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육군대위, 귀환하다-127화 (127/128)

육군 대위 귀환하다 127화

33. 최후의 전쟁(1)

찬바람이 쌩쌩 불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말투에 사내는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해졌다.

봉인이 해제된다는 말은 곧, 선소연이 죽는다는 말.

결국, 기억을 되찾지도 못한 채로 그녀와 이별을 맞이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런 걸 왜 이제 말하는 거야.”

“죄송해요. 사실 저도 오늘 알았거든요.”

“오늘?”

“네. 그냥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데, 이렇게 확실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에요. 미안해요.”

“아니, 그대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지.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일 텐데…….”

사내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가슴이 찌르르-저려왔기 때문이었다.

과거 본인의 정인이었다던 그녀가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시작한 헌터 생활이 이런 고통을 가져다줄지는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혹시 서운하세요?”

안색이 창백한 그녀가 옅게 미소지으며 물었다.

“……뭐?”

“이제 제 얼굴 못 봐서 마음 아프신 거잖아요.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뭘.”

“아니. 그것보단…….”

“에이, 그래도 나름 정들었는데 맞다고 해주시면 안 돼요?”

선소연의 밝은 척하려는 목소리가 묘하게 음울해 보인다.

“그래. 그대 말이 맞다.”

“치-됐거든요.”

어쩐지 그녀의 옆모습에서 찬바람이 쌩쌩 부는 느낌이다.

아니, 진짜로 불고 있었다.

후우우웅-소리를 내며 부는 거센 비바람은 수풀을 전부 뒤흔들어놓고 있었다.

산 중앙에 흐르는 기류 때문이었다.

한 달 전 즈음부터, 정갈하게 통제되던 핵에너지가 조금씩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육체가 약해져 가면서 극소량의 에너지가 바깥으로 흘러나온 탓이다.

분명히 그녀가 느끼기엔 소량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겐 폭풍 같았다.

날고 긴다 하는 S급 헌터들도 다가오지 못할 정도로 기류가 거셌다.

그 때문에, 가끔 안부 차 오던 그녀의 가족들이나 팀장들도 더 이상 이곳에 오지 못했다.

오직, 사내만이 이 흉포한 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후우-”

“갑자기 웬 한숨이세요?”

“그냥 현실이 참 잔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가요?”

“그 숭고한 희생을 했는데 결국 다가오는 건 이렇게 싸늘한 곳에서 고통받으며 쓸쓸하게 죽어가는 거라니. 이놈의 기류 때문에 가족들도, 친우들도 아무도 배웅해 주지 못하고 있지 않나.”

외계 종족이 침공한 마당에 사연 없이 죽은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그래도 이건 너무 쓸쓸했다.

시한부 인생임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책임을 다했던 그 지고한 정신력이 존경스럽기도 했다.

“전 그래도 괜찮아요.”

“…….”

“오빠만 옆에 있으면 되니까요.”

그녀가 슬금슬금 옆으로 붙어 사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그 적은 움직임에도 힘이 벅차오르는지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미안하다.”

“무슨 뜻이에요? 설마 저 혼자 내버려 두고 어디 가신다는 뜻이에요?”

그녀가 화들짝 놀라 묻는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요?”

“그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도 결국, 아무런 기억도 떠올리지 못했어. 나도 내 자신이 참 답답해 미칠 지경이야.”

“아.”

선소연이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을 잇는다.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게 오빠 잘못도 아닌걸. 그리고 저 너무 불쌍하게 보지 않으셔도 돼요.”

“…….”

“오빠랑 예전 균열에서 처음 만난 날 저보고 했던 말. 기억나시죠?”

“어떤……?”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던 거요.”

아, 그거. 물론이다.

그녀가 대화하면서 몇 번이고 강조했기에 아예 외워버릴 정도였다.

-넌 죽음이 뭐라 생각해?

-난 예전에 죽음이란 ’나’라는 자아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거라고 생각했어.

-지금껏 살아온 기억들과 앞으로 흐를 시간 동안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지는 거.

-그런데 지금 난 지구에서의 일도 기억하고, 생각도 할 수 있어. 내 이름 두 자. ‘강 현’이라는 존재가 여기 있잖아.

과거 우울해 보이는 선소연을 달래기 위해 균열 속에서 강 현이 했던 말이란다.

“그런데 그게 왜?”

“우리는 세상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가지고 있잖아요.”

“어떤…….”

“「아베르노」요.”

“…….”

“그곳은 분명 존재해요. 제가 오빠를 통해 확실히 느꼈었거든요. 그러니 전 죽어도 죽은 게 아니에요.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뿐이지. 그러니까…….”

그녀가 힘겹게 손을 움직여, 떨어져 있는 사내의 손 위에 슬며시 포갠다.

몰아치는 비바람에 젖어 있는 손임에도 따듯한 온기가 느껴진다.

“천천히 오셔도 돼요. 전 언제까지든 기다릴 수 있으니까.”

***

그 시각-

“준비됐나?”

최강수가 앉아 있는 팀장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3팀장 강설아가 브리핑했다. 그녀에겐 과거에 보였던 어리숙한 모습이 싹-사라져 있었다.

“네. ‘최후의 전쟁’을 앞두고, 세계 대부분 국가들의 지원 병력이 도착했습니다. 마지막 휴가 나갔던 단원들도 100% 복귀했고요.”

“대부분? 오지 않은 국가도 있나? 분명, 한 달 전에 소집령을 내렸을 텐데.”

“그렇습니다. 아예 안 오겠다고 못을 박던데요?”

이미 WHO 주도 아래 전 세계 국가가 모였고, KH와 뜻을 하기로 동참했었다.

정치, 경제, 이념을 막론하고 모인 커다란 공동체에서 당당하게 빠질 수 있는 간 큰 국가가 있다니. 국제 왕따라도 당하고 싶은 걸까?

“허, 사상을 초월한 연합의 탄생이라며 떠들썩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래. 그래서 거기가 어딘가.”

“일본입니다. 자국민을 지킬 헌터가 부족하다는데, 제가 봤을 땐 그냥 강짜 부리는 것 같아요.”

“아니. 우리한테 승산이 없다고 보는 거겠지. 현이가 기억을 찾지 못했으니까.”

“그렇겠죠. 쯧. 그래도 그간의 의리를 어떻게 이렇게 한 번에 져버릴 수가 있어요?”

“뭐, 한두 번도 아니고 신경 쓰지 말아라. 어차피 별 도움 되는 전력도 아니지 않으냐.”

“알겠어요.”

KH에 모인 수만의 최상급 헌터들은 현재 모두 군단장들이 봉인된 지역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미 ‘최후의 전쟁터’로 선정된 그곳 위에는 선소연이 펼쳐놓은 커다란 봉인 기둥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각종 방호벽과 벙커를 만들어 두었다.

물론, 이들이 군단장과 총사령관을 직접 상대하기 위해 포위를 펼친 건 아니다.

어느 정도 지원 사격은 가능하겠지만, 애초에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다. 4군단장의 위대함을 이미 봤기 때문이다.

그들이 해야 할 임무는 강 현이 그들을 상대할 동안 방해받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전 세계 각지에 숨어 있는 불의 종족들이 ‘최후의 전쟁’ 날 곧바로 이곳으로 모여들 테니까.

“소연이 소식은?”

“음……. 오빠 말로는 당장 오늘일 수도 있고, 아무리 길어봐야 일주일이래요.”

“……그렇군.”

“너무 슬퍼하지 않으려고요. 언니가 좀 더 빨리 가는 거일 뿐, 어차피 우리도 곧 따라갈 거잖아요.”

사실 이들은 진즉에 포기한 상태였다.

-지금의 강 현은 총사령관, 그녀를 절대 이길 수 없다. 5차 탈피를 이루어 내지 않는 한 인류에게 승산은 없어.

크라켄의 호언장담 때문이었다.

문어는 선소연을 매개체로 하여 총사령관을 직접 봉인하고 있는 존재다.

그 말인즉슨, 놈이 지니고 있는 흉포한 에너지를 직접 느끼고 있기에 그 누구보다 더 잘 안다는 말이다.

“후, 그렇지. 현이가 기억을 찾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놈들한테 한 방은 먹여줘야 하지 않겠어요? 안 그럼 억울해서 못 죽어요.”

옆에 있던 유현동도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누님! 이 번개로 놈들한테 찌릿한 느낌이라도 줄 겁니다.”

그의 파이팅에 이미 전쟁이라도 벌어진 듯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문태준은 말없이 비장한 표정으로 몸을 풀었고, 주유라 역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최강수가 흐뭇하게 바라본다.

“좋은 자세다. 그나저나 현이는?”

“오빠는 당분간 언니 배웅해 주고, 전쟁이 시작되면 곧바로 오겠대요. 어차피 상황 벌어지면 이동시간은 금방이니.”

“그렇군. 그럼 우린 우리가 할 일을 하자꾸나.”

“그래요. 다들 밖에서 기다리잖아요.”

이곳에 모인 자들은 전부 각오가 되어 있는 인류 최후의 결사대다.

그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전쟁에 자의로 참여한 자들.

그저 본인들의 터전과 가족, 그리고 삶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에서 한낱 감정에 치우쳐 있을 수는 없었다.

숨통을 조여오는 막중한 책임감 앞에서 각 팀장들은 마지막으로 제반사항들을 점검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흘렀을까…….

“팀장님! 고문님!”

한 1기 헌터가 회의실 안으로 다급하게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나와 보십시오! 봉인 지역에서 미세한 흔들림이 감지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래. 진정하고 가서 준비하게. 내 나갈 테니.”

최강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한동엽의 고유 능력 「옵저버」를 통해 전부 보고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들 무운을 빕니다.”

“형님들, 누님들 저승에서 웃으며 봅시다.”

“저도 갈게요.”

문태준의 말을 필두로, 팀장들 역시 속속히 본인의 위치를 찾아 흩어졌다.

***

신예지는 한동엽, 그리고 피터 잭슨과 함께 통제실에 있었다.

그녀의 고유 능력 「은신」이 한동엽의 「옵저버」와 어울린다는 피터 잭슨의 판단 때문이었다.

S급 헌터에 근접하게 성장한 신예지는 이제 본인뿐만 아니라, 본인이 지정한 물체까지 투명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본래 노출이 약점이었던 한동엽의 「옵저버」가 더 정교하고 은밀하게 숨어들 수 있었다.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신예지가 화면 속 커다랗고 하얀 봉인 기둥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두두두-

그에 맞추어 땅이 흔들렸다.

곧이어, 기둥을 이루는 그 거대한 에너지가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빛.

끼이이이이-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한 폭의 지옥도가 지구 강원도 한복판에 송두리째 옮겨지고 있다는 느낌에 그녀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떡하죠?”

“일단 대기한다.”

피터 잭슨이 판단하자, 도우미들이 헌터들 전역에 그대로 방송을 전달한다.

[전 헌터들은 모두 전투 준비 후, 제 자리에서 기다린다.]

숨 막힐듯한 분위기였다.

당장에라도 폭발해 터져 버릴 듯한 일촉즉발의 공기 속에서 긴장하지 않는 헌터는 없었다.

“틈이 더 벌어지고 있어요! 놈들의 피부가 언뜻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

“놈들이 완전히 나오기 전에 공격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러다 한놈 한놈 나오게 되면 각개격파 할 수도 있겠어요.”

“아니.”

신예지의 물음에 피터 잭슨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놈들은 봉인이 완전히 걷히기까지 버티며 기다릴 거다.”

“왜요?”

“그들 입장에선 반년 전 나왔던 4군단장이 깜깜무소식이야. 당연히 불안함을 느끼고 신중을 가하겠지.”

“그럼 어떡해요?”

“우리로서도 다행이다. 섣불리 공격했다가 봉인이 더 빨리 풀리기라도 하면 곤란하거든.”

“시간을 끄실 계획인가요?”

“그래. 미스터 강이 올 때까지만.”

=====================

m.joara.com /viewer

조아라: 웹소설의 시작

6-7 minutes

33. 최후의 전쟁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