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대위 귀환하다 111화
29. BJ 엘리트(3)
“꺄아악!”
갑작스레 허공으로 솟구친 신예지가 비명을 내질렀다.
몸을 짓누르는 중력, 그리고 곧이어 느껴지는 붕 뜬 감각에 그녀의 온몸이 긴장하듯 굳었다.
“무, 무슨.”
이윽고 그녀의 시야에 참혹한 ‘건대 입구’의 정경이 가득 담겼다.
하지만 그 광경을 온정신으로 즐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마치 안전벨트도 없는 자이로드롭을 타는 느낌이었으니까.
없던 고소공포증도 생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내의 허리에 손을 감고 힘을 꽉 주었다.
‘이게 말이 돼?’
불안한 마음과 달리 경악은 지속됐다.
그녀는 그저 사내가 건물 골조들을 밟고 차근차근 올라갈 줄 알았다.
폐 끼치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래도 나름 강한 헌터니까 혼자 낑낑대며 오기 부리는 것보단 차라리 그에게 몸을 맡기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에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근데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세상에 25층 높이의 건물을 한 번에 뛰다니. 아니, 날다니…….
“괜찮나?”
붕 떴던 그녀와 사내는 곧이어 건물 옥상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마치 새처럼 가볍고 깔끔한 동작이었다.
“……네?.”
“이곳에 와야 한다면서.”
“아니…… 그게 아니라 잠깐, 잠깐만요.”
그녀는 사내의 품에 안긴 채로 심호흡을 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을까-
신예지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그런데요.”
그녀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건 정말 그녀의 상식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내의 각성 능력이 「공중부양」이나 「점프」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내는 절대 그런 능력이 아니다. 붉은 늑대를 두들겨 패는 모습을 봤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사내의 각성 능력은 「신체 강화」.
육체가 단단해지고 속도가 다른 능력을 갖춘 헌터에 비해 월등히 빨라지는 비교적 상등급의 능력이다.
그것도 적어도 결정체 4개 이상은 먹었을 만큼 강화된 능력이었다. 등급으로 따지자면 최소 A급.
그런데 그녀가 알기로 「신체 강화」계 헌터들은 몸만 단단하고 스피드만 빠를 뿐이지, 이런 식으로 점프할 수는 없다.
백번 천번 봐준다 해서 점프가 가능하다 쳐도, 기억을 잃었다면서 이런 식으로 고 테크닉의 능력을 쓸 순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뭐가.”
“어떻게 한 거냐고요. 분명, 한 번에 점프해서 여기까지 올라오셨잖아요.”
그래서 바로 물어봤다. 하지만-
“나도 모른다.”
대답은 영 시원찮았다.
“모른다고요?”
“응. 그냥 발에 적당히 힘을 준 다음 땅을 박차니까 되더군.”
말은 참 쉬웠다.
기억을 잃었다는 말로 얼버무리려는 거겠지.
그에 대한 각종 궁금 거리가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올랐지만, 그냥 참았다. 물어도 들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사내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란 것.
아무래도, 빨리 기억을 찾도록 돕는 게 인류에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잡생각을 이어가자,
사내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여기 있을 생각인가.”
“네?”
신예지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 인천에 빨리 가고 싶으세요? 방송 그만할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요?”
“아까부터 내려가라고 팔 내려주고 있지 않은가. 계속 안겨 있을 셈이냐?”
순간, 정신이 번뜩 차린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너무 생각에 몰두했던 건지, 아니면 사내의 품이 아늑했던 건지, 내려가야 한단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내려갈게요.”
그가 빠르게 내려가 흐트러졌던 머리를 다시 다듬고 옷매무새를 정리하자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저기.”
“아, 네. 말씀하세요.”
“굳이 방송을 하지 않을 것까진 없다.”
“아…….”
“나 역시 널 필요로 하고, 너 역시 날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굳이 그 상호협력관계를 깨면서까지 일방적인 도움을 받고 싶진 않다.”
사내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신예지는 그 음성이 너무도 달콤하게 들려왔다.
기억 잃은 사람 가지고 정말이래도 되는 건지 나름 신경 쓰였는데, 그런 걱정을 단숨에 날려 보내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심했다.
방송은 시청자들과의 약속이니 딱 일주일만 하고, 다음부턴 그가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끝까지 돕겠다고.
***
“헥, 헥……. 힘들어 죽겠네.”
그 시각-
BJ 엘리트는 천천히 건물 골조를 하나하나 잡아 오르고 있었다.
가면남이 촬영 장비도 안 챙기고 올라가는 바람에 짐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한 손으로는 꾸준히 방송을 진행했다. 그 모습은 진정 프로다운 모습이었다.
-ㅋㅋ 그러니까. 왜 자존심 부려서.
-우쭈쭈, 예지한테 잘보이고 싶어쪄요?
-가면남 vs 엘리트! 가면남 승!
“흥. 웃기지 마세요. 각성능력이 특별했겠죠. 헥, 헥…….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렇게 건물 오르는데 특화된 능력들이 있거든요?”
그는 힘겹게 오르면서도 시청자들의 놀림에 하나하나 반박했다. 본래는 웃어넘기는 댓글들이었지만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애써 준비한 패가 하나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오히려 가면남이 신예지에게 매력을 어필하는 꼴이 돼버렸다.
그야말로 일거양실(一擧兩失)을 몸소 실천해 버렸다.
-응. 다음 변명.
-엘하다 추리트야.
-레알 추함. ㅋㅋ
“진짜예요. 제가 장담합니다. 아마 가면남 능력은 「공중부양」, 아니면 「점프」일 거예요. 뭐, 그 정도까지 뛸 수 있는 거 보니 나름 고등급이긴 하겠네요. 하지만!”
잠깐 숨을 고르기 위해 골조에 걸터앉은 엘리트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능력은 특수작전에서나 유용하지 실질적인 전투에서 아주 쥐약이에요. 괜히 강원도에 없고 이런대서 의뢰나 받고 있는 게 아니란 겁니다.”
-그런가?
-?? 그럼 연합회장 최강수는? 그분도 「공중부양」 아님? 세다고 들었는데.
-그분은 S급이잖아. 차원이 다르지.
-ㄴㄴ. 요즘 전투에 참여 안 하고 행정 일 한다고 들음. 신입들한테 밀릴걸?
-하긴, 어마어마한 능력들이 널리고 널렸으니까.
헌터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시청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엘리트는 다시 판을 흔들었다.
“게다가 그 능력이 제일 빛을 발할 때가 언젠지 아십니까?”
-뭔데?
-등산할 때?
-ㅋㅋㅋ 등산을 왜 능력으로 함. 그게 의미가 있음?
-왜. 가끔 힘 안 들이고 정상 찍고 싶을 때 있잖아.
-ㅇㅈ. 그러니까 케이블카도 있는 거지.
“크큭. 그것도 맞지만, 바로 도망갈 때입니다.”
-ㅋㅋㅋ
-ㅋㅋㅋㅋㅋ
-그건, 그러네. 도망은 진짜 빨리 가겠다. ㅋㅋ
재빠르게 올라오는 채팅창 상황을 보며 엘리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원하는 반응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간 비겁하다 할 수 있겠지만, 틀린 말 한 것도 아녔다. 실제 그런 이유로, 능력을 가려 뽑는 집단들도 늘고 있는 추세였으니.
“자, 그럼 빨리 올라가서 지역 정찰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좀만 기다려주세요.”
지금은 이렇게 치욕을 당했지만, 앞으로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다.
여행 기간 동안 분명히 사냥 기회가 올 것이고.
사냥에 있어서 그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 있었다.
그의 지론은 이랬다.
사냥은 철저한 준비와 지혜. 그리고 순간순간의 센스로 하는 거지, 절대 능력으로 하는 게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능력으로 한다 쳐도, 가면남의 각성능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를 이길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사냥할 때도 그렇게 잘난 척할 수 있는지.’
***
“그래서 여기에 올라온 이유가 뭐지? 중요한 일인가?”
사내가 옥상 전망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신예지는 그런 사내의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물론, 정찰하는 건데 중요하죠. 지상은 그쪽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거든요.”
“……그런가?”
“네, 특히 남쪽에서 강원도로 이동하는 ‘레프’ 무리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그녀가 오른 손날로 목 긋는 시늉을 했다.
“뼈도 못 추리는 거죠. 아무리 S급 헌터라해도 힘들 걸요?”
“레프 무리?”
사내가 머리를 기울이자, 신예지가 아차 했다.
“아, 그 익룡같이 생긴 놈인데……. 인류가 지상을 뺏긴 주원인 중 하나죠. 군단장을 제외한, 최강의 S급 중 S급 괴물이에요. 원래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놈들인데, 언젠가부터 몇 마리씩 강원도로 이동하는 것 같더라고요.”
“어쨌든 위험하다는 말이로군.”
“그렇죠. 아, 저기 영동대교 쪽 보이시죠?”
설명하며 주변을 빠르게 스캔하던 그녀가 한강 유원지 근처를 가리켰고, 그곳을 사내가 심유한 눈으로 관찰했다.
“으음?”
그곳에는 괴이한 생명체가 있었다.
언뜻 보면 도마뱀처럼 생겼는데, 등에는 돛처럼 피어난 돌기가 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건…… 처음 보는 파충류로군.”
“맞아요. 저건 디메트로돈이라고 불리는 놈이에요. C급인데 성질이 포악하고 사냥법이 까다로워서 대부분 건들지 않고 넘어가죠.”
디메트로돈.
우리나라 말로 「범룡」이라 불리는 이놈은 확실히 까다롭다.
몸체에 비해 크고 단단한 이빨, 그리고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항상 선공하기에 웬만큼 준비되지 않고서야 함부로 사냥하지 않는다.
특히 뒤에 나 있는 돌기로 평소 태양열을 흡수했다가 약한 브레스를 쏘는데 그 열기가 어마어마하다.
“음……. 한강라인을 타긴 타야 할 텐데……. 일단, 성수대교 쪽으로 먼저 가야겠어요. 저놈이랑 마주치는 것보다는 그게 나아요.”
“성수대교?”
“네. 오른쪽에 보이는 또 다른 다리에요. 거기부터 해서 강변북로 쭉 타고 가다가 방화대교나 김포대교에서 꺾는 거로 해요. 음……. 숙박은 근처 낮고 멀쩡한 건물 찾아보기로 하고……. 아, 물론, 상황에 따라 또 달라질 수도 있으니 너무 자세히 듣진 마세요.”
“알겠다.”
신예지는 정찰과 동시에 앞으로의 여행 라인을 짜면서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별 관심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댔다. 그녀가 말하는 지명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헥헥, 거의, 거의 다 왔습니다. 시청자분들.”
마침, 아래에서 엘리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넘어갈 듯 말하는 것 보니 그가 본인의 페이스보다 빨리 올라오려고 무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머리칼은 흥건히 젖어 있었고, 다리에 힘도 많이 빠진 것인지 후들거리고 있었다.
“응? 인제야 왔나 보네요?”
“많이 느리군.”
신예지가 일어나 아래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골조에 매달려 있던 엘리트가 카메라 삼각대를 내밀었다.
“예지 씨. 거 쳐다만 보고 있지 말고 여기 이것 좀 받아줘 봐요.”
“아……? 네, 주세요.”
그녀가 카메라를 받자, 그가 마지막으로 발에 힘을 주어 힘껏 점프했다.
툭-
마침내 도착한, 엘리트.
출발한 지 약 5분에 걸쳐 이곳에 도착했다.
신예지는 그런 그를 절대 비웃지 못했다.
그녀도 알기 때문이다. 5분 만에 이곳에 오른다는 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다만, 저 사내가 말도 안 되는 것뿐이다.
“후우, 예지 씨.”
그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비 오듯 흐르는 땀을 꾹꾹 눌러 닦으며 말했다.
“네?”
“아까 밑에서 들었는데 말이에요.”
“뭘요?”
“범룡을 봤다고 했나요?”
그도 나름 C급 헌터라고 위에서 나누는 대화 내용을 들었나 보다. 그의 말에 신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네. 아무래도 피해 가는 게 좋겠어요. 놈은 변수가 너무 많고…….”
“아니요. 예지 씨.”
엘리트가 그녀의 말을 딱 끊었다.
“잘 생각해 봐요.”
“네? 뭘요? 설마…… 당신.”
신예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방송의 컨셉이 뭐에요. 시청자분들께 참혹한 지상 광경을 보여주려는 거 아니에요? 과연 시청자분들이 부서진 건물, 수준 낮은 괴물들만 보고 싶어 할까요? 아닐 겁니다. 분명히 놈을 사냥하길 원할 거예요. 그렇죠. 여러분?”
엘리트가 기습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신예지를 비췄다.
그녀는 곧바로 찌푸렸던 인상을 다시 폈다. 그리고 눈앞에 화려하게 올라오는 채팅들을 확인했다.
-그 소문의 범룡?
-공룡 빠돌이로서 난 좋음. 꼭 한번 보고 싶다.
-솔직히 가면남이랑, 엘리트 정도면 충분히 잡지 않음?
-잡아라.
-사냥 ㄱㄱ.
위험한 것을 부추기는 시청자들.
아마, 올라오면서 그들의 기대감에 불을 지핀 게 분명했다. 엘리트는 다시 화면을 본인에게 가져오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다네요. 게다가 놈은 C급. 충분히 제가 처리할 수 있는 범위의 놈이에요.”
“하지만 디메트로돈은…….”
“네. 그쪽 말대로 변수가 많죠. 하지만 철저히 준비한다면 다를 거 없습니다. 예지 씨, 사냥 전문이세요? 아니죠? 전 사냥을 업으로 방송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놈에 대해 더 빠삭하게 잘 알까요?”
엘리트의 주장에 결국,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 좋아요.”
솔직히 안전에 대해 걱정할 것까지는 없었다. 확실한 믿음을 주는 사내가 있었으니까.
단지, 엘리트의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큰 사고가 날 것 같은 느낌에 불안했을 뿐이었다.
“잡아보죠. 해봐요. 한 번. 그쪽이 원하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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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BJ 엘리트