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8화 (18/178)

인연의 연결고리 (2)

KAS 드라마 <만신전> 오디션 진행은 간단했다. 차례가 되면 한 사람씩 위층으로 올라가고 나머지는 로비에 남았다. 그들은 오디션이 끝나는 대로 인사만 하고 집으로 귀가했다.

순서가 중간까지 진행됐을 때, 학생들이 내정된 배역이 아니냐고 의심을 품었던 대상인 이현태가 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그렇잖아도 요즘 들어가는 작품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어서 바쁠 텐데.”

캐스팅 디렉터 정윤복이 너그럽게 말하며 덧붙였다.

“아직은 단역이지만 장차 주조연급 배우 됐다고 나 몰라라 하면 안 된다? 내가 섭외 요청하면 응해줄 거지?”

“당연하죠. 하하.”

이현태는 하얀 얼굴과 큰 키 덕분에 교복이 잘 어울렸다. 쌍꺼풀이 없는 눈이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비율이 좋아 한눈에 봐도 배우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 역시 이도원을 보고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저쪽 친구, 잘생겼네요.”

“잘생기긴 했지. 성격은 모르겠지만.”

정윤복이 대답했다.

이도원은 그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대본을 이어폰을 꼽고 대본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무튼, 곧 네 순서니까 바로 올라가. 대본은 볼 것 없지? 이번에도 어렵잖게 합격할 수 있을 거야.”

“하하, 모르죠. 뭐. 그래도 열심히 연습해왔어요.”

이현태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자신감이 넘쳤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역시 될 놈들은 애 같지가 않아.’

이현태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내려온 뒤에도, 몇몇 학생들이 더 오디션을 봤다. 학생들은 이현태를 보고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말을 붙이거나 하진 못했다.

그들 순서가 모두 끝나자 마지막으로 이도원의 차례가 왔다.

“자, 네 차례다.”

정윤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은 이어폰을 빼고 가방을 멘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

오디션을 볼 장소는 6층에 위치한 드라마국의 대본리딩장이었다. 그곳에는 조연출(AD)과 정윤복의 선임으로 보이는 캐스팅 디렉터가 함께 앉아있었다. PD나 작가는 보이지 않았다.

‘단역 오디션이니까.’

이도원은 납득하며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열일곱 살 이도원입니다.”

캐스팅 디렉터는 사십 대였고, 조연출은 이십 대였다.

젊은 조연출이 말했다.

“준비한 대사부터 해보세요.”

이도원은 삼 초 정도 지난 뒤 말했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신호로 이도원의 입이 열렸다. 독백대회에서 보였던 연극 연기와는 달리 발성이 적당히 버무려진 음성이었다.

“셰프 불러주세요.”

이도원은 턱 끝을 살짝 치켜든 채로 거만하게 말했다. 단역인 고객이 컴플레인을 넣는 장면인데, 현재 방영되고 있는 KAS드라마 <만신전>에서 앞으로 나올 예정이었다.

집중한 이도원의 눈에는 흐릿하게, 컴플레인을 듣고 달려오는 셰프가 보였다. 이도원은 여전히 고자세를 유지하며 말했다.

“꽤 자주 오던 곳인데, 맛이 조금 다르군요.”

잘 정제되어 있는 발성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실내를 꽉 채웠다.

연극으로 비유하면 극장 규모에 따라 발성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듯이, 방송연기도 부족하거나 과한 발성은 자칫 어설퍼 보이거나 오버하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그런데 이도원은 딱 적당한 발성을 썼다.

‘마치 프로 같군.’

음성만으로도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 조연출이 상대역 대사를 쳐주었다.

“어떻게 다른가요, 손님?”

감정 없이 읽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는, 갑작스러운 개입에도 이도원은 흐름을 유지했다.

“제가 높은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이곳을 이용하는 이유는 많은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음식에 강한 조미료 향이 섞여있고,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군요. 재료가 떨어졌든 셰프가 바뀌었든, 제가 레스토랑 내부 사정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바로 다시 만들어서 올리겠습니다.”

조연출이 대사를 하자 이도원은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그러길 바랐다면 긴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쪽은 환불해 주면 되고, 저와 제 지인들은 더 이상 이곳을 이용하지 않을 겁니다.”

대사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가 연기한 인물은 레스토랑의 위기를 고조시키는 목적의 단역이었기 때문에 두 번 나올 예정은 없었다. 이만하면 단역 치고 대사나 분량도 많은 편이었다. 어찌됐든, 이런 단적인 대사들을 통해 까다로운 상류층 손님을 표현하는 것이 오디션의 관건이었다.

이도원의 연기를 모두 지켜본 조연출이 말했다.

“표정이나 대사 둘 다 좋군요. 대본에 나와 있는 말투를 바꾸었는데, 작가님이 허락하실지 모르겠지만 대본 해석과 표현력이 돋보였습니다. 지금까지 학생들이 다들 진상 손님을 표현한데 반해 아주 정중하면서도 까탈스러운 연기가 인상적이고요.”

말을 마친 그는 옆에 앉은 캐스팅 디렉터를 보았다.

중년의 캐스팅 디렉터는 펜을 내려놓더니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잘 봤습니다. 수고했어요.”

그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그 말에는 이미 내정되어 있는데 더 볼 것 있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반면 조연출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자유대사도 한 번 보겠습니다.”

캐스팅 디렉터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조연출은 개의치 않았다. 외주업체인 캐스팅디렉터 보다 드라마 담당 PD의 전권을 갖고 오디션을 진행하는 조연출의 입지가 큰 것이다.

‘자유대사까지 시키는 걸 보면 내정되어 있는 후보를 바꿀 생각도 있다는 뜻 같은데...’

이도원은 응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렇잖아도 단역에 큰 관심이 없던 참이었는데, 이미 내정된 오디션이라는 것에 실망했고, 캐스팅 디렉터의 모습에 다시 한 번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다.

‘준비 못했다고 얘기한 뒤에 나갈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조연출에게까지 낙인찍혀서 좋을 건 없었다. 더불어, 해 볼 테면 해보라는 듯 비웃음을 머금은 캐스팅 디렉터의 표정을 바꿔주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이도원이 자연스럽게 다음 연기를 준비했다. 그 모습에 캐스팅 디렉터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독백대회 우승한 놈에게는 자유대사 얘길 안했을 텐데?’

그는 정윤복에게, 이현태와 경쟁자가 될 만한 이도원에게는 자유대사를 준비하란 말을 고의적으로 뺐다는 보고를 들었던 것이다.

한편 이도원이 보여줄 대사는 아직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이었다.

작품 속에서는 법정 공방이 치열한 가운데 단역으로 등장하는 변호사가 주인공을 변호한다. 그 변호사가 바로 타임 슬립 전 그가 맡았던 배역이었다.

이도원은 당황한 캐스팅 디렉터를 아랑곳 않고, 술술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원고 측에서 제시한 진술서는 그 증거능력이 없습니다.”

운을 뗀 이도원은 법정 한가운데 서서 판사에게 말하듯 고개를 조금 치켜들고 연기를 이어나갔다.

“비록 피고인이 진술서를 작성하였으나 수사기관이 그에 대한 조사과정을 기록하지 아니하여 절차를 위반한 경우 형사소송법 제 244조의 4, 제 3항, 제 1항의 절차를 위반한 것으로 간주하여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적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수사과정에서 진술서가 작성되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증거를 제출한 뒤 말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인이 ‘유서와 피고인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부분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판단한 감정서입니다. 이는 피고인의 유서를 위조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이도원의 힘있는 목소리가 법정 대신 리딩장을 꽉 채웠다. 조연출과 캐스팅 디렉터는 그들이 법정에 앉아있는 배심원이 된 듯 한 느낌을 받았다.

“따라서, 비록 여러 증거들이 제시되었지만, 그중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분한 증거는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이 사건의 요점입니다.”

어렵고 긴 내용을 간단히 소화한 그는 잠깐의 사이를 두고 긴장감을 고조시킨 채 대사를 끝맺었다.

”이상입니다.”

전문직 배역은 성인 연기자들도 애를 먹는 어려운 고난도 연기가 필요했다. 생소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관객을 몰입시키고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말투부터 섬세한 동작 하나까지 신경 써야 한다. 즉, 그야말로 연기를 맛깔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도원은 열일곱 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배역을 훌륭히 소화해버린 것이다.

조연출은 나직이 감탄했다.

“멋지군요. 잘 봤습니다.”

그의 표정을 본 캐스팅 디렉터는 이도원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쪽이랑 얘기된 게 있는데, 설마 쟤를 붙이시려는 건 아니죠?”

“내보내고 말씀하시죠.”

조연출이 대답했다.

이도원은 캐스팅 디렉터들이 무명배우에게 무례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우들을 섭외할 권한이 있다고 해서 ‘갑’의 행동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만약 이도원이 유명배우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백팔십도 바꾸겠지.’

보통은 가식이니 겉과 속이 다르니 하겠지만, 이쪽 바닥은 오히려 그 편이 상식적인 세계였다. 오직 인기에 따라 변하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곳.

이도원은 새삼 역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서있는 그를 보며 조연출이 말했다.

“그만 나가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가기 전 뜻밖의 말을 했다.

“만약 합격이 되더라도 이번 기회는 고사하고 싶습니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캐스팅 디렉터는 피식 웃었다.

“거 봐요. 몸이 안 좋다고 하잖습니까? 잘 됐습니다, 조감독님.”

조연출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찜찜한 기분으로 이도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리딩장을 빠져나왔다. 그는 혹시라도 이번 일로 찍히지 않을까 굳이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신경 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이도원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중요한 인물이 되면 언제든 얼굴색 바꾸고 달려들 테고.’

그렇다는 건 외롭고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했을 때 누구보다 달콤한 영광을 거머쥘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겉은 설익었더라도 속은 무르익은 이도원이야말로 냉혹한 현실과 약육강식의 세상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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