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연결고리 (1)
4월 하순에서 5월 초순의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는 금방 끝났다. 이도원은 평균 60점대의 성적으로 시험을 마쳤다. 중학생 때 보다 10점가량 떨어진 셈이지만, 공부에 열을 올린 덕분에 이해력 위주의 문과 과목은 성적이 올랐다. 그는 다음 계획을 착착 실행에 옮겼다.
이도원은 경찰서로 찾아가서 한태양을 신고했다. 합의를 보는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법정대리인을 대동할 의무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녹음파일이 들어있는 USB와 진단서를 제출하고 돌아왔다.
“조만간 서에서 출석 요청이 갈 거야.”
경찰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인 그는 폭행과 폭행교사를 한 일당의 형량을 인터넷에 문의했다. 답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폭행한 당사자는 형법상 폭행치상죄나 상해죄가 적용되게 됩니다. 또한 그를 교사한 여러 명의 고등학생들도 교사범으로 같은 형량을 받게 됩니다. 7년 이하의 징역, 10녀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게 됩니다.
보통 고등학생이라면 막연한 두려움에 법적인 조치를 꺼릴 수 있지만, 이도원은 얼마 전까지 서른일곱 살의 어른이었다. 주먹보다는 법이 익숙한 나이인 것이다.
‘전치 2주가 나왔으니 나머지는 벌금으로 끝날 거고, 한태양이란 놈은 전과가 있으면 징역으로 몰아갈 수 있다.’
그는 그들을 용서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얼마 후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이도원은 두려움 없이 출석했다.
경찰서에서는 한태양이 사건에 연루된 연극부 학생들의 이름을 줄줄이 호명하고 있었다. 그는 이도원을 보더니 질색했다.
“너 이 새끼…….”
아무리 날고 기는 양아치라도 형사 앞에선 꼬리 내린 강아지였다. 이도원은 시익 웃으며 담당 형사에게 인사하고 옆에 앉았다.
때마침 녹음기에선 한태양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여간 또 쓸데없는 짓 했다간 내 얼굴 다시 볼 일 있을 거다. 알겠지?
이도원은 그를 보며 말했다.
“네 말대로 다시 봤네.”
“너도 자극하지 말고 빨리 마무리 짓자. 니들이 강간을 한 것도 아니고 살인을 한 것도 아니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빨리 넘어가자고. 폭행교사 한 학생들 명단은 모두 받아뒀으니 조사 끝나는 대로 보호자랑 같이 소환할 거야.”
그러고 보니 한태양은 보호자가 없었다.
“애는요?”
이도원이 묻자 형사가 대답했다.
“걘 보호자가 없다. 합의 없이 이대로 끝나면 다시 소년원으로 가게 될 거야. 괜찮겠니?”
형사가 물었지만 그의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대로 진행해주세요. 사정이야 딱하지만, 그렇다고 지은 죄가 정당화되진 않으니까요.”
“널 부른 건 검찰에 보낼 진술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상황을 작성해 주고 가면 돼.”
이도원은 그 말에 따라 진술서를 작성하며 물었다.
“폭행을 교사한 나머지 학생들 명단도 드릴게요. 누군지 알고 있거든요. 저놈이 진술한 내용과 대조해보시면 될 거예요.”
“똘똘하구먼.”
형사가 나직이 감탄했다.
이도원은 진술서를 비롯해 사건에 가담한 이태곤, 유희찬, 박상민, 송건규의 이름을 나란히 적었다.
“이 친구들은 죄를 인정하고, 네게 도의적인 사과도 하고, 처벌도 받게 될 거야. 하지만 대개 이런 경우 벌금으로 끝나고, 이 친구들 부모님들이 오셔서 학교에 알려지는 것만은 막아달라고 부탁하실 가능성이 크다. 네가 원하면 알리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보통 알리지 않는다. 일단 초범들이고 정학이나 강제전학, 퇴학으로 이중처벌을 받게 되면 재범할 확률이 높거든.”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도원이 바라던 바였다. 새로운 연극부를 만들려면 인원수를 채워야 한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현재는 다들 특별활동을 들고 있는 학기 중이기 때문에 친구가 별로 없는 이도원 입장에선 인원수를 맞추는 일이 가장 골칫거리인 것이다.
‘작은 판단과 실수들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이번 기회에 느껴봐라.’
명단과 진술서를 제출한 이도원은 경찰서를 나왔다.
*
폭행 사건을 일단락 짓자 또 숨 돌릴 틈 없이 5월 13일 오디션 날이 다가왔다. 그동안 독백대회 우승 문자가 왔다. 기쁜 소식과 함께 학업에만 힘을 쏟았던 이도원은, 정작 <만신전> 오디션 대본을 출력해 두기만 하고 방치해 뒀다.
이도원은 지하철을 타고 9호선, 여의도 샛강 역에 위치한 KAS 별관 1층 로비로 갔다. 그곳에는 이도원 나이 또래의 남학생들 열두 명이 이곳저곳 앉아 쪽 대본을 보고 있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도원도 급급히 쪽 대본을 펼쳐들고 집중한 상태로 연습을 했다. <만신전> 통대본의 일부만 발췌한 쪽대본이라 전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오디션 볼 인물의 상황 정도는 대사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때 전화로만 목소리를 들었던 캐스팅 디렉터 정윤복이 나타났다. 캐주얼한 복장을 입은 작은 키의 남자였다.
“<만신전> 오디션 온 애들 맞지? 명단 체크할 테니까 이름 부르면 대답해.”
쭉 이름을 부르던 그는 마지막에 가서 잠깐 멈췄다.
“이도원. 네가 이도원이냐?”
“네.”
“음… 알겠다.”
정윤복은 눈살을 찌푸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꼬운 눈치에 이도원은 순간 울컥했지만 참았다.
‘연기로 보여주자.’
다짐하고 있는데, 정윤복이 뜻밖의 소리를 했다.
“다들 자유연기 하나씩 준비했지?”
“네!”
학생들이 대답했다.
이도원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정윤복은 그에게 자유연기를 준비하라고 언질 한 적이 없었다. 이도원만 쏙 빼고 통보한 것이다.
‘유치하게 노는군.’
그는 피식 웃었다. 정윤복의 수작질이 가소로워 보였다.
타임 슬립 전, 15년 이상을 배우로 살아왔던 이도원이었다. 제대로 된 배우는 언제든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자유연기가 한두 가지는 있다. 더군다나 대학 때 연기과를 졸업하고,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영화, 드라마, 연극에서 다양한 활동을 보였던 그로서는 자유연기 할 작품을 고르는 일만 남은 것이다.
‘한 번 했던 작품의 인물은 죽어서도 잊어먹지 못하는군.’
이도원은 타임 슬립 전 한 영화에서 연기했던 조단역 때의 대사가 선명히 떠오르자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정윤복은 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톡 쏘았다.
“넌 긴장이 안 되나 보군.”
“자유연기도 함께 준비하라고 너무 잘 말씀해주셔서, 열심히 준비해 왔거든요.”
이도원은 일부러 강조해 말했다. 정윤복의 옹졸한 수작을 반어법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를 빤히 보던 정윤복이 대답했다.
“그래?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명단 순서는 이도원이 마지막이었다. 이것 역시 정윤복의 노림수일 확률이 컸다.
첫 번째 순서가 가장 부담이 크지만, 금방 오디션을 끝내고 홀가분하게 일찍 귀가할 수 있다. 반면 마지막 순서는 그동안의 초조함을 고스란히 느껴야 한다. 오디션 내용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면 불안감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다.
‘내게는 오히려 연습할 시간을 준 셈이지만.’
이도원은 내심 웃었다. 그렇잖아도 준비가 덜 된 상태였는데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같은 처지에 금방 친해진 학생들은 저마다 긴장감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 떨려. 그래도 혼자 보는 게 어디야?”
“두 명 씩 봤으면 더 떨릴 뻔.”
“아, 됐으면 좋겠다.”
한 마디 씩 했을 때 한 남학생이 은근하게 알고 있는 정보를 풀었다.
“내가 예전부터 보출(보조출연)했었거든? 그래서 디렉터 형이랑 좀 친한데, 오디션 합격자는 이미 내정되어 있다고 그러던데? 아까 명단에 이현태라고 있었지? 걔 소속사 있는 배우 연습생이래.”
“에이, 설마. 그럼 왜 이 고생을 해?”
“다 쇼지. 그냥 넣으면 나중에 연줄이니 뭐니 말 많으니까.”
학생들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이도원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타임 슬립 전 드라마 출연을 몇 번 했었던 그로서는 방송 쪽이 달갑지 않은 이유기도 했다. 모든 방송이 그런 건 아니지만 방송 쪽은 오디션 전에 이미 배역을 내정한다거나, 출연료 지급이 늦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드라마는 빡빡한 방송스케줄상 시간이 생명이기 때문에 현장 분위기가 가장 험악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오디션까지 배역이 내정되어 있을 줄이야.’
드라마 <만신전>의 A팀 카메라 감독인 박서진의 아버지에게 제의 받은 오디션이었기 때문에 더욱 의외였다. 물론 박서진의 아버지는 거기까지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이런 오디션인 줄 알았으면 이도원은 정중히 사양했을 터였다.
‘새 삶에서 보게 된 첫 오디션이 들러리였다니.’
안 그래도 달갑잖은데, 그 점부터 심사가 뒤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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