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인 배우, 기술적인 배우 (6)
무대가 끝나고, 이도원은 떨리는 마음으로 이상백이 머무는 교수실로 갔다. 그가 있는 연기과 건물은 극장과 가까운 건물에 위치해 있어 찾기 쉬웠다.
교수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자 안으로부터 젊은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그곳에는 학과장 이상백과 학회장 고명진이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젊은 목소리의 정체는 고명진이었던 것이다.
“연기 잘 봤습니다. 이도원 참가자! 그리고 교수님. 그런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분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이상백이 고개를 끄덕이자, 고명진은 이도원의 어깨를 두드리고 교수실을 나갔다.
“앉지.”
그 말에 이도원은 이상백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타임 슬립 전 각별한 사이였던 이상백과 재회하던 순간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네 연기는 인상적으로 봤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더구나.”
“감사합니다. 과찬이세요.”
“처음에는 널 오해했다. 대부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은 자만하기 때문이지. 그렇게 주변에서 칭찬만 받고 별 어려움 없이 대학까지 진학을 하게 되면, 그 시절을 못 잊어서 발전 없이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니까. 그러다보면 연기에 고집이 생긴다. 차라리 현장에서 구르면 대선배들에게 겸손을 배우고, 자신과 비슷하거나 자신 보다 뛰어난 프로들을 보기 때문에 뻣뻣한 고집을 버리는 게 쉽지. 이쪽 세계는 연기력만으로 통하는 판은 아니야.”
이도원은 그 말뜻을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경청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상백의 가르침을 받는 것도, 그에게 목소리를 내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마냥 행복한 것이다.
반면 이도원과 초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상백은 말을 이었다.
“무대와 스크린은 좀 다르다. 무대가 생방송이라면 스크린은 녹화방송인 셈이지. 생방은 이러나저러나 연기를 잘해야 하지만 녹화는 시간만 있다면 편집도 하고 현장에서 다듬기도 하니까. 영화판은 연극배우들의 가세로 많이 바뀌었다지만, 방송에서 여전히 연기력 보다 비주얼을 보는 것도 그러한 이유인 거고. 감독 입장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넌 두 가지 모두 갖춘, 찾기 힘든 배우다.”
“그렇군요.”
이제 이도원은 그의 목적이 슬슬 궁금해졌다. 이상백은 자신도 말이 길어졌다고 여겼는지 본론을 꺼냈다.
“넌 비주얼도 연기도 훌륭하니 활동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을 거다. 하지만 대학교 진학을 선택한다면 꼭 우리 학교에 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본교는 2학년 때까지 대외적인 활동이 금지되어 있어서 그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이도원은 이상백이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도원을 탐내고 있는 것이다.
이도원 역시 한예대가 2학년 때까지 활동 금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아직 이 년 정도 남았으니 충분히 생각해보겠습니다.”
“알겠다. 그리고 이건 내 명함.”
이상백은 이도원에게 명함을 넘겼다.
“연기적으로 막히는 부분이 있거나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거나 언제든 편하게 와도 된다.”
데자뷔까진 아니더라도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끼는지, 그 역시 꽤나 호의적이었다.
‘하긴. 원래도 연기를 볼 때만 얼음장 같았지, 평소에는 지나칠 만큼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이런 점은 여전하군.’
이도원이 기억하는 이상백은 이중인격이라고 오해를 불러올 만큼 공과 사가 뚜렷한 사람이었다.
이도원은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대신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
이상백을 만나고 나온 이도원은 기가 막혔다. 한예대 정문에서 뜻밖의 얼굴과 다시 마주친 것이다.
그곳에는 박아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을 쏟으며 무대를 내려갔던 그녀의 두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이도원이 물었다.
“무슨 일로?”
“이대로는 억울해서 그냥 못 가겠어.”
박아현이 대뜸 말을 놓으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네 번호.”
이도원의 입장에서는 돌발행동의 연속일 뿐이었다.
“아니, 괜찮아.”
거절한 그가 덧붙였다.
“어차피 이 바닥에 있으면 다시 볼 얼굴인데, 그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하고 있어라.”
이도원은 박아현을 지나쳐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네가 그렇게 잘났어? 너한테 관심 있어서 물어보는 거 아니야. 네 연기에 관심이 있어서 물어보는 거거든?”
“그게 그거지.”
“날 그렇게 짓밟아놓고 이 정도도 못 알려줘?”
“그건 네 착각이고.”
이도원은 그녀의 연기력을 인정했지만 경쟁자로 생각하진 않았다. 결정적으로 그는 이성이든 친구든, 박아현 같은 스타일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대로 박아현은 이기적인 성격이었고,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좋아. 그럼 내기해.”
“무슨 내기?”
“연락 안 할 테니까 지금 번호 교환하고 대회 나갈 때 나한테 알려줘. 다른 대회에서 다시 만나. 그땐 내가 널 이길 테니까! 내가 이기면 날 다신 무시하지 않기로 내기해.”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딱히 그녀를 무시한 적은 없었지만 그런 도전이라면 얼마든 받아줄 의사가 있었다. 그는 박아현의 휴대폰에 번호를 찍은 뒤 돌려주며 말했다.
“그럼 열심히 해보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박아현에게서 수고했다는 문자가 왔지만 번호만 등록하고 답장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락하지 않겠다면서 10분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박아현이 보였던 승부욕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인정하는 연기를 보인 이도원에게 관심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정말 단순하게 이도원의 외모를 보고 반했을지도 모른다.
이도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들이란… 역시 소녀감성이 풍부해.’
그는 다리를 절룩이는 게 불편해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해보니 어머니는 일을 나가셨고, 누나 이다원은 머리띠를 졸라매고 열공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이도원과 같은 학교였으니 그 역시 무관한 일은 아니었다.
“동생이 왔는지 갔는지도 모르고 공부를 하다니, 아주 대성하겠어.”
그는 어머니 말투를 따라 하며 이다원에게 말했다.
이다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도원을 나무랐다.
“너도 예체능 한다는 핑계로 공부 안 할 궁리만 하지 말고 공부 좀 해! 학교에서 연기 잘하면 중간고사 안 보게 해준다고 하디?”
그녀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사실 이도원도 그 점이 불안했다. 얼마 전까지 서른일곱 살의 연기자로서 살아가던 자신이 중간고사 점수를 받으려면, 아마 다 까먹은 중학교 교재부터 파야 할 터였다. 그래서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알아서 할게.”
이도원은 휑하니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침대에 몸을 던진 채로 찜찜한 기분에 시달렸다. 홀가분하게 독백대회를 끝냈더니 이제 중간고사가 말썽이었다.
아마 그의 열일곱 살 때보다도 성적이 떨어질 테고, 누군가에게 배움을 청하면 거의 백지화된 머릿속이 들킬 게 뻔했다. 그럼 분명 의심을 사게 될 터였다.
‘이도 저도 못하는구나. 이대로 시험을 망치는 수밖에 없을까?’
잠깐 그 상황을 떠올리던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하필이면 누나 이다원이 공부를 잘해서, 완전히 망쳐놓으면 그냥 넘어가는 게 불가능했다.
“평균 칠십…….”
일기장에 적힌 중학생 때의 성적은 이도원에게 어떤 산 보다 넘기 어려워 보였다. OMR카드에 밀려 썼다고 핑계라도 대려면, 어느 정도 납득될 만큼의 점수를 받아야하는 것이다.
“공부는 왜 그렇게 잘했었니.”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이도원은 전략을 세웠다.
‘일단 대회 우승도 했으니, 하는 데까지만 해보자.’
이도원이라고 어머니를 속이는 것이 마음 편할 리 없었다. 아예 타임 슬립을 한 걸 밝힐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더 큰 걱정만 끼치게 될 것이 빤했다. 어쩌면 과대망상증으로 취급받아 연기를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절대 안 돼.”
그야말로 끔찍한 생각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시험기간 때까지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해보는 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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