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랭크 인 (crank in; 촬영개시) (2)
이도원은 하굣길에 한국예술대학교 연극원의 연기과 학과장실로 갔다.
이상백은 그가 도착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빈 강의실로 가자.”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201호 강의실로 들어갔다.
이상백이 자리에 앉더니 말했다.
“독백은 뭐로 준비했지?”
“이번에 영화에 섭외된 역할입니다. 이십 대 중반 남성이며 여동생이 심장병을 앓고 있습니다. 제가 할 대목은 궁지에 몰린 주인공이 사정하다가 통하지 않자, 병원에서 의사를 협박하는 장면입니다.”
“한 번 보자고.”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뗐다.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꼭 갚겠습니다. 선생님! 도와주십시오.”
그는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 많은 환자들 중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사람을 살리는 일 아닙니까?”
이도원의 머릿속에 눈앞에 있는 의사가 떠올랐다.
흐릿하게 생겨난 형상이 말했다.
-제게 말씀하지 마시고 원무과에 말씀해 보시죠. 여기서 이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의사를 쫓아가며 말하던 이도원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의사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 어깨를 잡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동생이 입원하는 동안만이라도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의사가 미심쩍인 얼굴로 물었다.
-그게 뭡니까?
“잠시… 이쪽으로 오시죠.”
이도원은 반강제로 의사를 끌어당기며 강의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다른 장소로 들어왔다는 걸 표현한 그는 재차 부탁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부탁합니다. 제발… 다시 한 번만 재고해 주십시오.”
-미안하지만 원무과에 이야기하시오. 난 권한이 없다니까요.
이도원의 호흡이 빨라졌다. 극도로 흥분한 그는 숨을 들이쉬며 입을 앙다물고, 의사를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팔꿈치로 의사의 가슴을 누르며 몹시 흥분한 상태로 으르렁거렸다.
“난 당신에게 분명 기회를 줬어. 마지막 부탁이라고 했지? 이제 더는 부탁하지 않아.”
이도원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의사가 당황했다.
-이거 왜 이러시오? 이거 놔요!
이도원이 대답 대신 허리춤에 숨겨둔 칼을 더듬으며 꺼낸 뒤 의사의 아랫배로 가져다댔다.
“이젠 명령이야.”
-이식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의사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중격결손은 심장이식 밖에 방법이 없다고 했어. 내가 그 정도도 안 알아보고 왔을 것 같아?”
-보험이나, 여러 복지정책들이 있소. 좀 진정하고…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당신이 감옥에 가면 동생은 누가 돌봅니까?
이도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닥쳐. 내가 모를 줄 알아? 뒷돈을 받고 심장이식 대기자 명단 일 순위였던 내 동생 보다 먼저 다른 놈에게 심장을 줬어. 그전에 뻔뻔하게 노골적으로 내게 돈을 요구해놓고 내가 두 손 놓고 당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경찰에 신고를 하세요! 나한테 이러지 말고!
의사가 언성을 높이자 이도원은 칼끝을 밀었다.
위협을 느낀 의사가 입을 닫았고, 이도원이 말했다.
“닥치고 있어. 죽고 싶지 않으면.”
그는 한 손으로 문을 잠그며 말을 이었다.
“경찰도 방송국도 증거가 없다고 묵살하더군. 돈을 구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어. 내 동생을 위해서라면 당신을 죽일 수 있다.”
이도원은 의사의 가운을 뒤져 휴대폰을 꺼낸 뒤 의사에게 말했다.
“신고해.”
-뭐요?
“신고하라고.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릴 테니까.”
-미쳤군!
소리치던 의사의 형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도원은 독백을 끝내고 눈앞에 앉아있는 이상백 교수를 보았다.
이상백은 눈앞에 협박 받는 의사가 그려지는 듯했다. 이도원의 몸동작은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심지어 혼자 연기를 하는데도 눈앞에 상대역이 있는 듯, 연기 호흡을 주고 받는 느낌 마저 들었다.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지?’
수 년 경력이 있는 마임 배우들도 쉽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연기는 흠잡을 데 없었다.”
이상백은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호흡이 얕아. 대사를 말할 때 어깨가 움직이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해부학적으로 말하면 후두부에 긴장을 줘서 발성을 어렵게 하고, 턱뼈와 혀에까지 영향을 끼쳐서 발음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물론 일반인보단 낫지만 아직 부족하단 뜻이지.”
이도원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까지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연기적인 기교들로 관객의 눈을 가렸다. 감정을 끌어올려 극적인 감정을 내뿜는다고 해도, 부실한 기본기로 관객에게 최대치가 전해지지 않았다. 만약 호흡, 발성, 발음 단계의 화술이 탄탄했다면 김진우처럼 최대의 감정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점을 간파한 이상백이 말했다.
“너는 기본기가 완성되면 훌륭한 연기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기본기의 완성이란 건, 배우마다 다른 개념과 훈련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마다 다르게 완성된다. 워낙 학설들이 다양해서 이렇다 정의할 수 없는 건데… 내가 너에게 가르쳐줄 화술은 조금 색다르다. 추상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인체해부학적으로 접근했다고 이해하면 될 거야.”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배우는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할수록 연기력이 향상된다.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지. 신체와 감정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통제하고 표현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건 결국 신체이고, 그러려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도원은 이상백의 말을 들을수록 흥분됐다.
타임 슬립 전에는 이미 대학교에서 배운 방법대로 버릇이 들어있었고 바꿀 수 없었다. 또한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에 화술에 대한 부분이 크게 필요치 않았다. 따라서 이상백은 그에게 화술보다 움직임에 대한 부분을 가르쳐주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도원은 이상백에게 연기의 기초부터 배우고 있는 것이다.
예상대로 이상백의 이론은 놀라웠다.
‘연기를 해부학적으로 접근하다니.’
놀란 표정을 보며 이상백이 말했다.
“이를테면 복식호흡. 우린 복식이라고 해서 단전까지 호흡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호흡은 절대 횡격막 아래로 내려가지 못해. 즉, 정확히 말하면 폐까지 밖에 못 내려가는 거지. 다만 상상하는 거다. 호흡을 횡격막까지 끌어내리기 위해 배까지 당긴다고 생각하는 거지. 때로는 의식이 호흡을 지배한다는 소리다.”
그는 깊고 안정적인 호흡을 말하고 있었다.
“이런 통제가 자연스럽게 습득되어야 해. 수동적인 호흡훈련은 정작 호흡을 소리에 연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잠시만요.”
이도원은 손을 들어 강의를 중단시킨 뒤 가방으로 다가가 수첩과 펜을 꺼냈다.
“예.”
그 말에 이상백이 말을 이어갔다.
“들숨을 통해 영감을 얻고 날숨을 통해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이때 날숨은 가능한 고르고 길게 유지해야 한다. 이건 발성훈련의 기초가 돼. 배우가 자신의 공기를 조금의 낭비도 없이 모두 소리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지.”
이도원은 정신이 아찔했다. 이상백은 분명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훈련법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인간에게 내재된 능력을 끌어올리는 연기의 기본기는 언제나 원초적인 설렘을 안겨준다.
‘벽을 허물어야 한다.’
무술에서 경지를 허무는 일, 공부에서 한계점의 성적을 뛰어넘는 일,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는 일, 일상에서 자기 자신의 틀을 깨고 진일보하여 성숙하는 일과 같은 맥락의 과정이었다.
“나 자신을 이기는 일.”
이도원은 상념에 빠져 중얼거렸다.
그를 보는 이상백의 눈이 흡족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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