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9화 (9/178)

독백대회 (2)

한국예술대학교는 차로 오 분 거리였다. 택시로는 기본요금이었다.

택시를 잡은 이도원이 말했다.

“한예대 정문으로 가주세요.”

택시가 출발했다.

택시기사는 백미러 너머로 이도원을 보더니 물었다.

“어디 연주회 가시나?”

“아뇨! 연기합니다. 지금은 독백대회 가는 길이에요.”

“연기? 한 번 해봐요. 내가 관객이 되어줄라니까!”

뜻밖의 제안에 이도원은 반색했다. 그는 호흡을 배 아래까지 들이마신 뒤, 힘차게 목소리를 뱉었다.

“가! 나! 다!…….”

택시기사는 자신의 입을 저주했다. 한순간의 말실수 덕분에 거의 오 분 동안 한글만 외치는 것을 꼼짝없이 들어야 했다.

“아니, 연기하겠다며?”

이도원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연습도 연기의 일환이죠. 독백대회가 코앞인데 조금이라도 목을 풀어야 돼서요.”

밉지 않은 학생이었다. 얼굴이 잘생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말투나 행동이 바르고 호감이 갔다.

택시기사는 기분 쓴다는 투로 대답했다.

“듣다 보니 우렁찬 게 시원시원하고, 마음가짐도 좋구먼! 대신 꼭 우승해요.”

물론 한 가지 다짐도 잊지 않았다.

‘내 연기하는 손님 태우고 다신 연기 시키나 봐라!’

한편 이도원은 그 덕분에 성대와 얼굴 근육을 조금이라도 더 이완시킬 수 있었다. 근육이 이완되면 긴장도 슬슬 풀리기 마련.

연습하는 사이 한예대에 도착한 이도원은 택시요금을 계산하고 내렸다. 머리 위로는 [한국예술대학교 청소년 독백연기 경연대회]라는 큰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택시기사는 출발 전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염불 외는 줄 알았네. 아무튼 꼭 일 등 하시게!”

“감사합니다.”

이도원은 성큼성큼 한예대 정문을 지나 예선이 열리는 ‘이말수 예술극장’으로 갔다. 한예대 학술회관으로 이말수라는 명배우를 기리며 만들어진 곳이었다.

극장 앞에는 한예대 연기과 학생들이 길 안내를 맡고 있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독백대회 참가자들이 그들을 동경과 부러움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장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도원은 불쑥 향후 행보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나도 대학을 가야 할까?’

전생에서는 그 역시 대학교 연기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까지 한 번 받았던 교육을 다시 받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학벌사회가 아니라면 고민하지 않았을 내용이었다.

‘뭐, 아직 이 년이나 남았으니까.’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얼마나 발전할지 알 수 없었다.

이도원은 고민을 훌훌 털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번호표를 받고 지정된 좌석에 앉는 식이었다.

극장 안에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객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기다리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초조하기 때문이다.

극장 안을 본 순간, 이도원은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다.

“무대.”

입술을 비집고 한 마디가 나왔다.

얼마 만에 돌아온 무대인지, 오랜만에 무대를 마주하자 심장이 서서히 두근거렸다. 이도원은 눈을 감고 이 감정을 구석구석 음미했다.

무대는 신비로운 흥분을 불러온다. 무성극을 하며 객석이 꽉 들어찬 만석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단 한 명이라도 관객이 보내는 눈길과 박수는 배우에게 단비를 내린다.

그때 무대로 한 사람이 등장했다.

“아-, 아-.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한국예술대학교 청소년 독백연기 경연대회 사회를 맡게 된 연기과 학회장 고명진이라고 합니다. 이제 입구에서 받은 번호대로 착석해주세요.”

그의 말에 따라 학생들이 객석을 채워나갔다.

이도원의 번호는 89번이었다. 발표 순서는 1번부터 진행되는데, 총 123명의 지원자가 있었다.

심사위원석은 객석을 등지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입시 형식으로 진행되는군.’

한예대에서 개최한 대회라 그런지 대학입시 실기시험장 분위기였다. 모두 착석하자 사회자 고명진이 입을 열었다.

“예선 때는 많은 참가자의 연기를 보기 때문에 빠르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번호가 호명되면 한 분 씩 나와서 준비한 자유대사를 하시면 됩니다. 아쉽지만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쉬우시죠?”

그는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극장 불이 일제히 꺼지며 무대 위로 한 줄기의 밝은 조명이 들어왔다. 객석에 앉아 그 장면을 본 이도원은 침을 꼴깍 삼켰다.

저 위로 올라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연기를 펼쳐야 한다는 부담과 압도적인 극장 분위기가 어우러지자 학생들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반면 이도원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제 시작이다.’

수많은 명배우들이 말한다. 배우의 원동력은 두려움이라고. 바로 이 긴장감과 두려움을 즐길 줄 알아야만, 흥분과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심사위원이 손을 내저었다.

백 명이 넘는 참가자를 모두 봐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무대는 1분 미만으로 잘려나갔다.

방금까지 연기를 하던 88번 참가자는 객석에 깔린 그림자만큼이나 어두운 얼굴로 무대를 내려왔다. 물론 백 퍼센트 만족할 수 없는 무대가 대부분이지만, 연기가 중간에 잘리면 그 허무함이 배우를 짓누른다. 시원섭섭하다는 건 무대를 끝까지 소화했을 때의 이야기인 것이다.

“다음.”

심사위원의 신호에 스피커가 울렸다.

“다음 참가자는 89번 이도원 군입니다.”

이도원은 객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무대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가며 머릿속이 하얘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꼈다. 백 번 천 번 무대를 서도, 배우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받는 느낌이었다.

‘완벽해지려고 하지 마라. 잘 보이려고 하지 마라. 배우가 가진 모든 것을 해소해 낼 수 있는 연기를 해라.’

이도원이 천천히 무대 중앙에 섰다. 그리고 객석으로 몸을 돌렸을 때, 그는 뜻밖의 얼굴을 보았다.

‘이상백 감독님?’

타임 슬립 하기 전, 무성극단에서 활동할 당시 극장주였던 이상백 미술감독이 그곳에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학과장 이상백]이라는 심사위원 명패가 보였다. 옛날에 교수 겸 무대연출을 했었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설마 한국예술대학교의 학과장이었을 줄은 짐작도 못 했다.

비록 20년이나 젊어졌지만 쌍꺼풀이 없는 매서운 눈매와 매부리코, 깡마른 얼굴도 틀림없는 그였다. 파뿌리처럼 희었던 머리가 검어지고, 주름살이 조금 사라졌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그는 이도원에게는 무성극단을 만들 수 있게 해준 투자자이자 은인이었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를 만났다는 기쁨과, 그는 자신을 못 알아본다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가슴속에서 한차례 태풍이 휘몰아치자 도저히 로빠힌으로서의 감정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뭐지?”

이상백은 타임 슬립 전처럼 따뜻한 모습이 아니었다. 날카롭고 곤두선 연출자의 서릿발 같은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이도원은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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