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으로 (2)
이도원에게 수업시간은 고문이었다.
혹자는 말한다. 옛날로 돌아가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도원은 아니었다. 그는 똑같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수리는 체질에 안 맞아.’
수리 시간.
이도원은 책상에 층층이 올려둔 교과서 위로 엎어졌다. 이과 과목 비중이 적은 예술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야 하나 진지한 고민이 들었다.
“이도원!”
수리를 가르치는 담임이 귀 따갑게 불렀다. 공부에 취미가 없던 열일곱 살의 이도원은 선생님들의 주요 타깃이었다.
“죄송합니다아-.”
이도원이 목소리를 늘어트리자 주변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스승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다만 얼마 전까지 서른일곱이었던 이도원의 입장에선 자신 보다 어린 담임의 지적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더구나 성인 연기자의 활동적인 생활에 익숙해져 버려서, 갑갑한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자니 뿔이 났다.
“이 자식이?”
담임은 씩씩거리면서도 사랑의 매를 휘두르지 못했다. 학교는 벌점제로 운영됐고, 독단적인 체벌은 학생들의 교육부 고발을 불러오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도 이도원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담임은 학생들에게 권위적인 성향이다. 평소의 소심한 성격을 감추고 싶어 하지.’
그는 담임의 미세한 손끝 떨림까지 포착할 만큼 집중하기 시작했다.
‘삼십 대 초반 남자, 소심하고 권위적인 담임이 학생을 폭력으로 다룰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선택은?’
점점 담임의 감정에 몰입이 됐다.
‘호흡이 가빠졌다가 점차 느려진다. 자제하고 있다는 뜻. 담임은 자신의 권위가 그나마 훼손되지 않는 선택을 할 거야. 용서한다? 아니, 상담하겠지.’
동시에 담임이 입을 열었다.
“이도원. 학교 끝나고 교무실로 와라.”
“네!”
이도원은 대답하면서도 관찰을 멈추지 않았다.
‘창피를 당했으니 쉬는 시간 종이 어서 울리길 바랄 거야. 시간을 본다. 머릿속은 백지장이 돼서 수업진행을 늦추겠지. 판서를 멈추고 전전긍긍한다. 아직 수업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그는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잔소리를 하겠지.’
담임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분필을 내려놓은 뒤 칠판 앞을 천천히 배회하다 교탁에 섰다.
“너희가 이렇게 실망시킬수록 서로가 불편해진다.”
잔소리가 시작됐다.
*
이도원은 수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여전히 수업내용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선생님들의 습관이나 버릇들을 관찰했다. 말투나 행동부터 작은 심리변화에 의한 호흡의 변화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특징들을 오늘 아침 교문 앞에서 받은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 영어학원 이름이 크게 적힌 홍보용 수첩이었지만 이도원에게는 배우 수첩이었다.
‘오늘 하루 우리 반 전원이 필기한 내용 보다 더 많이 쓴 것 같은데?’
손바닥 크기의 얇은 수첩을 7교시 만에 빼곡하게 채웠다.
학교 종이 울리고 담임이 종례를 했다.
학생들이 하교하고 청소 당번들이 청소를 시작할 때쯤 이도원은 교무실에 있었다.
“수업시간에 그렇게 집중을 못 해서 나중에 뭘 하려고 그러냐? 도원이 너, 장래희망이 뭐였지?”
이도원은 대답 대신 교복 마이의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게 뭐냐?”
“제 장래희망입니다.”
담임은 수첩을 열어보았다.
책장을 넘기며 그의 표정이 여러 번 바뀌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초반에는 분노했으며 중반부터는 놀라움이 되었다. 마침내 수첩을 덮을 땐, 감탄했다.
“난 연기의 연 자도 모르지만 네게 남다른 점이 있다는 건 알겠다. 수업시간에 딴짓 했다는 물증을 자신 있게 내놔서 화도 났지만, 그럴 만 하더구나.”
담임은 그렇게 말하며 이도원에게 수첩을 돌려주었다.
이도원은 고등학교 시절 담임에 대한 추억이 전무했다.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만 대충 기억날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막 추억이 생기려 하고 있었다. 담임은 소심했지만 교사로서의 열정이 없다거나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네 재능을 측량할 길이 없으니 연극부 선생님과 얘기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 연극부에 들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거지?”
“아니요.”
“그럼? 예고로 전학을 가고 싶은 거야?”
“그것도 아니에요.”
이놈이 무슨 수작인가 싶어 담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말했다.
“전 새로운 연극 동아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힘을 실어주세요.”
담임은 이도원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연극부가 있는 상태에서 똑같은 성질의 동아리를 늘려줄 리 없었다. 더욱이 연극부는 공연 관람료나 소품 구입비 등으로 많은 특별 활동비를 요청하는 동아리였다.
“쉽지 않을 것 같다.”
“걱정 마세요. 대회를 나가서 상도 타오고 한 뒤에 건의할 생각입니다. 그때 거들어만 주세요.”
이도원은 담임을 빤히 마주 봤다.
담임은 그 깊은 눈빛에 전율했다. 눈빛만 보면 마주 앉은 상대가 학생인지 학부모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담임 역시 영화를 즐겨 보는 사람이었다. 잠깐이지만 그는 이도원의 눈빛에서 영화 대부의 존 꼴레오네 역을 맡은 ‘알 파치노’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부에서 알 파치노는 나이를 뛰어넘는 깊은 눈빛을 소유하고 있었다.
‘저절로 빠져드는 눈빛이야.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어쩌면 내가 미래의 스타를 보고 있는 걸지도…….’
이도원의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널 최대한 돕고 싶구나. 하지만 만약 오케이 사인을 받더라도 기존 연극부는 폐부 될 거야. 그 아이들이 네게 해코지를 할 수도 있지.”
“상관없어요. 참, 그보다 선생님이 직접 연극부를 맡아주시길 바랍니다.”
정규직 선생님들은 방과 후 활동 동아리의 담당 교사가 되길 꺼려한다. 순식간에 잔업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해서 동아리 활동은 대부분 외부 강사를 초빙해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입장은 담임도 마찬가지였다.
“난 연기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괜찮아요. 도와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이도원의 말이 맞았다.
담임 스스로가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이도원이 이런 제안을 던진 이유는 담임이 너무 좋아서가 아니었다. 외부 강사를 초빙하지 않으면 학교 예산을 아낄 수 있기 때문에 동아리 개설 허가를 따내기도, 기존 연극부와의 경쟁에서 이기기도 유리한 것이다.
‘설마 그걸 다 계산하고 제안하는 건가?’
불쑥 그런 생각이 든 담임은 이도원이 더 이상 열일곱 살 같지 않았다.
이제 와서 발뺌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총대를 메고 연극부 전담교사가 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다. 내가 전담교사를 맡으마.”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아, 그래.”
이도원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교무실을 나갔다.
얼결에 약속을 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담임은 아차 싶었다.
‘근데 내가 도원이를 왜 불렀지?’
수업시간에 잠이나 자고, 지적했을 때조차 불성실하게 대답하는 걸 보고 따끔하게 혼내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도원의 말에 완전히 몰입되어 원래 목적은 한 마디도 못 꺼냈다. 면담 내내 휘둘린 것이다.
대화의 주제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이도원이 가진 흡인력 때문이었다.
“하아.”
담임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어떡한다? 안사람이 반대할 텐데.’
이도원이 천재든 범재든,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방과 후 활동의 전담교사를 맡게 돼서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늦어질 거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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