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대위 귀환하다 119화
31. 4군단장(3)
“……이거 지랄났구만.”
동쪽 철벽 위에서 불의 종족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1팀장 문태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불과 수십 분 전까지만 해도, 마치 화로 속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공격해오던 놈들이 갑자기 썰물 빠지듯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6개월 만이었다.
끝이 없던 불의 종족들과의 전투가 잠깐이라도 멈춘 것은…….
“조짐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원래 생각 없이 돌진하던 놈들이 저렇게 뭉친다는 건…….”
그의 옆에 1팀 부하 한 명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 놈들을 누군가가 통제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군단장급이 이상의 존재가 다시 나타난 거야. 6개월 전처럼…….”
“그렇지만, 아직 봉인이 풀리기에는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중앙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문태준의 시선이 전방을 훑었다.
치열한 병장기 소리와 놈들의 괴성으로 가득했던 이곳이 짙은 고요 속에 잠겼다.
철벽 내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를 제외하고는,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평화였다.
“비상벨을 울렸나 보군.”
“네, 3팀 쪽에서 먼저 확인한 후 울린 것 같습니다.”
강설아 팀장 역시 놈들이 빠지는 것을 보고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비상벨이 울리게 되면 더 이상 철벽 방어는 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휴식하고 있는 팀까지 전부 소집해 전 단원이 함께 방어에 임하는 것이다.
“6개월 만에 군단장의 출현이야. 확실히 대비해야 해.”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참, 오늘이 6기 소집일이었나?”
“네. 아마, 교육팀 쪽에서 데려갔을 겁니다.”
“교육팀? 잭슨은 여기 있는데?”
KH의 교육은 항상 피터 잭슨이 도맡았다.
하지만, 그는 현재 1팀이 위치한 철벽에서 놈들을 분석한다며 시체를 뒤지고 있는 상태.
“아마 유성휘가 나섰을 겁니다. 이번에 그쪽으로 파견 가면서 피터 잭슨이 아예 믿고 전담한 것 같습니다.”
“……유성휘라.”
과거 1팀에 소속되어 있었던 5기 단원.
피터 잭슨의 요청으로 교육팀으로 빼긴 했는데, 보조 역할이면 몰라도 모든 일정을 믿고 맡길 정도는 아니다.
그도 아직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신입이기 때문이다.
“일단 들어온 6기 인원들도 교육을 모두 중단하고 이곳으로 소집시켜. 결정체도 전부 지급하고. 피터 잭슨에겐 내가 말해보지.”
“아, 직접 교육할 생각이십니까?”
“아니, 난 중앙에 잠깐 들려볼 생각이야. 구태경 팀장 오면 인수인계 잘 해주고 준비하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
“갑자기 어디로 가려고 그러는 건가.”
“빨리 따라오세요.”
신예지는 비상벨이 울리는 틈을 타 재빨리 공터를 벗어났고, 사내는 그녀가 이끄는 데로 따라갔다.
“일단, 위로 계속 올라갈 거예요.”
“위로?”
이곳은 높은 산이었고, 철벽은 이 거대한 산의 5부 능선을 두르고 있다. 고지를 기준으로 정확히 원을 두르는 요새의 모습인 것이다.
“네, 저기 뿌연 안개로 가려져 있어 신비스러워 보이는 곳 있죠?”
“응.”
“저쪽으로 이동하면 산 중앙일 거예요.”
첫 교육 당시, 신입들에게 당부했던 말이 있다.
-산 중앙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지 말아라.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단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 알려줬을 뿐이다.
불의 종족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달려드는 곳, KH가 사활을 걸고 막고 있는 그곳.
신예지는 느낌이 왔다.
저곳에 분명 사내가 찾는 것이 있을 거라고.
“산 중앙은 왜?”
“문어를 찾는다 하셨죠?”
“그랬지.”
“제가 아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문어가 분명히 이 철벽 내부 어딘가 존재할 거예요. 그 존재가 KH의 수호신이라면 말이에요……. 그리고 전 높은 확률로 저 중앙 속에 있다고 봐요.”
“그게 정말인가?”
“가능성이 있으니 일단, 질러보는 거죠. 이왕 사고 친 거, 확실하게 쳐보자고요. 가요.”
그녀와 사내는 꾸준히 산을 올랐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지 않은 돌산. 강원도에 존재하는 산들이 대부분 그렇듯 높고 험준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오르자, 철벽 요새의 전망이 확실히 보이기 시작했다. 신예지는 그 장엄한 모습을 잠깐동안 바라봤다.
“……저기 보세요.”
“응. 보고 있다.”
“놈들이 다 뒤로 빠져 있네요?”
“벽 위에 있는 사람도 많아졌군.”
“그러게요. 아까 비상벨도 울리고……. 뭔가 벌어지고 있나 봐요.”
개미처럼 작게 보이지만 철벽 위에서 무언갈 열심히 정비하는 KH 단원들. 그리고 500m 후방으로 물러나 우글거리는 불의 종족들.
충분히 현실성 없어 보일 정도로 위협적인 장면이었지만, 막 넋이 나가서 쳐다볼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헬기에서 더한 것도 경험했었으니까.
“KH가 잘 막아주겠죠?”
“흐음…… 그럴까?”
“네?”
“힘들어 보이는데.”
신예지는 깜짝 놀랐다.
그냥 흘리듯 던진 말이었는데, 사내가 힘들다고 반응할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그리고 그 사내가 하는 말은 항상 맞았다.
“왜요? 지금껏 잘 막아왔었잖아요.”
“다른 놈이 있다.”
“다른 놈이요?”
그때였다.
부스슥-
위쪽에서 풀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누군가 재빠르게 다가왔고, 신예지의 미간이 흔들렸다.
“거기, 웬 놈들이냐!”
“제기랄. 보초가 있었나 봐요.”
그녀가 다급하게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그 누군가가 눈앞에 도달했다.
그녀의 시선으로는 감히 따라잡을 수조차 없는 엄청난 속도였다. 보초조차 S급 헌터를 이용하다니, 과연 KH였다.
“누구냐. 신원을 밝혀라. 이곳은 함부로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녹색 단복을 입은 것 보니 2팀 단원이었고, 팔 쪽에 자수로 된 3이라는 숫자는 그가 3기임을 나타냈다.
결국, 신예지가 한숨을 내쉬며 나섰다.
“저희는 이번에 들어온 신입입니다.”
“신입? 그러면 6기?”
“네,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산 정상에 볼일이 있어서요.”
신예지의 가감 없는 말에 3기 단원의 이마가 이지러졌다.
“……믿을 수 없겠는데. 너희가 단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저곳이 어디라고 새파란 신입을 보낼까……. 게다가 중앙이라면 1 팀장님께서 방금 올라가셨는데?”
“아니요. 그 말이 아니에요.”
“그럼?”
“누군가 지시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저희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는 거예요. 비켜주시지 않으면 죄송하지만 제압할 수밖에 없겠네요.”
그녀의 당당함에 그의 눈이 험해졌다.
“역시 침입자가 맞구나. 그래. 어디 자신 있으면 올라가 봐라.”
“……좋아요. 후회하지 마세요.”
당당하게 외친 그녀가 곧바로 사내의 등 뒤로 이동했다. 빨리 해결해달란 소리였다. 사내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황당한 표정을 했다.
“…….”
“어쩔 수 없잖아요. 문어를 원하는 건 그쪽. 기억을 찾으시려면 일단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셔야지요.”
“……알겠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서자 3기 단원이 피식 웃었다.
“어디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그의 임무는 중앙 구역 수호.
침입자가 있는 한 재빠르게 제압해 소속과 원인을 밝혀야 한다.
“어디 집단에서 보냈는진 모르겠지만 철저하게 조사해주지.”
그가 발을 힘껏 굴렀다.
쿵-
그러자, 땅이 뒤흔들렸다.
“으억-깜짝이야. 뭐, 뭐지?”
발을 헛디딘 것인지 기우뚱거리는 몸을 간신히 세운 3기 단원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발로 땅을 차긴 했는데, 본인이 이 산을 뒤흔들 정도로 강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쿵-
또 한 번의 흔들림이 이어졌다.
“뭐, 뭐야. 도대체?”
결국, 땅에 엎어진 그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안색이 흐려졌다.
“저, 저, 저놈은……?”
“왜, 왜 그러시는데요. 뭔데요?”
신예지의 물음에 그가 철벽 요새 전망이 보이는 곳을 가리켰다.
흔들리는 땅에 사내의 팔을 잡으며 중심을 잡던 그녀의 시선 역시 그의 손을 따라 천천히 돌아갔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섬뜩한 감정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3기 단원의 표정에서 공포를 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뒤를 돌아다봤다.
“허억-”
헛숨을 삼킨 그녀가 그대로 굳었다.
500m 바깥쪽에 있던 불의 종족들 뒤로 말도 안 되는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크기는 그녀가 지금 오르려 하고 있는 산과 비슷할 정도였다.
“저, 저건 티라노 킹?”
“분명, 봉인했을 텐데 어떻게, 저놈이……. 아, 설마 그래서 1 팀장님이 올라가신 건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나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모두 X 됐다는 거야. 저건 선소연 단장님 없으면 못 막아.”
흉측하게 뒤덮은 비늘.
집채만 한 이빨에 시뻘건 눈.
스쳐도 짓눌릴 것 같은 커다란 발톱.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존재였다.
게다가 저 꼬리는 어떤가.
한 번 휘두르면 이 산이 통째로 날아갈 것만 같은 압박감이 전달됐다.
신예지는 소름 끼치는 두려움에 덜덜 떨며 사내를 쳐다봤다.
그러나 사내의 표정은 처음 봤을 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이는 표정.
세상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그 군단장을 직접 보고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신예지는 그 모습에 마음이 살짝 편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사내와 함께 있으면 저 무시무시한 놈에게도 안전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분명 다른 놈이 있다고 했었어. 그게 설마 저놈일까?’
신예지가 사내에게 물었다.
“혹시, 저게 아까 당신이 말했던 다른 놈이에요?”
“그래. 저놈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럼, 저 공룡은 그 쪽에게 상대가 될까요?”
미친 질문이란 걸 안다.
그래도 뭔지 모를 기대감이 들었다.
처음 봤을 때 C급 늑대 20마리를 홀로 때려잡았던 것처럼, 집착하는 BJ 엘리트에게서 구해준 것처럼, S급 헌터인 유성휘를 단박에 때려잡은 것처럼.
이번에도 무언가 보여줄 것 같았다.
천천히 벌어지는 사내의 입술이 이상하게 길었다. 아마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을 거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게 뭐든, 나한텐 안 되지. 절대.”
***
쿵-
현 인류 최대의 적이자 공포를 부르는 괴물, 군단장의 등장에 철벽 위도 난리가 났다.
“……조졌다.”
“저 씹어먹을 놈이 갑자기 왜?”
“제기랄, 놈들이 뒤로 빠질 때부터 어쩐지 불안하더라니까.”
“모두 무기 잡고 전투준비해!”
비상벨 소리를 듣고 온 자들도 역시 각자 자리를 잡고 천천히 다가오는 「티라노 킹」을 맞이했다.
문태준을 제외한 각 팀장들 역시 한곳에 모였다. 넷이 한꺼번에 모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도대체 이게 갑자기 어찌 된 일입니까? 형님. 1팀장은요?”
유현동이 구태경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1팀은 2팀, 3팀은 4팀과 교대해왔기 때문이다.
“잠깐 알아볼 게 있다고 중앙으로 이동했어.”
“후우, 저거 4군단장이죠?”
강설아 역시 대화에 참여했다.
“맞아.”
“우리가 상대할 수 있을까요? 소연 언니 없이?”
“……힘들겠지. 종말의 날에 겪어 봤잖으니 너도 알잖아.”
“그래도 한 마리잖아요.”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일단 지금 확실한 건 우리의 힘으로만 놈을 상대해야 한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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