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연결고리 (9)
2015년 6월 15일 월요일.
이도원은 두림예술고등학교가 위치한 장지역에 도착했다. 역에서부터 많은 학생들이 보였고, 학교 인근에는 예술제를 보러 온 학부모들의 자가용들이 들어차 있었다.
이도원이 예술제에 온 목적은 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의 수준을 눈으로 보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동영상 속 김진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는 취지가 더 컸다.
‘떨리는군.’
그는 동영상에서 김진우와 흡사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심장이 철렁했다.
전생에서 자신을 죽인 김진우에 대한 분노 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단지 배역을 위해 살인교사를 서슴지 않았던 김진우를 떠올리면 본능적으로 분노를 덮는 공포심이 치솟았다.
곳곳에 붙은 예술제 포스터에는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김진우의 얼굴이 있었다. 김진우는 예술제연극 3학년 작품 <리어 왕>의 주연 중 하나였던 것이다.
“오긴 왔는데.”
그는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짝 소리 나게 양손으로 따귀를 때렸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고 머리털이 곤두섰다.
‘그 새끼가 날 피해야지, 내가 왜 피해?’
이도원은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무대가 있는 강당 안쪽으로 들어갔다.
고등학교 예술제였기 때문에 따로 지정된 좌석은 없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앞 좌석을 메우고 있었고, 그는 여섯 번째 줄의 빈자리에 앉아 예술제 일정과 연극작품 안내책자를 보며 연극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이곳 학생들이 준비한 <리어 왕>은 셰익스피어 4대비극 중 하나였다.
“하필이면 리어왕의 에드먼드라.”
이도원이 중얼거렸다.
에드먼드는 극에서 김진우가 맡은 역할이었다.
비극 <리어 왕>은 리어 왕이 어느 날 세 딸을 불러 영토를 나눠주며 “날 얼마나 사량하느냐?”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첨하는 두 딸에 비해 진실을 말하는 셋째 딸 코델리아를 쫓아낸 리어 왕은, 아첨하던 두 딸에게 버림받고 그제야 진실을 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대담하고 야망으로 똘똘 뭉친 에드먼드와 대립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이 에드먼드란 인물 역시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십 분 정도가 지나갈 때쯤 연극이 시작됐다. 예정 보다 십 분 정도 지체된 셈이었다.
객석 불이 꺼지고 무대 위로 한줄기 빛이 들어왔다. 그곳에 나타난 인물은 ‘광대’역할을 하는 학생이었다.
고전극에서 광대는 사회자를 대신한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극의 흐름을 잡아주고 관객을 설득시켜주는 소임을 가진다. 광대는 관객들에게 <리어 왕>의 배경을 설명한 후 무대 뒤로 사라졌다.
연극의 제 1막은 리어 왕이 세 딸을 불러 영토를 나눈 뒤, 셋째 딸 코델리아를 혼수 하나 없이 프랑스로 시집을 보내며 추방하고 자신에게 아첨하던 두 딸들에게 배신당해 쫓겨나는 과정을 다뤘다.
제 2막에는 리어 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충언과 충심을 아끼지 않는 신하들의 이야기가 그러졌다. 그리고 드디어 <리어 왕>최고의 악당이자 주연 중 하나인 에드먼드가 등장했다.
에드먼드는 충신 글로스터 백작의 서자로, 앞길에 방해가 되는 아버지 글로스터 백작과 형 에드거를 제거할 작심을 하고 독백했다.
“자연이여, 나의 운명의 여신이여. 나는 너의 법칙에 따르기로 했다.”
대자연을 아우르는 목소리가 극장을 가득 메웠다. 지금까지 호연을 펼쳤던 다른 배역들을 놀이쯤으로 보이게끔 하는 압도적 힘이 실려 있었다. 에드먼드의 오만하고 대담한 성정이 시작부터 그대로 묻어 나왔다.
조명이 비추는 사람은 이도원의 예상대로 김진우가 맞았다.
이도원은 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차원이 다르군.’
어느 정도 감안하고 보는데도 소름이 돋았다.
김진우가 독백을 이어나갔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인간이 만든 관습에 희생이 되고, 형보다 그저 열서너 달쯤 늦게 태어났다고 해서 세상의 시끄러운 잔소리에 구속되어 상속을 못 받아야만 하느냐.”
낮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
그 안에는 객석을 얼리는 차가운 분노가 서려있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사생아란 말이냐?”
자조적으로 물은 그는 웃으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오만한 표정으로 턱 끝을 치켜들었다.
“깨끗한 정실부인의 자식 못지않게 내 마음은 고상하고, 나의 체격은 이렇게 준수하지 않으냐?”
에드먼드를 연기하는 김진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들은 어째서 우리에게 서자라는 낙인을 찍을까? 어째서 사생아냐?”
그는 세상을 집어삼킬 듯 비웃었다.
“사생아?”
이어서 자신의 출신에 대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관객의 통념들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재미없고 김빠진 고단한 잠자리에서 자는지 깼는지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진 이 세상의 바보 무리들 보다, 남의 눈을 속여 가며 욕망을 못 이겨서 생겨난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더 많은 생명의 요소와 더 기운찬 기질을 타고나지 않았는가?”
관객들은 그의 말솜씨에 빠져들었다. 그의 음성과 어조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나직하고 강렬했다.
김진우가 유혹하며 자신과 상반된 출신을 말했다.
“적자.”
그의 대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적자 에드가야, 나는 네 것을 내 손에 넣고 말겠다.”
에드먼드가 된 김진우는 형을 향한 가소로움과 분노를 담아 손에 쥔 편지를 쳐들었다.
“존경하는 여러 신들이여, 이 서자를 보호해 주소서.”
대사가 끝나고 장면이 계속됐지만 이도원은 김진우의 독백이 주는 여운을 떨치지 못했다.
객석은 고요에 휩싸였고 모든 관객이 에드먼드에게 빠졌다. 김진우가 일으킨 마법에 홀려버린 것이다. 그는 독보적인 연기력으로 모든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어떤 장면이 나오든 관객들의 눈과 귀는 에드먼드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렸다.
이도원 역시 그들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
‘어떻게 저런 연기가 가능한 거지? 일개 고등학생이?’
좀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역시 시간을 거꾸로 돌아온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그런 연기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거냐?’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김진우는 그 뒤로도 신기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리어 왕>이 끝났을 때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은 단 한 명의 인물, 에드먼드였다.
이도원은 충격과 패배감을 맛보았다.
연기는 누가 더 잘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실력의 우위가 정확하다. 공연을 보고나서 무의식적으로 다른 배우의 연기를 떠올리며 내 연기를 한다면. 적어도 그 배우가 자신보다 뛰어난 연기자란 뜻이다.
이도원은 으드득 이를 갈며 <리어 왕> 연극이 끝나는 동시에 객석에서 일어났다. 아직 1, 2학년들의 작품이 남아있었지만, 도저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머리에서 떨칠 수 없겠어.’
그가 두림예술고등학교를 나왔을 때, 이미 머릿속은 김진우에 대한 경각심으로 가득했다.
*
다음날 이도원은 이상백의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한국예술대학교로 가고 있었다. 그를 찾아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작용했다.
타임 슬립 전, 한동안 계속 무대에만 섰기 때문에 영화촬영을 들어가기에 앞서 도움이 될 만한 조언들을 얻고 싶었다. 또한 김진우의 연기를 보고 받은 충격에서 탈출해 한 단계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도원은 이상백이 큰 도움을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타임 슬립 전에도 이도원의 스승이었고, 이도원의 연기인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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