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연결고리 (8)
이도원의 식사 제안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차지은은 그 말을 듣고 나자 배가 고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허기를 두 시간 더 참아야 했다.
첫 리딩만 네 시간에 걸쳐 진행된 것이다. 리딩이 끝나자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유태일 감독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밥 먹으러 가죠.”
“드디어!”
차지은의 얼굴이 활짝 폈고 이도원도 반색했다. 그러나 그때 차지은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 아, 네!”
그녀는 따라오던 걸음을 멈추더니 유태일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님. 저… 라디오 스케줄이 잡혔다고 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음. 그래요. 중요한 내용은 문자로 보내죠.”
차지은이 이도원에게도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오빠, 저 가요.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이도원은 바쁜 스케줄 탓에 고생할 그녀가 조금 안쓰러웠다.
‘어린 나이에 고생이네.’
차지은 또래라면 다들 용돈 받으면서 학교 다닐 나이었다. 반면 그녀는 웬만한 성인들도 견디기 힘든 스케줄을 소화하며 냉혹한 방송계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 표정을 본 유태일 감독이 피식 웃었다.
“예쁜 여배우랑 저녁 먹을 기회를 놓쳐서 아쉽죠?”
그는 이도원의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했다. 하긴, 열일곱 살 남고생의 생각을 짐작한 것치곤 정확했다.
‘예쁜 여배우라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서 그렇지.’
이도원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나란히 중영대학교 인근 중식집으로 갔다.
유태일 감독이 민감한 부분이라는 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
“개런티는 지급할 거예요. 차지은 배우님과 이도원 배우님에게 똑같은 금액으로 드릴 겁니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보통 외부에서 배우를 섭외하면 학생 작품도 개런티를 지불하긴 하지만, 유태일 감독은 이때부터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가 연출하는 졸업 작품 겸 영화제 출품작이라면 너도나도 노개런티로 참여하겠다고 달려들 만 했다.
결론적으로 차지은이야 유명 아역배우니 이해가 가지만, 이도원한테까지 똑같은 개런티를 준다는 건 파격적인 제안인 셈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그가 솔직하게 말하자 유태일 감독이 미미하게 웃었다.
“차지은 배우님이 노개런티로 출연한다고 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개런티는 촬영이 끝나면 지급할 거고, 각각 오십만 원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도원은 조금 의외였다.
영화 자체도 학생 졸업 작품인데다, 이도원이 무명이란 것까지 감안하면 꽤 큰 금액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자로 공지하겠지만, 첫 촬영은 6월 20일부터 들어갑니다. 평일 나이트(night; 야간)씬 먼저 찍고 주말에 데이(Day; 낮)씬을 찍을 거구요. 방학이 되면 본격적으로 부족했던 부분들을 촬영할 겁니다.”
이도원은 직접적인 촬영 얘기가 나오자 흥분됐다. 무척 바빠지겠지만 그만큼 보람 있고 행복한 나날이 될 것이다.
‘연기가 가장 즐거운 곳은 현장이지.’
또한 연기가 가장 빨리 느는 곳도 현장이었다.
이도원은 찌릿찌릿한 느낌을 받으며 대답했다.
“기대되네요.”
유태일 감독이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전 현장에서 배우들한테 욕을 많이 먹습니다. 대부분 너무 막 굴리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죠. 하지만 촬영이 끝날 때마다 다시 결심합니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위해서라면 그 이상도 할 수 있다고.”
“소문은 들었습니다.”
이도원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유태일 감독은 어깨를 으쓱였다.
“차지은 배우님이 말해줬나 보군요. 이도원 배우님에게는 기대가 큽니다. 나이에 비해 연기 실력이 발군이니까요. 영기 선배가 왜 소개했는지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하지만 그만큼 걱정도 돼요. 한 사람이 너무 튀면 나머지가 죽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도 염려되는 부분이었다. 아직 모든 감정을 능숙하게 요리할 수 없었다. 타임 슬립 후 갑작스럽게 깊어진 감정 때문에, 기술적으로 감정을 다루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할 터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대답한 그가 물었다.
“선배님이라고 하신 조감독님 번호를 좀 알 수 있을까요? 감사 인사도 못 드렸네요.”
“아, 당연히 해야지요. 식사 다 하고 문자로 보내주겠습니다.”
“네!”
이도원은 유태일, 민영기, 이상백을 차례로 떠올렸다. 민영기를 빼면 타임 슬립 전에도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는 이상백 교수를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라면 내 연기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유태일 감독의 작품을 망칠 수는 없어.’
이도원은 흥분 못지않은 부담감도 느꼈다. 적어도 타임 슬립 전 유태일 감독의 데뷔작에 나왔던 남자 주인공보단 훌륭한 연기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
문자가 왔다. 컴퓨터 앞에 앉아 <방송, 영화, 드라마 대본 커뮤니티> 가입을 하고 있던 이도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모해?
박아현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종종 이런 식으로 문자를 보내고는 했다. 답장을 안 해도 주기적으로 연락이 왔다.
이도원이 문자 화면을 넘기는데, 이번에는 전화가 왔다. 그는 마지못해 박아현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답장 안 해?
“바빴어. 앞으로도 바쁠 예정이고.”
이 정도면 칼같이 잘랐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우리 학교에서 이번에 예술제 하는데 올래? 학교 축제는 9월인데 우리 과에서 공연하거든.
이도원은 귀가 번쩍 뜨였다. 배우에게 연기를 하는 일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보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누구의 연기를 보느냐가 관건이었다.
“너 학교 어디라고 했지?”
-두림예술고등학교. 올래? 나 이번에 일 학년 공연 주연 맡았거든.
두림예고는 아이돌이 많은 학교로 유명했다. 교복이 가장 예쁜 학교기도 했고, 교복 값만 들어도 사립에 학비가 비싸다는 걸 유추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만큼 학교에서 연기과, 모델과, 실용음악과, 연출과 할 것 없이 많은 지원을 했다.
이도원이 궁금한 건 이 자유분방한 고등학교 학생들의 실력이었다. 독백대회에서 입시생들의 독백실력을 봤다지만 상대역이 있는 공연은 또 다를 터였다.
그가 대답했다.
“갈게. 며칠이야?”
-어머, 웬일로? 6월 15일, 16일, 17일! 아무 때나 저녁 여섯 시까지만 오면 돼!
“알겠다. 그럼.”
이도원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하루 전에 연락한 박아현을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전히 즉흥적이야.’
다행히 그땐 다른 스케줄이 없었다.
“누구랑 가지?”
잠깐 박서진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가고 말지.’
이도원이 알고 있던 과거와는 달리 박서진은 연기를 하지 않았다. 시간제 강사까지 연루되면서 학교 측은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고, 문제의 근원이 됐던 연극부의 존재를 영구적으로 폐쇄해 버렸다.
결국 연극부를 만들겠다는 이도원의 목표는 좌절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유태일 감독의 졸업 작품에 섭외된 마당에,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음?”
이도원은 <방송, 영화, 드라마 대본 커뮤니티>에 올라온 동영상 제목이 눈에 띄었다.
[두림예술고등학교 연기과 3학년 수련회 공연, 연기력 폭발!]
그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보면 굳이 안 가도 되겠네.”
이도원은 동영상을 클릭하고 시청했다. 화질은 좋았지만 어두워서 배우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수련회 당일 두림예술고등학교 학생이 객석에서 직접 찍은 영상인 듯했다.
그들이 한 연극은 <이(爾)>였다.
그 내용은 연산군 시절, 성희의 대상으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궁중배우 공길과 그를 사랑한 장생, 그를 질투한 연산군의 후궁 녹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마침내 영상에서 깨끗한 음질의 대사가 흘러나왔다. 연극의 후반부, 공길이 죽음을 앞둔 장면이었다.
“왕이여, 나 죽으면 한강수에 던져주오.”
심금을 울릴 만큼 애절한 목소리였다.
“흘러가다 바람맞아 살랑살랑 춤도 추고 너울너울 재주도 넘고 흘러흘러 아주 물이 되게. 저 죽은 지도 모르게…….”
동영상으로 접했는데도 불구하고 큰 여파가 불어왔다. 심지어 이도원은 살랑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너울너울 춤추는 나비가,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공길이 말끝을 흐리는 부분에선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이었다.
찰나지간이 지난 뒤 공길이 말했다.
“왕이여, 부탁이니 나를 위해 한 번만 더 웃어주오.”
목소리 자체도, 발성과 호흡도 한 톨의 어그러짐 없이 완벽했다. 동영상 속의 객석은 숨을 죽이고 있었고, 연산군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도원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실제 객석에 있던 것도 아닌데 팔에는 소름이 돋았다. 아마 직접 보았다면 그 역시 동영상 속의 관객들처럼 넋을 놓고 있을 터였다.
‘누구지?’
그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동영상을 두 번 세 번 더 보았다. 그리고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를 계속해 들었다. 그러길 한참.
동영상 속 공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뇌리에는 끔찍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입술을 비집고 그 이름이 새어 나왔다.
“김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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