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대회 (3)
이도원은 자신이 선택한 <벚꽃동산>의 로빠힌에게 극도로 몰입하며 시선을 허공에 고정시켰다.
순간, 상대역이 눈앞에 그려졌다.
‘뭐야?’
이도원은 갑작스러운 현상에 놀랐다. 독백을 할 땐 주변 환경과 사물, 상대역이 있다고 상상하며 연기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상상을 해도 지금처럼 뚜렷하게 형상화(形象化) 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연기의 흐름을 이어나가야만 한다.
이도원은 한발 앞으로 나서며 비장하게 말했다.
“제가 샀습니다.”
묵직한 단 한마디. 하지만 그 한마디가 참가자 명단을 넘겨보던 이상백의 시선을 무대로 돌렸다.
이도원이 바라보는 곳. 그의 눈에만 보이는 상대역이 벚꽃동산의 열쇠를 집어던진 뒤 경매장을 박차고 나갔다.
이도원은 그녀를 뒤돌아보지 않고 경매장 사람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모두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부탁합니다. 머리가 어지러워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네요…….”
그는 흔들리는 동공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말미에 웃음을 흘렸다.
“섬세하군.”
이상백이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심사위원들에게만 들렸을 뿐 무대까지 닿진 않았다. 그는 책상 위로 깍지를 끼며 턱을 괴었다.
이도원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경매장에 갔더니, 제리가노프가 벌써 그곳에 와있었어요.”
그는 영웅담을 늘어놓듯 가슴을 활짝 펴며, 자신이 제리가노프를 상대로 입찰경쟁에서 이긴 과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벚꽃동산의 농노에 불과했던 자신이, 주인이 되었다는 흥분과 희열에 휩싸인 표정으로 덧붙였다.
“…결국 제게로 낙찰되었어요. 이 영지는, 이 벚꽃동산은 제거에요. 제거라고요! 아아, 하나님 벚꽃동산이 이제 내거예요.”
이도원은 대사를 이어나가며 호흡을 바꾸었다.
호흡이 빨라지면서 회한과 분노가 조금씩 드러났다. 흥분을 참으려 하듯이 목소리 톤은 유지하되 미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발을 굴렀다.
“하지만 저를 비웃지는 말아주세요!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무덤 속에서 저를 보셨으면 좋았을 거예요! 매일 매나 맞고 제대로 글도 읽지 못했던 돌대가리, 겨울에도 맨발로 뛰어다니던 이 로빠힌이 백과사전에도 나오는 아름다운 영지를 샀으니까요.”
그를 보며 이상백은 강둑이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언성을 높이지 않았음에도 설음이 폭발적으로 쏟아진 것이다.
‘연기력으로 압도하고 있다. 이런 무대장악력은 재능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데…….’
이상백이 내심 감탄했다.
이도원이 발성이 부족하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성을 자극했다. 호흡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극을 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마저도 이상백의 날카로운 청각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발성을 호흡으로 완전히 가려버렸군.”
그는 노련한 연극배우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영악한 임기응변을 이곳에서 볼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연기를 잘하려면 여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눈앞의 어린 학생이 그걸 해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도원은 처음과 달리 완벽하게 몰입된 상태였다. 설음이 극에 달하며, 오히려 그의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농노로 지냈고, 여기 부엌조차도 들어가지 못했던 그 영지를 내가 산 거예요.”
이도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좌중에게 물었다. 그는 맨 처음 여인이 집어던졌던 열쇠를 줍고는 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열쇠를 집어던졌군요.”
웃음기가 씻은 듯 가셨다.
“상관없어.”
다음 대사를 이어나가려는 그 순간, 이상백이 손을 흔들었다. 신호에 따라 이도원은 연기를 멈췄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심사위원들이 헛기침을 토했다.
유일하게 이성적으로 모든 연기를 지켜본 이상백이 말했다.
“발성은 조금 부족했지만 발음이 또렷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고, 결과적으로는 무대장악력이나 연기력으로 커버가 됐다. 호흡 갖고 놀면서 감정을 만들어냈지. 실제로 사물을 보고 있는 것처럼 시선처리도 완벽하더군. 관중들은 배우의 시선과 호흡에 이끌리기 마련인데…….”
그는 이제껏 독백연기를 보며 처음으로 평을 했다. 그러나 이어진 뒷말이 이도원의 의표를 찔렀다.
“네가 하는 연기는 단순한 재능으로 치부할 수 없어. 현장에서 혀를 내두를 만한 연기를 펼치는 아역들도 스크린으로 보면 모를까, 직접 봤을 때 그런 느낌을 주진 못한다. 흔히 그걸 무대장악력이라고 하지. 관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말이야. 그 나이에 이런 연기를 보여주는 건 어울리지 않는군.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이름이 뭐라고?”
이상백은 그를 보고 느낀 이질감을 표현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마치 타임 슬립을 했다고 고백해도 믿을 것처럼 말했다.
이도원은 간담이 서늘했다.
‘역시 날카로운 양반이야.’
자신만의 연기 스타일을 갖기에는 이도원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이상백이 말했듯이 그건 재능이 아닌 관록이 필요한 일이니까. 그런데 이도원은 그걸 갖고 있었다.
“89번 참가자 이도원입니다.”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상백이 아무리 궁금해해도 이 자리에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더 큰 문젯거리가 있었다.
‘씻은 듯이 사라졌어.’
그가 연극을 시작할 때 보았던 주변 배경이나 사람, 열쇠의 형상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현상에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도원은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확인해봐야 해. 아까 그게 뭐였는지.’
한편 이상백은 빤히 그를 보다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내려가라.”
이도원은 성큼성큼 무대를 벗어나 제자리에 착석했다.
“다음 90번 참가자…….”
그는 호명하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오늘 무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
이도원은 한국예술대학교를 나와서도 기분이 찝찝했다. 처음 겪어보는 현상에 불안한 마음이 든 것이다.
‘되살아난 부작용인가?’
어쩌면 되살아난 뒤 신체가 아닌 정신에 이상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그가 알아낸 사실은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올려서 연기에 몰입하게 되면 상상하는 것들이 형상화된다는 것이다. 물론 안개처럼 흐릿하게 보여서 현실의 사물과 구분할 수는 있었다.
그는 이 괴현상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짐작할 수 없었다.
‘정신과를 한 번 가봐야겠어.’
몸에 이상이 생기면 병원을 가봐야 한다. 정신에 이상이 생겨도 정신건강의학과를 가봐야 한다는 게 이도원의 생각이었다. 단순한 환각으로 치부하기에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는 집에서 나왔을 때와 달리 걸어가는 쪽을 선택했다.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걷는 편이 좋았기 때문이다.
‘예선도 끝났으니 남은 건 결과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그나저나 이상백 감독님, 은근히 소심한 면이 있는데. 대답 똑바로 안 했다고 떨어트리진 않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골목 귀퉁이를 막 돌았을 때였다.
“네가 이도원이냐?”
이도원이 고개를 들며 뒤를 보았다. 정신을 팔고 걷느라 누가 쫓아오는지 전혀 못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머리를 반삭하고 한 덩치 하는 남자가 있었다. 유난히 팔이 길고 어깨가 넓었으며 목을 타고 문신이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존댓말 해. 새끼야.”
그는 다짜고짜 주먹부터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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