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랭크 인 (crank in; 촬영개시) (1)
이상백은 한국예술대학교 학과장실에서 이도원을 환영해주었다.
다행히 저녁이 다 된 시간이었기에 강의가 없었다.
“미리 전화하고 오지 그랬냐.”
그 말에 이도원은 머쓱하게 웃었다.
“집이 가까워서 산책할 겸 들렸습니다.”
이상백은 그를 빤히 보더니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것도 있는 것 같은데? 눈에 불씨가 들어있어.”
‘누가 감독님 아니랄까봐, 표현력은 여전하시네요.’
이도원은 내심 생각하며 입 밖으로 본론을 꺼냈다.
“연기적인 조언을 얻고 싶습니다.”
“내 강의를 듣고자 우리 학교에 들어오는 학생들도 있는데 너무 뻔뻔한 거 아니냐?”
“뇌물을 좀 가져왔는데요.”
이도원은 자판기에서 뽑은 캔 커피를 올려두며 시익 웃었다.
그 능청스러움에 고개를 저은 이상백이 말했다.
“너 정도면 고등학생 중에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다. 그런데 뭐가 더 궁금해서?”
“연기는 끝이 없죠. 실은 얼마 전 영화에 섭외가 됐고, 고등학교 예술제에서 저보다 뛰어난 연기자를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예술제에서?”
이상백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우리 학교로 스카우트하면 좋겠군. 어쨌든… 영화 섭외가 들어온 건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예술제에서 충격받은 것도 있고, 촬영 전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교수님.”
“으음. 굳이 남을 신경 쓰는 건 배우로서 좋지 않은데. 모든 예술은 그 자신이 최고여야 하고, 경쟁자는 자기 자신으로 족하다.”
“꼭 넘어야 할 산입니다. 제게는 그 상대를 이겨야 할 이유가 명백합니다.”
“잘하려고 하면 망치는 법이다.”
“그 마음을 원동력으로 만들어주십시오.”
이도원의 눈빛을 마주한 이상백은 기이한 느낌을 받고 물었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절대적인 믿음을 보이는 이유가 뭐냐? 심지어 내 학생들도 나한테 불만은 있는데. 넌 어떤 가르침도 감사히 받아들이겠다는 태세야.”
“교수님은 심사평 몇 마디로 제게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진지한 표정을 바라보던 이상백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보면 볼수록 웃기는 녀석이로군. 오늘은 내가 저녁 약속이 있으니 내일부터 학교가 파하는 대로 이곳에 오너라. 일단 먼저 연기를 봐야겠지? 내일은 네가 좋아하는 독백을 하나 골라서 준비해봐.”
“예, 감사합니다.”
“넌 정말 특이한 녀석이다.”
이상백은 캔 커피를 따서 한 모금 들이켰다.
이도원은 그를 보며 내심 짠했다.
‘한 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란 말이 현실이 됐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살짝 고개를 숙였다.
*
이상백은 지인과의 저녁약속에 나갔다. 그곳에는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단구의 노신사가 앉아있었다.
작은 키와 다부진 체격을 가진 노인이 깊은 눈빛으로 이상백을 바라봤다.
“반갑소. 이 감독.”
“연락받고 의외였습니다.”
이상백이 맞은편에 앉으며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그는 능숙하게 메뉴를 주문한 뒤 말했다.
“회장님께서 답신을 해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옛적에는 이 감독과 종종 함께 영화를 보고는 했지요.”
노인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이 감독이 프로덕션을 만들어 주시오. 내 평생 영화제작을 하는 것이 꿈이었으나 이루지 못했지. 그 와중에 적임자를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럴 기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젊어서는 영화도 다수 찍었지만 한 번도 흥행을 못 했습니다. 좋게 말하면 예술적인 고집 때문이고, 요즘 아이들 말로는 고지식한 거겠지요.”
“그건 관계없소. 나는 이 감독의 꿈을 후원하겠다는 말이니까. 내 꿈도 이 감독의 꿈에 편승하고자 하는 것이오.”
“저는 좋은 배우들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화 제작사 겸 배우 양성을 함께 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실질적으로 큰돈이 드는 일입니다. 저는 대학 교수직에 오래 머물렀고, 고인 물이 썩듯이 현재는 영화판에 이렇다 할 인맥조차 없는 실정이니까요.”
“후원금을 모두 소비해도 좋소.”
노인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식탁에 올려두었다.
“계약서도 필요 없소. 승낙하면 바로 후원금을 보낼 것이오. 또한 이건 내 사비로 진행하는 일이니 토를 달 사람도 없을 거요.”
이상백은 고개를 끄덕이고 명함을 받았다.
“좀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노인이 대답했다.
“내가 죽기 전까진 말해줘야 합니다.”
“물론이지요. 오래 사실 겁니다.”
이상백이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이런저런 담화를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저녁약속을 모두 마친 이상백은 집으로 가지 않고 학교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컴퓨터를 켜고 커리큘럼이 가득한 파일을 열었다.
“후우.”
이상백은 이도원을 떠올렸다.
그에게 이도원은 놀랄 만큼 재능이 뛰어난 꿈나무였다.
‘언제나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조심스럽군.’
이상백은 커리큘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도원을 지도하기로 약속한 이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결심으로 밤을 꼬박 지새워가며 작업을 했다. 다른 교수진과 방향성을 맞추지 않고 그만의 커리큘럼을 제안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오랜만에 밤을 새웠더니… 나도 늙었나 봐.”
이상백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리며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담뱃불을 붙인 그는 창문으로 새어드는 햇살을 바라보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연기를 처음 가르쳤던 이십 대 초반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는 다짐했다.
‘내가 스타니슬랍스키(Stanislavsky; 러시아의 연출가·배우·연극이론가) 같은 인물은 못되더라도, 꼭 그만한 가르침을 주마.’
*
한편 이도원은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어젯밤 한잠도 자지 못하고 이상백 앞에서 펼칠 독백연기를 준비했다. 그가 선보일 연기는 다름 아닌 <가제: 우리>의 한 장면이었다. 이번에 출연하게 된 유태일 감독의 영화인 것이다.
‘기왕이면 내가 연기할 배역에 대해 피드백을 받는 게 좋겠지.’
그는 교과서를 살짝 들쳐 숨겨둔 대본을 눈으로 훑었다. 복합적이고 어려운 감정이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죽어가는 여동생에 대한 애타는 마음, 심장병에 걸린 여동생이 언제 잘못될지 모른다는 초조함, 그럼에도 병원비와 수술비가 모자란 설움, 부모님을 여읜 상태에서 여동생까지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범벅된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의 폭발은 병원비와 수술비를 요구하는 의사를 협박하는 잘못된 형태로 표출된다.
한 인물이 궁지에 몰려 양심과 두려움마저 잊어버린 모습을 표현해야만 했다.
이도원은 대사를 중얼거리며 대본의 중요한 부분을 볼펜으로 체크했다. 이상백 앞에서 연기를 펼치는 것은 그 어떤 오디션보다 긴장되고 기대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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