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9화 (19/178)

인연의 연결고리 (3)

KAS 미니시리즈 <만신전>의 조연출 민영기는 오디션이 끝나자마자, 함께 연출을 전공한 후배 유태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이번에 졸작(졸업작품) 들어가지?”

그는 밑도 끝도 없이 질문했다.

유태일이 막 일어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선배님. 예. 이번에 들어가야죠. 어제 철야촬영해서 이제 일어났습니다.

“나 KAS 방송국에 입사한 건 알고 있지?”

-예, 예. 그럼요.

“이번에 원석 하나 캤어.”

-예?

뚱딴지같은 소리에 유태일이 물었다. 그가 어떤 반응이건 민영기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내가 이번에 <만신전> 제작팀에 들어갔거든? PD님 대신 감독한 오디션에서 기가 막힌 녀석 하나 발견했어. 아직 고딩인데 연기력은 단역 급이 아니야. 주조연 주면 훌륭히 소화할 인재야.”

-남자 애죠?

“응.”

-남자 주인공이 성인 역할인데 고등학생이 소화할 수 있겠어요?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가장 추구하는 게 리얼리즘입니다.

“차고 넘칠걸. 배역이 몇 살인데?”

-스물일곱이요. 삭았어요?

“특수 분장 시켜. 충분히 가치 있다. 말론 브란도가 사십 대 때 <대부>에서 특수 분장하고 노인 연기 소화한 일화 알고 있지? 네 작품에서도 그대로 적용해서 출품하면 작품이나 연기자 모두, 관계자들한테 가십거리가 될 거야.”

-그렇게 해서까지 출연시킬 정돕니까?

“내가 졸작 했으면 바로 섭외했다. 한 번 직접 봐.”

설득이 끝났다.

민영기는 유태일이 인정하는 선배였다. 그는 중영대학교 연출과의 전설이기도 했다. 감독으로서 현장지휘능력이나 연출력, 섭외능력까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팔방미인이었다. 비록 지금은 영화 일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해 방송국 조연출로 갔지만, <만신전>이 흥행하는 이면에는 그의 능력도 분명 한몫 하고 있었다. 방송 쪽으로 진출한다고 했을 때 교수들이 가장 아쉬워했던 학생이 그였던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유태일이 대답했다.

-그 친구 번호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직접 보고, 저도 같은 생각이면 감사의 뜻으로 한 턱 쏘겠습니다.

“치사한 놈. 학교 때도 그렇고, 절대 공짜로 쏜다는 말은 안 해요. 문자로 번호 찍어줄 테니까 한 번 연락해봐. 우리 쪽 사람이 실수하는 바람에 배역 까고 갔는데, 성격이 보통은 넘더라.”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모난 배우랑은 작업 못 합니다. 연기를 아무리 잘해도 팀워크 망치면, 연기 못하고 말 잘 듣는 배우만 못하니까요.

“잘 알지! 그래도 싸가지 없다거나 무책임한 녀석은 아닌 것 같으니까 직접 보고 판단해 봐.”

-알겠습니다.

*

이도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요즘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많이 오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도원 학생 핸드폰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저는 중영대학교 연출과에 재학 중인 4학년 유태일입니다. 이도원 학생 번호는 KAS 방송국 조연출인 민영기 선배님한테 들었습니다.

“아, 네.”

이도원은 소름이 쫙 끼쳤다.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도 뜻밖이었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놀란 이유는 바로 유태일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단순히 동명이인인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따라서 전화를 건 상대가 이도원이 생각하는 유태일 감독이라면 그야 말로 기막힌 우연이었다. 유태일은 이도원이 타임 슬립하기 전,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이었다. 또한 그가 무성극을 할 당시, 새로운 작품인 <서커스>의 주연으로 이도원을 발탁했던 감독이기도 했다.

이도원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이번 저희 중영대학교 연출과에서 졸업 작품을 준비하는데요. KAS 드라마 <만신전> 오디션 보셨죠? 그곳에 있던 조연출이 제 선배입니다. 도원 학생에게 연락한 이유도 그 선배의 추천이 있었고요.

이도원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다니.’

전생에도, 지금도 영광스러운 기회였지만 그는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타임 슬립 전 죽음으로 연결되었던 상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들었지만, 이도원은 애써 물리쳤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정 알려주시면 맞춰서 가겠습니다.”

-학생이니까 학교 다니고 있을 테고… 6월 6일 토요일이 좋겠네요. 그날 중영대학교 정문에서 연락주시면 마중 나가겠습니다.

“예. 오디션 준비는 어떻게 해갈까요?”

-당일 상황을 드릴 겁니다. 그에 맞게 상황극을 해주시면 돼요. 아, 그리고 경쟁자들은 저희 중영대학교 연기과 학생들이 될 겁니다.

중영대 연기과라면 현존하는 최고의 학교들 중 하나였다.

이도원은 벌써부터 긴장감이 팽배하는 걸 몸소 느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예, 그럼 그날 뵙죠.

이도원은 유태일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전화가 끊어지기 무섭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야말로 기회를 잡는다.’

이도원은 유태일의 제안을 받은 뒤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에 충실했다. 연기를 할 때 순간적인 폭발력은 어떻게 못하더라도, 꾸준한 연습만이 안정된 연기력을 보장해주기 때문이었다.

*

그동안 이도원을 폭행했던 한태양이 소년원에 수감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또한 연극부 인원들에게는 벌금형이 떨어졌다. 그들과 결탁해 학교 공금을 횡령했던 시간제 강사는 사기대출건으로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으며 스포츠 도박 때문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당연히 형이 확정되었고, 조용한 파란이 일었던 학교 측은 외부에 사실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긴급조치를 취했다. 모든 일이 이도원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진 않았으나,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6월 6일 날 아침.

이도원은 동작구 흑석역에 위치한 중영대학교를 찾아갔다. 집에서부터 지하철로 한 시간 조금 안 되는 거리였다. 무사히 도착한 그는 기대 반 흥분 반으로 유태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그때 전화 주셨던 이도원이라고 합니다.”

-예. 지금 현장이니 이십 분 후까지 203번 건물 8층 814호로 와줄래요?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전화를 끊고 십 분에서 십오 분 거리의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여기가 중영대 연출과 건물.’

연극하던 시절 학교는 와 본 적이 있지만 연출과 건물은 처음이었다. 그는 8층 814호로 갔다.

강의실 앞 복도에는 딱 봐도 연기과 학생처럼 보이는 잘생긴 남학생 한 명과 개성 있는 외모를 가진 남학생 세 명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연출과 학생이 대기 번호를 나눠주고 있었다.

연기과 학생들은 이도원을 보며 웅성거렸다.

“성인 배역이라고 알고 있는데, 고등학생 아니야?”

“그냥 동안 아니야? 외부에서도 부른 건가?”

“그럼 이미지가 안 맞잖아. 게다가 우리 연기과가 있는데, 왜 굳이? 잘하는 앤가?”

같은 연기과인 참가자들끼리는 이미 친한 관계였다. 자연스럽게 이도원만 낙동강 오리알처럼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그때 번호표를 나눠주던 연출과 남학생이 말했다.

“유태일 선배님이 곧 오신다고 하네요.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배우님들. 아시다시피 유태일 선배님은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단편영화제에 출품하면서 본선까지 오르는 등 많은 이력이 있는 분이니 아마 같이 작업하게 되면 좋은 경험이 되실 거예요.”

그의 말은 이 자리의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유태일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꼭 같이 작업해 보고 싶네요.”

대기자들 중 잘생긴 남학생이 말했다. 연기과 학생들에게 일 년에도 몇 작품이나 하는 연출과 학생들은 잘 보여야 할 대상이었다.

연출과 학생이 대답했다.

“꼭 합격하시기 바랍니다.”

그걸 끝으로 문이 열리며 유태일이 들어섰다. 그는 연기과 학생들과 이도원의 면면을 한차례 훑으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유태일입니다. 다 같이 들어오시죠.”

그 말을 남긴 유태일은 강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연출과 학생이 반복해서 말했다.

“다 같이 들어가시면 됩니다.”

연기과 학생 하나가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단체 오디션이야?”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여러 명이 함께 오디션을 보게 되면 그만큼 긴장이 더 되는 건 당연했다. 그들이 줄줄이 들어가서 일렬로 서자 유태일이 입을 열었다.

“먼저 소개부터 들어볼까요? 다들 아시겠지만 전 유태일입니다.”

이도원은 젊은 시절의 유태일 감독을 보고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 반갑기도 했지만, 당장 오디션을 앞둔 긴장감이 더욱 컸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가 첫 번째 순서였던 것이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