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연결고리 (6)
일주일은 바람같이 지나갔다. 장편영화의 통대본을 외우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한 시간 거리를 지하철을 타고 가서 흑석역에 내린 이도원은 중영대학교 203번 건물 8층 814호로 갔다.
유태일 감독은 미리부터 강의실에 와있었다. 그리고 한 명의 여자아이가 더 있었다.
‘삼십 분이나 일찍 왔는데.’
이도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유태일 감독은 그를 보며 말했다.
“일주일 만이네요.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이도원은 그 말에 따라 여자아이의 맞은편에 앉았다. 박시한 맨투맨 티에 청바지를 입고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여자아이가 그를 보더니 살짝 웃더니 고개를 숙였다.
‘진짜 예쁘게 생겼네.’
이도원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인 소녀지만 마치 오드리 헵번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했다. 미래에서 온 이도원은 그녀가 누군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내가 차지은과 마주 보고 있다니.’
이십 년 뒤, 눈앞의 중학생은 전성기를 맞이한 삼십 대 여배우가 된다. 워낙 뛰어난 외모 덕분인지 광고 개런티는 천정부지로 치솟지만,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이도원은 그 시대를 살아본 대한민국 남자로서 사인이라도 받아두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유태일 감독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두 배우가 각자 대본을 꺼내는 걸 보며 그가 말했다.
“두 사람은 크랭크 인(crank in; 촬영개시)부터 쭉 함께할 겁니다. 함께 등장하는 씬(scene; 장면)이 영화 전체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니까요.”
그는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괴었다.
“촬영을 하면서 간단한 문제들이 생길 겁니다. 차지은 배우님은 아역으로 종종 드라마 출연을 해왔지만 이도원 배우님은 무대 경험만 있고 촬영 경험은 없는 걸로 알고 있으니까요.”
유태일 감독은 이도원의 호칭을 학생에서 배우님으로 바꾸어 불렀다.
“예. 그렇습니다.”
이도원은 기분 상해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사실에 입각한 지적에 관해서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더구나 호흡을 맞춰야 하는 상대 배우끼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수록 좋았다.
유태일 감독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촬영 스태프가 배우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만큼, 배우도 스태프를 배려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배우가 스태프를 배려한다는 건 원활한 촬영이 가능하도록 알아서 움직이는 걸 의미하죠. 물론 스태프들과 차지은 배우님이 도와주겠지만, 본인 스스로 많은 공부를 해야 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유태일 감독이 이번에는 차지은을 바라보았다.
“차지은 배우님은 현장에 대한 감각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버리세요. 현장에서 어떤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졌는지는 들었습니다. 비주얼이 중요한 드라마 특성상 차지은 배우님을 현장에서 가르쳐서라도 출연을 시켰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배우에게 틀에 박힌 연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가르치지도 않고요. 아마 차지은 배우님은 이도원 배우님에게 많이 배우게 될 겁니다. 두 사람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차지은은 흔들리는 표정을 숨겼다. 그러나 이도원은 찰나의 순간을 포착했다.
‘자존심 상할 만 하지. 어디 가나 알아보는 유명 아역배우가 세 살 위의 무명 고등학생한테 배우란 소리를 들었으니.’
유태일 감독이 물었다.
“알겠죠?”
“네. 감독님.”
차지은은 생각 외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던 이도원은 내심 놀랐다.
‘원래 예의 바른 건가? 그렇다고 해도, 잘 나가는 아역배우인 차지은을 졸작에 섭외했다는 건 벌써부터 관계자들 사이에서 유태일 감독의 장래성이 주목받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런 생각을 꿈에도 모르는 유태일 감독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리딩을 시작해 봅시다. 콘티는 현장에서 나눠주도록 하죠.”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시야를 넓히며, 짤막하게 말했다.
“대본 봐주시고, 7씬부터 연기해주세요.”
침묵 속에서 대본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도원은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리리고 마침내 차지은의 앙칼진 목소리가 강의실을 울렸다.
“내 친구들한테는 왜 그러는데? 나한테 신경 좀 끄라고!”
대사는 제법 자연스러웠지만 발성이나 표정이 엉성했다.
한편 이도원은 내색하지 않고 대사에 집중했다.
“두 분의 죽음이 아직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니?”
낮은 목소리가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언제 들어도 소름 돋는군.’
유태일 감독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큰 격차에 당황할 법도 한데 차지은은 내색하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녀가 일찍부터 현장에 뛰어들어 배운 노하우였다.
“그럼 아니라고 생각해? 양심도 없지.”
차지은의 연기는 굉장히 틀에 박혀있고 표면적이었다. 그녀는 통속적인 불량아를 연기하고 있을 뿐,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부족했다. 하지만 이도원은 개의치 않고 호흡을 맞췄다.
“널 볼 때마다 마음이 찢어진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이도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서늘한 비수에 찔린 듯 표정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유태일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호흡을 이어가고 있어.’
대사가 끝났음에도 호흡을 늘어트린다. 호흡이 이어지는 동안은 관객들의 감정도 이어질 것이다. 대사가 끝났는데도 상대 배우인 차지은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다음 대사를 이어갔다.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럼 엄마, 아빠도! 나도! 우리 가족 모두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 내가 뭐 어때서? 너 같은 위선자보단 나아.”
차지은의 대사가 안정감을 찾았다.
유태일은 그것이 이도원의 영향력임을 알 수 있었다.
‘상대 배우가 연기를 잘하면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겠지. 하지만 아직 부족해. 뭔가 더 보여 봐라. 이대로는 이도원의 연기에 차지은이 먹힌다. 영화를 망치게 돼.’
그의 예상대로 이도원은 앞선 차지은의 대사를 날려버릴 만큼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차지은이 눈앞에 있는 듯 손을 뻗었다.
밀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시늉을 하며 분노와 슬픔, 안타까움이 활활 타는 눈빛으로 대사를 씹어뱉었다.
“당장 나가.”
그 대사를 받은 차지은은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순간 흐름을 잃고 대사를 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때 유태일 감독이 두 사람의 연기를 잘랐다.
“컷.”
그는 말을 이었다.
“두 사람 모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다시 합시다. 삼십 분 동안 대화도 하고, 좀 친해진 다음 계속하죠.”
유태일 감독은 차지은을 위해 한 가지 꾀를 냈다.
‘좀 친해져서 편하게 연기를 하게끔 만들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새 해도 안 끝난다. 이도원한테 압도당해 계속 실수를 범하겠지.’
그는 두 사람이 리딩장을 나가는 걸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프로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현장에서 자란 차지은이 십 분도 안돼서 무너지다니… 이도원이 괴물은 괴물이야.”
물론 이도원의 연기가 현역배우들 이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현장을 장악하고,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연기를 펼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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