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으로 (4)
이도원이 선택한 독백대회 작품은 <벚꽃동산>이었다.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홉이 살았던 1800년대에서 1900년대 초반 시대를 반영하는 작품이다.
다른 의미에서는 입시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독백작품이기도 했다. 따라서 신선하진 않지만 그만큼 친숙했다. 이도원은 어설프게 신선할 바에는 완벽하게 친숙한 쪽을 택했다.
그는 매스를 든 의사처럼 펜을 들고, 선택 작품 <벚꽃동산>과 연기할 인물인 로빠힌을 해부했다.
로빠힌은 벚꽃동산의 농노 출신이었지만 자수성가해서 돌아온 뒤, 벚꽃동산이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한 것을 알게 된다. 로빠힌은 귀족들에게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벚꽃동산을 지키려 하지만 외면당하자 직접 매입해 벚꽃동산의 주인이 된다. 그 과정에서 실리를 위해 신뢰와 사랑을 저버린다.
‘로빠힌은 극 중 유일하게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다. 수년 만에 단단한 얼음을 깨고 나오듯이, 희비가 엇갈리는 감정을 강렬하게 담아내야 해.’
공책이 빼곡하게 분석을 마친 이도원은 손가락 사이로 펜을 돌렸다. 이제 대사에 숨결을 불어넣을 차례였다. 그는 먼저, 독백할 때마다 일일이 녹음하며 자신이 안 좋은 쪼(연기의 버릇)가 있는지 거듭 확인했다.
‘호흡이 끊겨. 어미도 떨어지고. 소리도 먹는다.’
이도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기를 처음 하는 사람에게서 흔하게 나타나는 문제점들이었다. 자신감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모든 원인은 기본기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원인을 안다는 건 개선할 수 있다는 뜻.’
이도원은 먼저 체력단련과 스트레칭을 한 시간씩 병행하며 총 두 시간 동안 몸을 이완시켰다. 말이 좋아 두 시간이지 땀이 비 오듯 흘러 옷이 흠뻑 젖었다. 이걸 웜업(warm up; 준비운동)이라고도 한다.
그는 평소처럼 운동을 마친 후 호흡을 시작했다. 몸을 꼿꼿이 세우고 숨을 끝까지 들이 쉰 다음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참았다.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속으로 30초를 세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난 뒤 다시 30초 동안 참았던 숨을 조금씩, 일정하게 잇새로 내보냈다.
“스으으으으으-.”
산소부족으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무려 두 시간 동안 호흡을 반복했다.
다음은 발음과 발성을 연습할 차례였다. 이도원은 자음 열네 자에 모음 스물한 자를 대입해 한 글자 씩 끊어서 뱉어냈다. 그는 목과 가슴에 힘을 빼고 오직 뱃심만으로 발성했다.
“가! 나! 다!…….”
한 세트를 마친 이도원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되, 이번에는 글자를 길게 늘여서 하품하듯 길게 뽑아냈다. 여전히 배에만 힘을 주었다.
“가- 나- 다-…….”
글자를 말할 때는 입을 크게 벌리고 얼굴 근육을 최대한 사용했다. 이도원은 발성 연습도 두 시간을 채웠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땀에 젖은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섰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이도원은 아직도 연기를 할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특히나 목소리가 나올 때 흥분은 주체할 수 없었다. 매일 밤, 아침에 눈을 뜨지 못 할까 봐 불안할 만큼 20년 전 과거로 돌아온 사실이 꿈만 같았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이제 독백대회까지 일주일.
학교가 파하면 오후 다섯 시쯤 집에 도착한다. 총 여섯 시간 동안 기본기를 닦으면 벌써 밤 열한 시. 어쩔 수 없이 새벽 네 시부터 아침 일곱 시까지 하던 아침 운동 시간을 독백 대사 연습으로 대체했다. 뿐만 아니라 등하굣길, 심지어 쉬는 시간까지 대사를 입에 달고 다녔다. 늘 한 손에는 휴대폰 녹음기를 켜놓은 채로.
이도원은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졌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방에 틀어박혀 시끄럽게 연습하고 있는 그를 보며 물었다.
“대체 요새 뭐하고 다니는 거니? 네 누나가 시끄럽다고, 고성방가로 경찰에 신고한다더라.”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은 머쓱해졌다.
요새 그가 자주 이상행동을 보이는 바람에 다들 걱정하고 있었다. 누나 이다원도 툴툴거리기나 했지 직접적으로 간섭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이 그를 이해해 주었다. 그에 반해 정작 자신은 독백대회에 정신이 팔려 소중한 가족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사람은 간사하다고, 새 삶을 얻고도 그 새 가족의 소중함을 간과했다.’
이도원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주변 연습할 만 한 곳을 살폈다. 연습실은 비용이 만만찮기 때문에 오래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머니에게는 용돈으로 독서실에 다니겠다고 안심을 시켜놓고 아파트 공사장을 찾아갔다. 연습비를 벌려고 노가다를 뛰거나 하는 눈물겨운 사연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이곳이 넓은 부지의 공사가 중지된 곳이라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듣는 이 하나 없기 때문이었다. 오밤중까지 사방이 트인 공사장에 있으려니 무섭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연기 연습을 하기에는 훌륭했다.
연습장소가 집에서 공사장으로 바뀌면서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넓은 무대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연기 동선을 짤 수 있게 된 것이다.
*
이도원은 독백대회 하루 전인 금요일 날, 등굣길에 박서진을 만났다. 워낙 정신없이 일주일을 보내느라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너 독백대회 나간다면서? 소문이 파다해.”
“그게 소문 날일인가?”
이도원이 되물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박서진은 그 질문에 답했다.
“독백대회 나가는 게 소문 날일이 아니고, 연극 동아리를 만든다고 했던 게 문제였지. 독백대회는 덤으로 소문이 난 거고. 연극부 선배들이 너 벼르고 있다더라?”
“어차피 부딪칠 거였는데 잘 됐네. 매는 빨리 맞을수록 좋지.”
“긍정적이라 참도 좋으시겠어요.”
박서진은 자못 냉랭한 말투로 비꼬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걱정까지 모두 숨기진 못했다. 얼굴 표정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애가 날 좋아했었나? 속상한가 본데.’
정작 이도원은 그녀만큼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전생의 그였다면 이런 일을 벌일 생각도 못했겠지만, 일을 벌였다 한들 선배들에게 찍히면 벌벌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심, 오히려 반기는 마음까지 들었다.
“걔들, 특별활동비로 요청하는 학교 공금을 전부 꿀꺽하고 있어. 공연 관람비로 여자애들 불러서 파티하고, 소품 구입비는 외부강사한테 뇌물로 먹이지.”
타임 슬립이 일어나기 전, 이도원은 이미 현재를 살아보았다.
그 기억에 의하면 박서진과 함께 연극부에 들어간 뒤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선배들의 부정한 모습을 알게 됐다. 비록 맞서지 못하고 선배들이 졸업할 때까지 허드렛일을 빙자한 괴롭힘을 당해야 했지만.
1년 후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학교 측은 이 사건을 적당히 덮었고, 연극부 선배들도 무사히 졸업했다. 연극부의 전담 외부강사를 해고하는 걸로 사건은 단순 마무리됐었다.
순진한 열일곱 살의 박서진으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도원은 어린아이에게 세상의 부정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기분이었다.
“믿든 말든 사실이야. 너, 누군가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 갖고 장난치면 어쩔래?”
“그야 가만 안 두지!”
박서진이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조금 흥분해서 대답했다.
이도원이 거 보라는 듯 말했다.
“그렇지? 나도 연기 갖고 장난치는 새끼 보면 가만 두기 싫어. 연극부를 고발하려 해도 물증이 없으니 와해시키는 편이 빠른 거고.”
“사람이랑 연기랑 같아? 네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치자. 그럼 그런 무서운 선배들이 가만히 있을까? 널 내버려 두겠냐고? 연기를 하고 싶으면 차라리 예고로 전학을 가!”
“죄지은 새끼가 떠나야지, 내가 왜 떠나냐.”
이도원은 박서진의 단발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서늘하게 말했다.
“나도 가만히 안 있는다. 두고 봐. 누가 떠나게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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