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연결고리 (4)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열일곱 살 이도원입니다.”
유태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모른 체를 했다. 민영기에게 소개를 받은 뒤 처음 보는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살가운 인사를 나눌 시간이 아니었다.
“다음 분.”
그 말에 따라 줄줄이 자기소개를 마쳤다.
소개가 모두 끝나자 유태일이 이도원을 보며 말했다.
“사전에 통보했듯 삼 분 동안 즉흥연기를 볼 생각입니다. 상황은 제가 설정하죠. 첫 순서인 이도원 학생은 아내를 잃은 남편 연기를 해보세요. 이 설정만 갖고 본인이 표현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해보는 겁니다.”
유태일은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하늘같은 선배인 민영기의 말을 듣고 부르긴 했지만, 그는 이도원이 이 설정을 훌륭히 소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열일곱 살의 이도원이 결혼한 반려자를 잃은 슬픔을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을지 보고 싶을 뿐이었다.
유태일이 덧붙였다.
“아, 하지만 원래 사이가 안 좋았다거나 알고 보니 남편이 와이프를 죽인 살인자였다거나 그런 막장 설정은 금해주십시오. 제가 도원 학생에게 보고 싶은 건 애절함이니까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작하겠습니다.”
긴장감이 정수리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는 이 순간이 좋았다.
‘두려움을 즐겨라.’
이도원은 눈을 감고 감정에 집중했다. 점차 들뜬 흥분이 가라앉으며 가슴에 묵직한 한이 자리 잡았다. 그 정체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서글픔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간 하늘을 원망하는 분노였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마주할 미래에 대한 절망과 두려움이었다.
다리 힘이 풀린 이도원은 털썩 주저앉았다. 수많은 감정으로 범벅된 한스러움이 그녀를 향한 미안함으로 돌변했다. 그 감정이 가슴을 난도질 해놓았다. 너무나 깊이 파인 상처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흉터로 남을 것만 같았다.
‘아직도 네가 곁에 있는 것 같아.’
이도원은 끝끝내 말문을 열지 못했다.
이내 울기 시작했다. 엉엉 울었다.
시간이 가고 있었다. 일 분, 이 분…….
이도원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일 분 밖에 없었다.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 그를 보다 못한 유태일이 물었다.
“왜 울기만 하죠?”
기다렸다는 듯, 이도원이 고개를 들었다. 떨리는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희미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아내가 죽었습니다.”
이도원은 음성을 무저갱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의 목소리를 따라 듣는 사람들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심장이 끝도 없는 아래로 낙하하는 기분이었다. 철렁 내려앉는 느낌에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이 자리의 모두가 어떤 감탄조차 하지 못했다. 짧은 침묵 끝에, 유태일이 신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허.”
이성을 되찾자마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이거 괴물이잖아?’
유태일은 예정에도 없던 질문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왜 그렇게 표현한 겁니까?”
이도원은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그는 여운이 다 가라앉지 않았는지 맥없는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이 세상 대부분의 것들은 돌이킬 수 있습니다. 옷에 음식을 흘리면 빨면 되고, 물을 쏟으면 닦으면 되죠.”
“그런데요?”
“하지만 죽음은 돌이킬 수 없잖아요. 그런 마음을 품고 연기를 했습니다.”
“이거야, 원…….”
유태일이 말끝을 흐리며 나머지 참가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계속 볼까요?”
참가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충격적인 발상과 연기를 본 그들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프로였다면 달랐겠지만, 아직 학생 수준에서 머물고 있는 그들은 안 하니만 못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것만 봐도 연기에 있어서 정신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이도원은 또 다른 상념에 사로잡혔다.
‘책을 읽거나 대본을 읽고 연기를 한 것도 아닌데, 상상만으로 무섭게 몰입이 됐다.’
타임 슬립 전이라도 같은 발상을 토대로 기술적인 연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술적인 배우가 감정이 풍부한 감각적인 배우를 이길 수 있는 무기는 훈련이 밑바탕 된 안정된 연기력과 신선한 발상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토록 감정을 끌어올려 연기를 해내지는 못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생각과는 무관하게, 오디션 결과는 이미 결정된 듯 보였다.
*
오디션을 모두 마친 유태일은 민영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태일이구나. 오늘 오디션 있는 날이지?
“이미 봤습니다.”
유태일은 전에 없이 심각하게 말했다.
“선배님. 오늘 온 그 친구, 뭔가 이상합니다.”
-뭐가? 문제 있어?
“반칙하는 느낌이에요. 이질감이 들 정도로 잘합니다. 그래서 인간미가 안 느껴져요. 동질감도 안 듭니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딱 정의하긴 그런데… 고슴도치 같습니다. 그 친구 연기를 보면 분명 다들 감탄하겠지만 동료 배우들은 절망하겠죠. 그 자신은 돋보이겠지만, 그를 뒤덮고 있는 가시들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다칠 겁니다. 현장 분위기도 망가지겠죠. 그럼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불편해집니다.”
-하. 너무 잘해서 문제다 이거지?
“잘하긴 하는데 융화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품은 느낌이랄까요? 수많은 천재들이 독보적으로 혼자 살아갔지만, 영화는 다릅니다. 종합예술이고 공동작업이에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뭐, 너처럼 섬세하게 볼 기회는 없었다만 대충 무슨 뜻인지 알겠다. 하지만 연출자로 살아가면서 그런 배우를 보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잖아? 그런 배우를 만져볼 기회가 언제 있겠냐? 네가 한 번 만들어봐.
그 말에 유태일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제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너나, 그 녀석이나 엄청나게 성장할 거다. 작품은 말아먹으면 또 찍으면 되지만 그런 배우를 컨트롤해 볼 기회는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해. 그런 인재를 단역으로 쓰기 아까워서 설득하지 않았다만, 난 네가 부럽다. 내가 영화를 하고 있었다면 그런 배우는 당장 썼을 거야.
“알겠습니다.”
대답한 유태일이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 한 번 고민해 볼게요. 그리고 섭외하게 되면 한턱 쏘겠습니다.”
-또 말은…….
웃으며 말끝을 흐린 민영기가 이어 물었다.
-여배우도 만만찮은 괴물이라고 하지 않았냐?
“이번에 아역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차지은 아시죠?”
-아, 그 중학생 꼬마? 우리 <만신전>에서도 여주인공 아역으로 나왔다. 나도 친해.
“차지은이 주연입니다.”
-야, 걔가 독립영화를 한다니?
“독립영화로 출발하는 건 맞지만 거기서 멈출 게 아니니까요.”
졸업 작품은 단편이든 장편이든 독립영화로 제작되기 마련이다. 독립영화는 이윤 확보를 1차 목표로 하는 상업영화와는 달리 창작자의 의도가 우선시 된다. 말 그대로 자본과 배급망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개런티도 적을뿐더러 작업환경도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걔가 뭐가 아쉬워서? 지금도 잘 나가고 있는데.
“연기력으로 얘기 많이 나오잖아요. 잘하는데 빤하다고.”
-아직 중학생인데 어떻게 더 잘해? 비슷한 캐릭터라도 완벽히 소화하는 게 어디야.
“아무튼 소속사에서 이미지 전환을 좀 하려는 것 같아요. 얼굴이 청순하고 예뻐서 항상 비슷비슷한 캐릭터만 했던 데다, 연기력이 외모에 많이 가려지니까요.”
-하긴, 네가 연출하는 영화면 관계자들이나, 영화 좋아하는 관객들이야 다 찾아볼 거고.
“과찬이십니다.”
유태일은 시익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이미지 제대로 깨줘야죠. 일진 여동생 역할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 친구를 섭외하게 되면, 그 친구가 오빠 역할을 할 거고요. 이 두 명이 남녀 주인공입니다.”
-형제애라. 잘 만들어야겠네.
“그렇죠.”
-내가 소개한 녀석. 쓸지 말지 결정은 했고?
민영기는 다시 물었다. 후배 유태일이 이번 같은 기회를 놓치는 걸 원치 않는데다, 그가 길게 고민하지 않는 성격이란 것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 문자 보내야겠습니다. 선배님, 조만간 또 전화드릴게요.”
-그래. 수고.
민영기는 원하는 대답을 듣자, 담백하게 전화를 끊었다.
유태일은 남녀 주인공으로 결정한 이도원과 차지은에게 직접 문자를 작성했다.
*
이도원은 휴대폰을 보고 입이 귀에 걸렸다.
유태일 감독에게서 온 문자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함께 작업하게 돼서 기쁩니다.
오늘 오후 6시 전에 메일로 통대본 발송해 줄 테니, 문자로 메일 남겨주세요.
대본 리딩 시간은 다음 주인 6월 13일 토요일 오전 10시에 있을 예정이며, 장소는 오디션 봤던 중영대학교 203번 건물 8층 814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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