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4화 (4/178)

20년 전으로 (1)

2015년.

올해로 열일곱 살이 된 이도원은 비밀 하나를 간직하고 있었다. 바로 37년의 인생을 더 살아봤다는 것이다.

얼마 전, 서른일곱 살의 이도원은 죽음과 직면했다. 그리고 이십 년 전 과거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야.’

내심 지난 일을 떠올린 이도원은 믹서기를 돌렸다. 그는 과거로 돌아온 뒤, 쭉 아침밥 대신 야채주스를 먹고 있었다.

이도원은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이었다. 그 덕분에 소리를 잃기 전까지 비만에 시달렸다. 이런 점이 조단역 이상의 배역을 따내지 못하는 제약이 됐다.

몸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무성극의 마임 연기를 시작하고서야 강도 높은 관리를 꾸준히 했다. 그걸 계기로 자신의 훤칠한 외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건강한 젊음이 있을 때 잘하란 말이다.”

스스로에게 일침을 가한 이도원은 눈을 딱 감고 더럽게 맛없는 야채주스를 원 샷 했다.

“캬하-!”

감탄사를 뱉으며 식탁에 컵을 탁 내려놓았다.

이도원은 다음으로 스트레칭과 체력단련을 실시했다.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동선을 가지려면 꾸준히 몸을 이완시키며 유연성을 늘려줘야 한다. 특히 다리 찢기는 비명이 절로 나오는 고통을 선사했다. 매번 후유증으로 어기적거려야 했다.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체력단련. 배우는 연기에 몰입할수록 더 큰 체력소모를 하게 된다. 한계치까지 능력을 끌어올리면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올 때마다 다리가 풀린다. 따라서 배우에게 체력단련은 하루도 빠짐없이 해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다.

“헉, 헉…….”

각각 두 시간씩, 총 네 시간.

이도원은 숨이 꼴딱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를 다그쳤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는 대자로 드러누운 와중에도 눈을 감고 자신의 호흡을 기억하려 애썼다. 체력과 이완이 배우의 기본이라면 호흡은 연기의 전부였다.

그 상태로 한참을 누워있던 이도원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때마침 방문을 열어젖힌 어머니가 땀범벅의 그를 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운동을 하니? 오늘은 몇 시에 일어났대?”

“네 시요!”

이도원이 활기차게 답하며 속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욕실로 기어들어갔다.

두 달 째 달라진 아들의 모습에 아직도 적응이 안 된 어머니는 혀를 내둘렀다.

“운동선수해도 대성하겠네, 아주.”

한편 교복을 입고 식탁에 앉아있던 소녀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아 쫌! 변태야? 밥 먹는데 더럽게 왜 벗고 지랄이야?”

이도원은 욕실 안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안 그래도 열받은 소녀를 약 올렸다.

“저게 미쳤나!”

약이 바짝 오른 소녀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욕실로 쳐들어가려 했다. 그때 어머니가 목청을 높였다.

“이다원! 밥상머리에서! 그리고 말 예쁘게 안 해?”

“엄마, 쟤 좀 쫓아내 으으!”

소녀는 이도원의 하나뿐인 누나 이다원이었다.

아무리 누나라도 이미 한 번의 삶을 거친 이도원이었다. 귀여운 마음에 놀려주려는 속셈이지만, 한참 사춘기인 이다원에게는 진지한 문제였다. 그녀는 이를 갈며 아침식사를 중단하고 일어났다.

“나 학교 가요!”

이다원이 현관을 나서는 소리를 확인한 이도원은 낄낄대며 유유자적 욕실에서 걸어 나와 교복을 입었다.

“딸은 반장도 하고 전교 일 등도 하는데, 아들은 뭐 하려고?”

어머니가 식탁에 앉아 팔을 괴고 물었다.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대답했다.

“연기요.”

“요즘 애들 장래희망 일 순위가 연예인이라더라. 예쁘고 잘생긴 애들이 좀 많니? 지천으로 깔린 애들 중에도 연예인이 되는 애들은 만 분의 일도 안 돼.”

“연예인은 아니고 배우요.”

“그게 그거지!”

“전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영화든 상관없어요.”

“너도 어른이 돼서 수입이 끊겨보면 상관있어질걸?”

이도원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미 살아본 바로는 한 번 연기 맛을 들인 이상 배가 고파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하게 되더라. 되살아나기 전 무려 17년을 배곯아가며 연기를 했는데, 이번에도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걱정 마세요. 대부분이 그렇게 말하겠지만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배 안 고플 자신도 있고요.”

“아들. 이 엄마는 네가 잘난 얼굴만 믿고 인생을 건 모험을 하지 않길 바랄 뿐이야.”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배우에게는 속일 수 없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내외적인 재능, 일만 시간의 노력,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

이런 점들을 살펴볼 때 이도원은 출발점부터 남들 보다 한참 앞서있는 셈이었다.

“조금만 지켜보세요.”

이도원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는 이어서 교복을 입고 등굣길에 나섰다.

옛날에는 이 시간이 끔찍하고 축축 처졌는데 새 삶에서는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젊어진 효과도 있겠지만 아침 운동과 달라진 마음가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남들은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짜증에 가득 차있을 시간이었지만, 아침을 앞당긴 이도원에게는 한참 활동할 시간이었다.

“이도원!”

교문이 가까워질 때쯤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도원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여학생을 보았다.

박서진.

화장과 보톡스로 점철됐던 얼굴 대신 제법 풋풋하고 귀여운 얼굴을 한 소녀가 달려오고 있었다. 박서진은 코앞에 와서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왜 혼자가? 이런 몰골로 너희 어머님 뵙기 싫은데, 항상 어머님이 나오셔서 너 먼저 갔다고 하시는 바람에 매일 뵙잖아!”

“너랑 같이 학교 가기 싫어서.”

이도원이 짓궂게 놀렸다. 박서진과의 스캔들로 고등학교 삼 년을 암울하게 보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박서진은 매정한 장난을 특유의 긍정으로 소화하며 말했다.

“어디서 비싼 척이야? 그나저나 연극부, 들어갈 거지?”

박서진에게 고마운 점이 있다면 이도원이 그녀 덕분에 연기를 시작하게 됐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건 전생에서의 이야기고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니. 직접 연극부를 만들려고.”

기존 연극부에 들어가면 짬밥에 밀려서 빨라도 2학년 때나 주연을 맡을 터였다. 하지만 이도원은 금쪽같은 일 년을, 예전처럼 선배들 허드렛일이나 하면서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조건만 충족되면 학생 누구라도 교내 동아리를 만들 자격이 주어진다. 이도원을 이 점을 노린 것이다.

그때 박서진이 중요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미 연극부가 있는데 만들어 줄까?”

“힘들 수도 있겠지. 지금 있는 연극부에서 터치할 수도 있고.”

이도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박서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고,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안되면 되게 하면 돼.”

“어떻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려면?

절대적인 실력으로 압도하면 된다.

학교를 알릴 수만 있다면 학교 측은 동아리 개설을 허락해줄 터였다. 다만 문제는 선배랍시고 기존 연극부 쪽에서 압력을 넣는 경우였다.

“일인극 몇 개 뛰면서 학교 허가받고, 힘 있는 선배들 잘 구슬려서 영입하면 끝.”

“말씀은 참 잘하시네요.”

박서진의 말에 이도원이 시익 웃었다.

“행동도 잘 해. 일사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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