밖으로 나섰다. 상쾌한 밤공기가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이십 년 전으로 돌아와 맡아보는 바람 냄새가 마음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어찌 됐든 난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다.’
이도원은 마음이 벅찼다. 그는 되살아난 뒤 한동안 공중에 붕 뜬 기분이었다.
다음 날 깨어나면 다시 죽음의 순간이 펼쳐질까 봐 불안해하며 잠들었고, 아침마다 눈을 뜰 때면 어제 잠들었던 그곳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매 순간이 소중했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현재 행복하고, 이 행복을 잃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바람에 기인해 있었다.
이도원은 기지개를 펴듯 양팔을 활짝 벌리고 폐부 깊숙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매연 범벅인 서울 공기가 이렇게 달콤하다니.”
이도원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공사가 중단된 부지의 컨테이너 박스로 향했다. 그가 지금까지 드나들던 연습실 같은 곳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그렇게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낸 뒤, 마침내 촬영 날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