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연결고리 (5)
‘내가 유태일 감독 작품에 들어가다니.’
이도원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오디션을 마치고 미래정신과의원을 가고 있던 길이었다. 다달이 한 번 씩 무료진료가 약속되어 있던 것이 생각나서 전화로 예약을 잡은 것이다.
한 시간 정도 걸려 동네에 있는 미래정신과의원을 찾은 이도원은 날선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매달 무료진료를 해주겠다는 차수희의 배려 때문인지, 외모만큼이나 예쁜 마음씨가 느껴지기 때문인지 확실하진 않았다.
“살다 보면 가끔은. 그래,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끼지.”
이도원은 독백대사를 읊듯 콧노래처럼 중얼거렸다. 유태일 감독과의 인연이 이어진 오늘은 그의 삶 중에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기쁜 날이었다. 마음은 붕 떠있고 머리로 피가 몰려 손발이 차가워졌으며 심장은 이유 없이 두근거렸다.
“이도원 환자분! 들어가세요.”
간호사의 부름을 들은 이도원은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웃음과 보조개가 예쁜 차수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세 달 만이네요.”
“그동안 바빠서요.”
이도원은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를 유심히 관찰하던 차수희가 물었다.
“전과는 태도가 사뭇 다른데요? 기쁜 일이 있나 봐요?”
“기쁜 일도 있고… 전보다 편해졌죠.”
이도원은 시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독백대회에서 우승했고, 방송국 오디션을 봤고, 영화 오디션을 봤어요. 그리고 학교생활을 하며 겪던 작은 소란도 해결했죠.”
개인적인 일들을 낱낱이 떠드는 행동은 사생활에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이도원에게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차수희는 그런 사실을 모두 알진 못했지만 그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좋은 기회들이 있었네요. 그만큼 도원 학생도 바뀐 것 같고요. 처음 봤을 때 많이 불안해 보였거든요. 고슴도치 같다고나 할까?”
의사라 그런지 과연 날카로웠다. 짧은 만남만으로 그 당시 이도원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본질을 파악한 것이다. 그는 연속적으로 일어난 비상식적인 일들에 잔뜩 곤두서고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일장춘몽을 꾼 듯 언제 다시 죽음이 찾아올지, 누군가 그의 비밀을 알아채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혹은 무섭도록 증폭된 연기 감각 때문에 자아를 잃고 자멸할지도 몰랐기에 불안감은 더 컸다.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일은 아니니까.’
이도원이 사고로 목소리를 잃고 죽음까지 직면하고 나서 느낀 이치들이었다. 불행은 현실에 안주할 때 찾아오며 달아나려 할수록 더욱 숨통을 옥죄어온다. 그나마 그가 긍정적인 성격이 아니었다면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이도원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비밀을 간직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죠.”
“비밀이 있나요?”
차수희의 질문에 그는 책상 위에 쓰러져 있는 액자를 보았다. 고의로 뒤집어 놓은 듯 반듯하게 뒤집혀 있었다.
이도원이 물었다.
“선생님은요?”
그 눈길을 따라 액자를 본 차수희가 미미하게 웃었다.
“물론 저도 비밀이 있죠.”
“궁금하긴 하지만 실례될 것 같으니 안 물을게요.”
“그냥 관계적인 문제에요. 작든 크든 인간관계에는 문제들이 생기죠.”
차수희는 애매모호하게 대답하며 액자를 세웠다. 그 안에는 그녀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어른 남녀와 어린 자매가 있었다. 딱 봐도 가족사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차수희가 이어서 말했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서, 도원 학생이 겪고 있는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늘은 저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편안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그뿐이에요.”
“슬픈 얘기네요. 친한 사람일수록 편안한 게 일반적인 생각인데. 도원 학생은 반대라니.”
“때로는 모르는 사람이 편할 때도 있잖아요?”
이도원이 빙긋 웃으며 묻자 차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그런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진료를 받으러 오라고 했는데 수다를 떨러 올 줄은 몰랐어요. 아, 물론 나쁘다는 뜻은 아니에요. 어떤 의학적인 치료보다 필요한 일이니까요.”
이도원은 막상 마주 보고 앉으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러고 보면 그녀에게 말할 수 있는 범주도 주변 사람들과 똑같았다. 다만 언제든 이곳에 오면 이야길 들어줄 완벽한 남이 있다는 편안함에 이끌려서 오게 됐다. 마음을 의지할 곳이 생긴 건 모두 차수희가 베푼 호의 덕분이었다.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치료 대신 가끔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선생님은 저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거든요.”
“그래요. 이 병원이 망하지 않는 이상 전 매일 다섯 시까지 이곳에 있으니까 언제든 와요. 물론 환자가 있으면 기다려야겠지만. 월세는 내야죠.”
그녀의 말에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이제 됐어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차수희의 대답을 들은 이도원은 가방을 메고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그는 진료실을 나가기 전 말했다.
“감사합니다.”
짧지만 진심이 담긴 한 마디였다.
이도원이 나가자 차수희는 책상에 있는 소설책 <마지막 잎새>를 보았다. 그녀는 책을 펼쳐들었지만 얼마 못가 덮었다.
“영 애 같지가 않아.”
이도원은 특이한 아이였다. 애어른이란 말은 철이 빨리 든 아이를 말하는 법인데, 이도원은 어른의 느낌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열일곱 소년이었다.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차수희는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
한편 이도원은 집으로 가는 길 차수희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본 그녀는 매우 총명하고 친절한 여성이었다.
‘이상하군. 그 병원에만 가면 마음이 편해지니. 서른일곱까지도 병원을 무서워했었는데.’
이도원은 알쏭달쏭한 느낌의 원인을 찾지 못한 채로 집에 도착했다. 그는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 화면에 접속했다.
“깨끗한데?”
타임 슬립 전 그의 메일함은 꽤나 너저분했다. 메일 보관함에는 수많은 시놉시스와 대본이 있었다. 그마저도 목소리를 잃은 뒤에는 광고메일들만 주를 이루었지만. 이제 메일함은 그의 과거처럼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잠시 감상에 젖었던 이도원은 유태일이 보낸 메일을 열어보았다. 메일 안에는 시나리오와 통대본이 첨부되어 있었다. 기나긴 장편영화의 자료들이었다.
“어디 보자.”
이도원은 떨리는 마음으로 시나리오와 대본을 출력했다. 프린트기가 고물이라 모두 나오려면 십 분 정도가 소요될 터였다.
이도원은 이 영화가 어떻게 될지 미래를 알고 있었다.
‘아마 이때부터 엄청 떴었지.’
맨 앞장에 적힌 제목이 보였다.
<가제 : 우리>
가제대로 개봉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이도원은 대본이 나오는 대로 정리해 두었다. 분량이 많기 때문에 그때그때 정돈해야만 했다.
그 와중 잠깐잠깐 본 내용은 그야말로 클리셰(cliche; 상투적인)에 틀어박혀 있었다.
나쁜 짓만 골라 하던 여주인공이 어느 날 잠복해 있던 심장병으로 쓰러지게 된다. 그녀는 부모님의 죽음과 관계돼 오빠를 증오한다. 하지만 남주인공인 오빠는 어떻게든 그녀를 바로잡으려 하고, 나아가 그녀가 쓰러지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새 심장을 구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오해를 풀고 화합하게 되는 남매의 이야기였다.
‘이게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던 시나리오.’
이도원은 이 작품이 여러 협회상과 관객상을 수여했던 것을 기억했다.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기대되는 심정으로 대본을 처음 본 이도원의 첫 감상은 그가 맡은 배역이 어려운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감정 변화가 많고, 그때그때 굵직굵직한 연기가 필요해. 근데 또 대사는 구구절절하지 않단 말이지.”
감정 골이 깊은 인물은 연기하기가 어렵다. 말이 없으면 더더욱 전달하기 난해하다. 하지만 이도원으로서는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그는 시익 웃으며 말했다.
“침묵은 어떤 대사보다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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