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23화 (23/178)

인연의 연결고리 (7)

남녀 모두 예쁘고 잘생긴 이성을 볼 때 호감을 품는다. 이건 모든 사람의 몇 안 되는 공통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도원이 기억하는 차지은은 한국 남성들의 호감을 독차지하는 여성이었다.

‘하필이면 내 상대역이 차지은이라니.’

그녀와 파트너가 된 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반대로 나쁜 소식도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유태일 감독의 데뷔작에는 차지은이 나오지 않았어.’

미처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하던 점이었다. 이도원에게 이것만큼 중요한 사안은 없었다.

‘과거가 바뀌었다?’

그는 자문했다. 문제는 과거가 바뀌었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부터 살아왔던 세월을 통째로 뜯어고치고 있는데,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리가 없지.’

이도원은 침착하게 날뛰는 마음을 다스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미 많은 부분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당장은 그의 삶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 부정적으로 바뀐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면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덮쳤다.

“저기, 제 이름은 차지은이에요. 나이는 열네 살이고요.”

이도원은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난 열일곱 살이고 이름은 이도원.”

대부분의 성인들은 몇 살 차이든 초면에 존대를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고등학생은 중학생을 보며 반말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차지은 역시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연기 엄청 잘하시던데요?”

“고맙다.”

“오빠도 회사 있어요?”

차지은의 입장에서 볼 때 이도원이 아직도 회사가 없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연기를 하는 학생들은 실력만 되면 오디션을 보고 회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타임 슬립을 하고 한동안 정신없이 지내던 이도원은 내심 생각했다.

‘어쨌든 배우로서 활동하려면 혼자 보다 회사에 들어가는 편이 낫긴 하지.’

그는 차지은을 요목조목 뜯어보았다. 그녀는 긴 속눈썹 아래 크고 맑은 눈으로 이도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어린 차지은을 보고 떠오른 기분은 깨물어 줄 만큼 귀엽다는 것이었다.

이도원이 대답했다.

“회사는 없고, 넌 드라마에서 많이 봤어. 연기만 잘했어도 열성팬이 됐을 텐데.”

그는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 20년 뒤 그녀가 연기를 잘했다면 이도원은 전생에서 팬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번번이 연기논란에 휩싸일 정도로 연기력이 늘지 않았고, 그저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예쁜 여배우로 남았다.

이도원의 생각을 짐작조차 못하는 차지은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나쁜 사람 같진 않았는데 실망이네요.”

뾰로통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난 네 연기력이 더 실망이다. 그래도 여주인공 아역으로 나오기에 얼마나 잘할까 기대했는데.”

“제가 못하는 게 아니고, 오빠가 잘하는 거거든요?”

차지은은 발끈했다.

“그리고 배우한테 연기 못한단 말처럼 실례되는 말이 어디 있어요? 초면에 진짜 예의 없네.”

“그러네.”

이도원은 순순히 인정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좀 직설적인 성격이라. 그리고 만약 실제로 만나게 되면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었거든.”

타임 슬립 전 차지은은 방송에서 연기력 논란에 대해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도원은 그녀와 연기 호흡을 맞추게 된 이상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늘이 내린 외모를 가진 그녀가 훌륭한 연기를 펼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차지은 같은 부류는 자존심이 셌다. 어려서부터 아역이었으니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모두들 가깝게 지내려고 아우성이었을 테고, 남모를 우월감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인정한다면 칭찬보다 직설적인 충고가 약이 될 터였다. 이런 내막을 전혀 모르는 차지은은 내심 생각했다.

‘아오, 열 받아. 지는 뭐 얼마나 잘한다고…….’

잘하긴 잘했다. 그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심한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흥. 현장에서 뭐 가르쳐주나 봐요.”

차지은은 혀를 쏙 내밀고는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먼저 강의실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이도원은 자판기에서 생수 세 병을 뽑았다. 리딩을 하면 침이 마르기 때문이다.

‘충고를 받아들이는 성격이면 이제 좀 달라지겠지.’

이도원은 그녀가 귀여워서 겸사겸사 오지랖을 조금 부려본 것이다.

*

한편 한발 먼저 강의실로 돌아온 차지은은 잔뜩 뿔이나 있었다.

‘지가 뭔데 잘 한다, 못 한다 평가해?’

고집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이성은 충고를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어렴풋이 자신이 연기를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웃고만 있어도 섭외가 들어오는 그녀에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스스로 느껴지는 것이다.

‘나도 노력하고 있다고. 그래서 노개런티로 출연하겠다고 조른 거라고!’

차지은은 황소고집을 부려가며 간신히 소속사 대표의 허락을 받고 출연했다. 그런데 막상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연기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울컥했다.

문제는 이도원의 무례함에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뭐야? 언제 봤다고 아빠미소는.’

그녀는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표정만 봐도 악의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머지않아 이도원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유태일 감독에게 먼저 물병을 챙겨주었다.

다음으로 차지은의 뒤에 서서 물병을 내려놨다.

“아깐 미안.”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말했다. 그를 올려다 본 차지은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잘생겼네.’

병 주고 약 준 그는 제자리에 가서 앉았다.

잠깐의 휴식이 지나고, 두 사람을 관찰하던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꽤 친해진 것 같군요. 그럼 다시 리딩을 시작하죠. 그 전에 했던 7씬 마지막 대사부터 갑니다. 이도원 배우님부터.”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아까 전과같이 무겁고 날선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나가.”

흐름이 끊겼던 부분이었다.

차지은은 이전과 달리 이도원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감정을 쏟아냈다.

“그래! 이게 네 본색이지! 제발 그 위하는 척, 가식적인 얼굴로 나한테 말하지 마.”

이 다음은 그녀가 나가는 장면이었다.

지금은 현장이 아닌 리딩이었기에, 유태일은 다음 씬으로 넘어갔다.

“다음 13씬. 동생이 쓰러지는 걸 목격하는 장면, 이도원 배우님만 해보죠. 차지은 배우님은 15씬 병원에서 독백장면으로 넘어가면 됩니다.”

그 뒤로 리딩은 끊기지 않고 계속됐다. 꼬박 두 시간 동안 리딩을 하고 나서 지친 얼굴로 강의실을 나왔다.

유태일 감독이 이십 분 휴식시간을 준 것이다.

복도 소파, 이도원과 나란히 앉은 차지은이 말했다.

“유태일 감독님이 깐깐하고 빈틈없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드라마 리딩 보다 힘든 것 같아요.”

반면 이도원은 이 상황이 즐겁고 행복했다. 그러나 차지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활동을 일찍부터 시작해 그런가. 보통 애들이라면 다 지쳐서 풀어졌을 텐데, 아직도 눈은 반짝반짝 하네.’

대견한 마음이 든 그가 차지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힘내. 끝나고 밥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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