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3화 (3/178)

소리 없는 연극 (3)

극단 수입만으로 생계유지는 힘들었다. 그러나 벙어리인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따라서 현재는 공연이 없는 날마다 미술관들을 전전하며 미술품을 전시하거나 철수하고 일당을 받는 일을 했다.

대본리딩이 있는 금요일을 하루 앞둔 목요일, 나는 여지없이 일당을 뛰러 나갔다. 이번 장소는 국립 현대 미술관이었다. 최고의 작품들이 들어가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대의 미술관.

이번 일감은 전시가 아닌 전시품 철수였다. <시간과 운명의 신>이라는 타이틀의 미술전이었는데 국보급 그림과 조각들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신화를 다룬 전시회라서 수십 미터에 이르는 조각들이 대수롭지 않게 전시되어 있다는 것은 나쁜 소식이었다. 이 무거운 작품들을 모두 빼내려면 철수작업이 철거작업이 될 테니까. 그럼에도 다음날 대본리딩을 떠올리면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고대 그리스 종교의 크로노스, 노르웨이의 베르단디, 아프리카의 이그보, 힌두교의 가랍, 불교의 대흑천 등 시간과 운명을 관장하는 신들의 전시품들이 가득했다.

밖에서부터 차근차근 미술품들이 옮겨지고 마지막 한 점만 남았다. 십 미터가 넘는 높이의 천장에 걸려있는 으리으리한 아난케 조각품이었다.

아난케는 그리스 신화의 여신으로 운명, 불변의 필연성, 숙명을 뜻한다. 아무래도 입시연기나 연극을 하면서 고대 그리스 작품들을 많이 다뤄왔던 나로서는 감회가 새로웠다. 조각품으로서의 아난케는 세상을 포용할 듯 아름답고 인자해 보였다.

내가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천장에 매달린 아난케 조각상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철수작전을 책임진 서진 아트센터 반장이 중장비를 가져왔다. 사람이나 미술품을 실을 수 있는 철판과 차량 사이에 스프링처럼 쇠가 접혀있어 작동을 하면 높이까지 올려주는 중장비였다. 반장은 새삼스럽게 내게 말했다.

“도원아. 이번에는 네가 올라가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당 받고 일하는 처지에 위험한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였다. 오래 손발을 맞춰서 표정만으로도 내 의사를 알아챈 반장이 나를 설득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인력 부족에 시달리잖아. 오늘 온 애들 중에 직원 없고, 전부 일용직이다. 그래도 넌 나랑 손발을 많이 맞춰봤잖아. 얼른 올라가서 후딱 끝내자.”

보통 직원을 한둘 달고 오거나 이런 대대적인 철수 땐 네다섯 명은 투입되는데 이번에는 유난히 인력난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철수를 해야 하고, 반장 말처럼 처음 일하는 사람들 보다야 우리 둘이 처리하는 게 신속할 터였다. 괜히 잘못하다 조각이 손상되기라도 하면 업체 측에서 수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반장은 환한 웃음을 드러내며 중장비에 올라탔다. 나 역시 중장비에 올랐다. 이제 영화 <서커스> 촬영에 들어가면 이쪽 일은 못한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시원섭섭했다.

“조각품 잘못 떨어트리면 죽어. 정신 바짝 차려라.”

반장이 주의를 줬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장에 연결된 줄을 하나씩 떼어내며 조각품을 실었다. 세 번 정도 바닥과 천장을 오가야겠지만 어느 정도 요령만 있고 조심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바닥에선 일용직 아르바이트생들이 우리가 내려주는 조각을 받았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며 팔다리를 떼어내고 가장 큰 몸통을 내리는 일만 남았다.

아래를 보면 아찔해지는 십 미터 높이. 나와 운명의 여신 아난케의 몸통을 함께 지탱하던 반장이 손을 놓아버렸다.

몸통을 고정시키던 와이어를 풀던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때는 늦었다. 무시무시한 무게의 몸통이 십 미터 아래 바닥으로 낙하하며 와이어 줄이 내 손목에 감겼다. 그리고 나는 몸통에 딸려 바닥으로 추락했다.

쿠웅!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야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반장은 내가 줄을 푸는 장면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고, 그의 실수는 의도적이었다.

‘하지만 왜…….’

그때 아르바이트생들의 놀란 얼굴들 사이로 숨어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참 충무로에서 활동하던 시절 떠오르는 신인 배우로 급부상했던 내 대학동기 김진우. 대학 땐 경쟁자라서 사이가 좋진 않았다. 정상에 선 뒤로 연락이 끊겼지만 그 역시 유태일 감독의 손에 의해 탄생한 탑 배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설마.’

내가 유태일 감독의 <서커스> 주연을 맡게 돼서?

내가 사라진다면 작품의 주연은 김진우가 거머 쥘 것이다.

김진우가 반장을 포섭해서 내 죽음을 사고사로 위장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죽음의 그림자가 날 덮쳤다.

*

“여긴 어디지?”

목소리가 나왔다. 사후세계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의외로 빠르게 단념이 됐다.

눈앞에는 미술관에서 보았던 운명과 시간의 신들이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잃었던 소리를 되찾았고, 객석도 가득 차있다. 삶 보다 행복한 죽음이라니.’

관객 앞에서 마음을 내보이진 않았다. 그저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을 만족시킬 무대를 선보이고 싶었다. 신들이 만족할 만한 공연은 어떤 공연일까?

신들은 언제나 인간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신이 인간의 믿음이 만들어낸 절대적 존재인지 실존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신들은 언제나 인간 세상에 존재감을 나타냈다.

‘신들이 가장 흥미로워할 인간을 표현한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희노애락의 감정선들을 실타래처럼 한데 엮어서 풀어낼 수 있을까?

나는 기쁜 듯하기도, 분노하는 듯하기도, 슬픈 듯하기도, 즐거운 듯해 보이기도 한 눈물을 흘렸다. 억울한 죽음과 소리를 되찾았다는 상반된 감정이 몸속을 꽉 채웠다. 그리고 이 모든 호흡을 담아 말했다.

“행복한 죽음이군요.”

내 소리가 객석 전체를 가득 메웠다.

나직하지만 끝까지 뻗어나가는 소리.

얼마나 그리웠던가?

눈을 감으며 세상을 향해 말했다.

“지난 일은 모두 훌훌 털어버립시다. 나는 지금 마음껏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신들이 웃는 듯했다. 그리고 난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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